BEST F.A 김유찬 대표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등을 알아봅니다.
제조와 서비스를 접합하여 용접 산업계의 혁신을 이어가다
공동 작성_ 정원일 교수(경북대학교), 김공숙 전문작가(프리랜서)
BEST F.A는 용접 및 용접 자동화 시스템 전문 회사이다.
소형 피복 아크 용접기부터 고성능 디지털 용접기를 비롯한 다양한 특수 고기능 용접 장비를 고객에게 제공하고 있다.
1997년 설립되어 올해로 창립 20년을 맞이하였으며 꾸준한 기술 축적과 성장을 하고 있다.
BEST F.A라는 회사명의 의미가 궁금해 홈페이지를 열어봤다.
“Best Easy Simple Technology Factory Automation” 최고로 쉽고 단순한 기술 공장 자동화.
이름 안에 이 회사의 정신과 추구하는 비전이 들어 있다.
창업자인 김유찬 대표는 용접의 접합 한계를 넓히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쉼 없이 도전하고 있다.
용접 생태계에서 꾸준히 성장해 온 비결
BEST F.A는 용접 장비, 용접 자동화 시스템, 용접 부재와 소모재를 공급하며, 용접 프로세스 컨설팅, 용접 테스트 시연과 교육을 하는 회사이다.
로봇 및 전용기를 이용한 용접 자동화 시스템과 작업 특성에 맞는 용접 프로그램 및 소프트웨어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용접으로만 반평생을 살아온 김 대표는 자신이 키우는 나무가 자라듯이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생각을 키우며 자신과 회사를 일구어왔다.
지속적으로 기업인 대상 교육기관을 활용하여 경영지식과 생활지식에 대한 교육을 받고, 책장에 빼곡히 들어찬 책들을 틈틈이 읽는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학습용 CD를 비치하여 어디서든 늘 배움의 기회와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고 한다.
1980년대 중공업이 발전하면서 용접 분야는 뿌리산업으로 육성되었다.
조선, 자동차 등 쇠를 가지고 하는 산업 분야에서는 무엇이든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용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용접 분야는 양적으로는 성장했을지 몰라도 질적 발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용접 산업 전반에 걸친 자체적인 기술개발보다는 수입 전문 업체들이 외국 것을 들여와서 파는 데 그치고 만 것이다.
사회문화적인 분위기 또한 용접 분야는 돈이 안 되는 것이라며 소홀했다.
용접은 실제 생활 속에서 주전자부터 시작해 건축물 용접까지 곳곳에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3D 산업이라고 천시하고 박대하였다.
그러나 김 대표는 접합이 없이는 불가능한 산업이 많다는 것에 주목해 이 분야를 특화시켜 앞으로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지를 고민했다.
BEST F.A는 단순한 용접 회사가 아니다.
용접이 쇠를 녹이고 붙여 원하는 형상을 만들듯이, 제조와 서비스를 접합해 고객을 최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2014년 만들어진 인텔리전트 플랫폼(Intelligent Platform)일 것이다.
용접기 시스템은 소재의 변화에 따라 적응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재의 경량화, 강도의 변화 등 소재의 변화는 새로운 용접 기술을 필요로 하고 이에 대한 솔루션이 필요하다.
BEST F.A는 바로 변화와 적응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까지 왔다.
인텔리전트 플랫폼 모델은 여느 경쟁사들과 같이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는 ‘Me-too’ 전략이 아니다.
따라 하고 싶어도 따라 하기 힘든 모델이다.
용접은 결과물을 만들어서 보여주기 전에 먼저 테스트와 분석을 선행 제공해야 고객이 안심한다.
테스트와 분석을 함께 제공하면 고객이 궁금해 하는 것에 답을 줄 수가 있다.
‘왜 그렇게 용접하면 안 되고, 왜 이렇게 형상을 바꾸어야 하며, 그냥 할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다.
이 방법은 비용은 들지만 고품질을 요구하는 고객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
설사 테스트에서 안 되는 것으로 결과가 나온다 해도 무엇이 실패를 만드는 것인지 역추적해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테스트를 할 때 저희가 실력이 안 되어 고객을 만족시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좋은 시스템이라면서 왜 안 되는 거냐는 불평도 들었습니다. 그럴 때는 솔직한 게 최고입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안 되는 것이지 시스템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지요.”
용접기 제작 업체는 무척 많다.
BEST F.A가 앞서가는 기업이지만 용접 장비가 다른 곳에 비해 고가이다.
그럼에도 고객이 이 회사를 찾는 이유는 여느 용접 기업에서는 따라 할 수 없는 방식을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철금속에 대한 용접 테스트를 해 주는데는 없습니다. 우리는 고객 니즈에 맞는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사전 검사를 무료로 해주고 분석까지 해서 제공합니다. 분석실을 별도로 보유하고 있지요. 경쟁사와 차별화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패러다임을 바꾸었습니다. 대부분의 사업자들은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만 우리는 서비스를 목적으로 삼고 접근합니다. 즉, 고객의 의문과 욕구를 먼저 충족시켜 주고, 고객들이 스스로 판단하여 구매하게 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객이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기 전에 바뀌는 환경과 새로운 프로세스를 이용하여 용접을 시현하는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BEST F.A는 6대의 용접 로봇을 별도로 보유하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방문했을 때에도 분석실 설치와 용접 로봇 장비 검사가 한창이었다.
제조와 서비스가 결합한 용접 로봇 산업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
과거 우리나라의 용접 1세대는 유럽의 1세대와 마찬가지로 손기술에 의존하는 용접이었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한국인은 특히 용접에 강한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손기술이 좋다 보니 용접기의 성능과는 상관없이 뛰어난 손재주를 발휘해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1세대 인력은 베이붐 세대의 은퇴 시기와 맞물려 현역에서 물러났다.
이들이 물러나고 나니 사람 위주의 용접은 기기 위주의 용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국은 그동안 좋은 스킬만 믿다가 장비 개발이 늦어져 버렸다.
3D에서 첨단으로 넘어가는 현실에서 기술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주어진 일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그 대안으로서 부상한 것이 로봇 용접이다.
로봇 용접은 생산성, 품질 증대뿐만 아니라 인력 대체를 위한 장비 위주로 발전했다.
이제 고급 기술의 범용화를 위한 스마트한 용접 플랫폼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
“용접 산업에도 불황이 있어 경기 순환 사이클을 비켜가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다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이 있는 곳을 모르고 못 찾을 뿐이지 일은 어디에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용접 기술이 필요한 회사를 찾아서 애로사항과 개선 가능한 사항을 찾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고객으로 만드는 것이 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부터 전 사원과 함께 귀를 열어서 어떻게 새로운 아이템을 찾고 개발해 나갈 것인가를 같이 고민합니다. 그리고 함께 뜁니다. 우리는 고객의 서비스에 대해 고민하는 연구를 연구소에서 합니다. 고객으로부터 비용이 들어오기 때문에 고객이 매력을 느끼는 개발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 일을 BEST F.A의 연구소가 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회사 BEST F.A가 연구소를 가지고 있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유이다.
약이 되었던 20대의 창업 실패 경험
젊은 시절 김유찬 대표는 세 번의 사업 실패를 경험했다. 세 번 모두 남들보다 앞서가다가 낭패를 보았다.
군 제대 후 중동에 나가서 일하고 싶었으나 중동붐이 사그라들던 때라 마음을 접고 LED 광고판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LED 광고판은 매우 앞선 사업이었지만 수익이 맞지 않아 바로 접었다.
두 번째는 아파트 건축이 호황일 때 수위실에서 수동 인터폰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자동 연결 장치를 만들어 팔기로 했다.
그러나 만든 제품을 가지고 영업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는 ‘굳이 안 바꾸어도 잘되는데 뭐 이런 것을 하느냐?’였다.
다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프레스는 전부 마그네트식로 되어 있었는데 시대를 앞서갔던 청년 김유찬 사장은 요즘 사용하는 것과 같은 PLC(Programmable Logic Controller)01 자동화 설비를 만들었다.
부산 사상공단에 찾아가 판로 개척을 시도하자 이번에는 ‘일본에서도 아직 사용하지 않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왜 먼저 하느냐’라는 소리를 들었다.
시장 진입에 모두 실패하고 사업을 접었다.
남들보다 먼저 하는 사업, 늦게 하는 사업은 성공이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1987년 27세의 김유찬은 딱 3년만 버티다가 나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삼성중공업에 입사했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배워 준비한 다음에 내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샐러리맨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 입사할 때는 이전 실패한 사업으로 인해 마음도 무거웠고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 와신상담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중공업 생산기술부 메인터넌스 파트에 소속된 김유찬은 CNC02 관련 자동화 공작기계 관련, 설비 유지 보수를 담당하게 되었다.
점점 일하는 재미, 배우는 재미에 푹 빠졌다. 세 번의 창업 실패 경험은 헛것이 아니었다.
사용자와 구입자인 고객의 움직임과 흐름에 대해 예민한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는 본능이 되었다.
또한 일에 대한 호기심은 작업에 몰입과 정성을 쏟는 힘이 되었다.
청년 김유찬 사장이 공장 기계에 관심을 갖던 시기에 이미 자동차 산업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자동화 로봇이 공정 내에 도입되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 공장 자동화를 위한 대형 로봇의 설치가 활발했다.
6축다관절이 아닌 8축, 10축 다관절 대형 로봇을 도입하던 시기, 김유찬은 삼성중공업에서 로봇을 수리하고 조작하는 일을 담당했다.
“당시에 로봇이 들어오면 모든 것이 만능으로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로봇을 4대 도입하고 스웨덴까지 가서 공부해 왔는데도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모든 공정의 준비가 철저해야 로봇은 오작동 없이 움직일 수 있는데 그 미세한 변화들을 감지해서 기록하고 관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취약했습니다. 어려움은 말도 못할 정도로 컸지만 당시 공장장은 지금 힘들어도 앞으로는 자동화로 갈 수밖에 없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소신을 가지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현장에 근무하면서도 처음에는 모르는 기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배워야 했는데 그는 삼성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잔업에 상관없이 스스로 공부해서 수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정에서 오작동 원인을 찾기 위해서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아침 6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했습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르니까 배워야 해서 앞뒤 재지 않고 일에 열중했습니다.”
주변에서는 그를 독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찬 대표는 삼성중공업에서 제안제도, 공정한 고과 평가제, 성과급제 등의 수혜자가 되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성과를 인정받아 회사에서 제공한 특진 제도에 따라 두 번이나 승진할 수 있었다.
노력도 많이 했지만 일이 무척 재미있었다.
꼭 자신의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목표도 있었기에 더욱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눈여겨본 한 귀인의 제안으로 이듬해 회사를 옮기게 된다.
유럽에서의 연수 경험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나다
첫 번째 귀인은 로봇 설비를 국내에 판매하며 기술영업을 하던 IGM의 지사장이었다.
김유찬 대표는 그당시 수입한 기기를 수리해 주는 기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를 눈여겨 본 지사장이 본사가 있는 오스트리아로 6개월 연수를 보내줄 터이니 연수를 받고 와서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한 것이다.
1991년 6월 영어도 못하였던 김유찬 사장은 당시 돌도 채 되지 않은 첫아이를 두고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오스트리아에 본사를 둔 기업 Fronius에 기술연수를 받으러 갔다.
이 회사는 세계적인 용접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이었다.
“문화충격이었습니다. 300명 정도가 일하는 중견회사에 점심시간이 30분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함께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데 거기에서는 누구 한 사람 ‘점심 먹으러 가자, 커피 마시러 가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각자가 알아서 하는 식이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점심 안 먹니?’ 하기에 ‘배고프지 않다’고 3일을 버텼다가 결국 ‘도대체 점심을 어디서 먹느냐’고 손짓 발짓으로 물었습니다.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요. 그랬더니 빵 차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더군요.”
기술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면서 김유찬 대표는 한국과 오스트리아 공장 조직의 문화를 서로 비교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운영해야 할 회사의 조직과 문화는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중에 그 자신의 사업에서 큰 전환점이 될 중요한 무형의 수업을 받게 된 셈이다.
“모든 시스템들이 한국에서 근무했던 환경과는 100% 달랐습니다. 왜 외국의 제품이 좋은가 하면 그들은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컵을 만든다고 합시다. 그러면 구성원들 스스로가 토론하고 논의하고 문제가 있으면 설비, 전장, 기계가 다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구조입니다. 저로서는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제일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그들은 100번을 질문해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질문을 3번 이상 하면 머리 나쁘다고 쥐어박잖아요? 유럽 문화는 토론이 기본인 문화이고, 이야기를 해보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 오스트리아 공장에서의 6개월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와 기술을 배우고 느끼게 해 준 훌륭한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협력과 토론 문화를 되새기며 1991년도에 귀국하여 IMF가 발생한 1997년 회사를 그만둘때까지 김유찬 대표는 매년 외국 출장을 다녔다.
집에 1년에 100일 이상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지만 IGM에서의 일은 항상 새로운 일을 배운다는 재미도 있었고, 그만큼 고되기도 했다.
“울산 현대중공업 자동화 로봇 공장은 수리해야 할 생산 부서 위치가 정문에서 너무 멀었어요. 그냥 걸어 다닐 수도 없고 나가서 자고 들어와서 다시 일하기도 불편했지요.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을 때는 들락날락하는 대신 큰 기계 밑에 미지근한 열이 남아 있는 모터 옆에서 잠을 잤습니다. 거기서 늦게까지 일하다가 밤을 새우고 새벽에 쪽잠을 잡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에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다음 장소인 안양까지 가서 다른 장비를 고치곤 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집에 들어가는 날이 일 년에 100일 정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일이 고되기보다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현장 라인을 멈출 수 없을 때 고쳐주고 나면 고객이 그렇게 고마워할 수가 없어요. 그 표정과 감사의 표현들이 저를 고무시켰습니다.”
자연스럽게 7년 동안 고객들에게 김유찬 대표에 대한 이미지가 각인이 되었고, 그것이 그의 사업을 시작할 때 연결고리가 되었다.
고객들은 김유찬 대표를, 부르면 거절하지 않고 언제 어느 때나 밤늦게 불러도와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인연들이 사업을 시작할 때 사업 밑천이 된 것이다.
또 다른 무형의 자산을 확보하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할 때 하늘이 돕는다
그의 말대로 사업에서 귀인은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내 일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지켜본 그 누군가가 조금씩 도와주게 된 것이다.
“회사에 도착하면 다급한 사람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은 거대 로봇을 움직이는 생산 부서 소속직원들이었습니다. 대형 장비인 로봇의 정상화는 늘 시간과의 다툼입니다. 3일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고민을 하고, 또 하고, 자꾸 생각을 하다 보면 사소한 것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상한 소리, 이상한 냄새, 이상한 장치가 없는지를 촉각을 세우고 파악하다 보면, 고민한 지 3일 정도가 되면 답이 나옵니다. ‘아, 빠트린 게 이거였구나’라고 깨닫게 되면 비로소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취감으로 스스로 감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고객들이 정상 운영되는 로봇의 상태를 보고 얼마나 고마워하고 뿌듯해 하는지 몰라요. 여기서 신뢰가 쌓이고 김유찬이 오면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다는 이미지가 쌓이게 된 것이지요.”
그런 김유찬 대표에게 새로운 위기와 기회가 왔다.
1997년도의 IMF였다. 한국의 모든 로봇 자동화 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일감은 줄어들고 장비 값은 천정 부지로 뛰어올랐다. 김유찬 대표는 회사의 경영 환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경영진에게 ‘내가 나가면 두 사람을 더 채용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자진 사퇴를 결정하고 창업을 했다.
그에게는 복안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Fronius를 찾아갔다.
당시 그 회사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한국에 보급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가격이 너무 고가라서 기존 에이전트들에게 불평을 들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유찬 대표는 질문을 던졌다.
“어디에서 사용될 용접기기이기에 이렇게 비싸게 만들어졌는지?”
그 용접기는 알루미늄 용접을 위한 제품이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알루미늄 용접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러나 김 대표는 우연한 기회에 국내의 알루미늄 용접이 황금 밭이 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던 터였다.
그래서 이 제품을 영업하기로 결정했다. 이 용접기가 오늘의 BEST F.A가 있게 한 첫 사업 아이템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제 용접기는 Full Digital 용접기라고 해서 기존의 200~300만 원하는 용접기와는 성능이 달랐습니다. 한 대에 2,000만 원이나 하는 고가 제품이었어요. 한국 딜러가 팔 수 없다고 포기한 제품을 제가 1년 동안 팔아 볼 기회를 달라고 하고 판권과 수리권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 시절, 고속철도를 도입하기 위해 프랑스 TGV 고속철을 수주하여 설치하기로 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KTX 중 일부는 자체 제작을 위해 차량의 바디를 알루미늄으로 구입해 놓았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도 알루미늄 철도차량 용접을 해본 사람이 없었다.
알루미늄은 공기 저항이 적고 가벼워서 KTX 차량 바디로 제격이지만, 용접이 이전과는 달라야 했다.
이 용접은 김 대표가 도입한 장비로만 가능했다.
이러한 절묘한 기회 또한 김 대표가 평소 기술 수리를 담당했던 회사 고객의 작은 조언을 통해 잡은 것이다.
그 또한 두 번째 귀인이다.
그와의 인연은 과거 안양에 있던 대우의 철도차량에 로봇이 들어가고 있던 때 김 대표가 수리를 맡게 되면서 이어진 것이다.
김대표가 창원에서 출발해서 가려면 6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는데, 당시 담당이던 그 귀인이 아침 8시까지 들어오라고 하면 김 대표는 두말없이 가서 수리를 해주었다.
그가 마침 철도차량을 맡게 되었다면서 김대표가 용접기 장비를 가지고 가서 테스트할 기회를 허락해 준 것이다.
인생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KTX가 알루미늄 바디이고 그것에 용접이 필요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저 자신의 일을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까 하늘에서 문을 열어 준 것 같다고 한다.
2000년도 영업 첫해에 그 비싸다는 오스트리아제 디지털용접기를 27대를 판매했다.
오스트리아 Fronius에서 까지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는 어느 기업을 가더라도 공구를 빌려주면 ‘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습관이 배어 있다.
어린 시절 친가의 호랑이 할머니로부터 훈육 받을 때마다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문장 ‘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더니 고객이 귀인이 되어 돌아왔다.
지금도 문자를 보낼 때 ‘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무조건 넣는다.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분들이 기회를 주어서 사업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태어난 김유찬 대표는 아버지가 경북 의성 분이었다.
그래서 제주도에 살다가 초등학교 입학 즈음에 제주도에 놀러 온 삼촌을 따라 할머니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자유롭고도 창의적인 생각은 초등학교 때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당시 삼촌은 의성의 극장에서 간판을 그렸는데 삼촌 덕분에 초등학교 때 영화를 무척 많이 볼 수 있었다.
의성에 사는 4년간 영화를 보고 나면 다시 친구들에게 스토리를 만들어 설명해 주는 것이 아주 재미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소년 김유찬 대표가 영화에서 본 배경 화면, 기술, 영상의 스토리 전개는 경영과 고객의 만남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잠재된 무의식이 감성을 자극해 지금도 어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스토리텔링식으로 대화를 전개하여 듣는 이가 매우 흥미롭게 몰입한다.
그는 지금도 영화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기존의 관점을 비틀어서 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을 얻으려면 젊은이들에게 영화를 보라고 권한다.
“송강호가 나오는 ‘관상’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아요. 한명회가 찾아와서 관상쟁이에게 묻는데 ‘저 사람이 왕이 된 것을 보았느냐?’ 하니 송강호가 ‘나는 저 파도를 보았을 뿐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은 보지 못했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쁜 사람, 좋은 사람들을 보았지만 실제로 이에 영향을 주는 무형의 것들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제가 청소년 특강에 가면서 이 말을 응용해 봅니다. ‘보이는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라’라고 하지요. 예전의 강의할 때에 음료수를 사서 나눠준 적이 있는데 병뚜껑을 따면 그 안에 경품권이 있고 얻은 사람과 못 얻은 사람이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오늘 여기에 내가 와서 음료수를 줄줄도 몰랐고 거기에 경품권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은 보이는 병뚜껑 뒤에 보이지 않는 행운이 기회처럼 옵니다. 이런 기회를 잡아보세요’라고 말합니다.”
교육기부 활동과 사람 키우기
김유찬 대표는 주고받음의 승-승(Win-win)의 문화를 체험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누가 고급 디지털 용접기를 사용하겠느냐고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기회는 자신이 쌓아 놓은 신뢰의 줄들이 연결되면서 KTX 차량 용접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찾아주었다.
용접기를 사용해 본 고객들은 다시 입소문을 내어 새로운 철도차량 합작회사에서 구매 요청이 지속적으로 들어오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용접학과가 있는 대학에 용접기를 기부하기 시작했다.
폴리텍 대학을 포함하여 점차 용접학과가 있는 대학으로 기증을 넓혀갔다.
학부생 40~50명이 용접기를 사용하여 배우고 졸업해 나가면 5~10년 후 누군가가 자신의 현장에서 이 용접기에 대해 언급해 주었다.
졸업생들이 소문을 내주면서 철도에서 군함으로, 선박으로 고급 용접 환경에 필요한 용접기는 늘 김유찬 대표의 BEST F.A 제품이 추천되었다.
소문은 자연스럽게 판매로 성사되었다. 졸업생들이 더 나은 지위로 올라가면서 또 구매를 해주었다.
이러한 소중한 선순환의 경험을 귀하게 여기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기꺼이 교육기부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선순환은 공유의 미덕을 발휘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선한 의도가 마케팅 측면에서도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셈이다.
김 대표는 대학 외에 용접학회와도 처음부터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이제는 양산 체제가 아닌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와 소재의 변화를 감안한 컨설팅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용접의 선행기술을 조사해 우리 환경에 맞는 기술을 확보한 다음 학회를 통해 소개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자동차, 중공업의 트렌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고 스스로 테스트를 하여 학회에 발표를 하기로 했다고 하자.
그러면 먼저 BEST F.A 연구소가 주제를 정해서 선행 기술을 확보해 고객과 공유한다.
고객의 니즈를 반영한 용접 테스트를 해주다 보면 유형적인 비용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서로 수정 보완하여 해결점에 도달하게 되고 신뢰를 공유하는 무형적 자산이 증대한다.
회사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다음 프로젝트에서 그것을 반영하면 된다.
결과물은 학회에 발표하고 지식을 공유하고 수정 보완을 거쳐 기술은 더욱 업그레이드된다.
이로써 김유찬 대표의 말 대로 ‘실패는 해도 포기는 없다’라는 설득이 구성원으로부터 공감을 얻게 된다.
이런 진실을 약 20년 동안 사업을 하면서, 또 연구와 실패를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어떤 위기에도 강한 BEST F.A의 맷집이 되었다.
BEST F.A의 구성원은 3명에서 시작해 현재 38명이 근무하고, 매출액은 처음의 300배가 늘어났으며 부채가 전혀 없는 건실한 회사가 되었다.
한 개인의 회사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회사라는 인식을 모두가 공유하고 발전하기까지 20여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장기근속자가 많고 최근에는 일학습병행제 사업의 일환으로 맞춤형 도제학교 인력양성사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산업기능요원을 선발하여 현장에서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기술과 서비스 중심의 기술 인력으로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내가 놀고 싶으면 종업원도 놀고 싶고 공부하고 싶으면 종업원도 공부하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는 매년 전체 직원과 가족이 동반하여 최소 4명에서 6명씩 함께 휴가를 갑니다. 토론이나 워크숍 등을 하지 않고 직원들 모두가 가족이나 동반자들과 더불어 마음껏 힐링할 수 있도록, 괌에도 가고 제주도 6성급 호텔에서 가서 쉬기도 합니다. 지난 연말에는 정동진 썬크루즈 리조트 여행도 했습니다. 이 행사에는 혼자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같이 여행하고 싶은 사람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이 여행의 목적은 교육이 아니라 구성원들로 하여금 여행을 통한 상호 간의 소통과 힐링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축적하고 또, 회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다음 연도에는 어디로 갈 것인지 먼저 고민하는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회사는 구성원 스스로가 소속감과 자긍심을 기반으로 함께 목표를 달성하고 만들어가는 분위기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지 사장이 아무리 혼자 한다고 해서 안 됩니다. 직원이 38명밖에 안 되지만 병원 및 안전, 소방관리 대행 기관과 계약하여 매월 간호사가 직접 회사에 와서 건강을 체크해 주고, 작업환경의 유해 위험요인을 점검합니다. 우리 회사는 지금까지 근무시간을 연 625시간 줄였습니다. 아침 8시 반에서 저녁 6시 반까지 일하고, 주말에 일하면 주 중에는 쉬게 해줍니다. 결국 구성원의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과 행복에서 회사의 수익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직률이 줄어든 것은 10년 전부터였다. 초기에는 이직률이 감당이 안 되었다.
‘왜 그런가?’ 고민을 많이 했다. 상사와의 갈등, 조직에서의 충돌 등 하나하나 사례를 보면서 고쳐 나가기로 했다.
‘회사를 먼저 바꾸자! 나부터 먼저 바꾸자!’를 화두로 삼고 변화를 시작했다. 지금도 매년 새로운 기법을 도입한다.
어떤 것을 올해 시뮬레이션해 보고 좋으면 이를 개선해 나가 보자고 김 대표가 적극 추천한다.
그는 기업을 시작할 때부터 연봉제 대신 능력제로 출발하였다.
종업원들은 대략의 급여는 알지만 인센티브는 일 년에 한 번 지급하기 때문에 서로의 급여를 잘 모른다.
50대 나이에 이 회사에 와서 일을 배워보겠다는 사람도 있다.
김 대표는 일할 기회를 주고, 그는 일한 능력과 결과만큼 가져간다. ‘50대가 여기 와서 무엇을 하냐?’고 물었다.
“우리는 백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새로 배우면서 사는 것이지요. 어느 조직이든지 100% 화합은 없습니다. 기존 인력이 불편해할 수도 있지만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좋은 70%는 실행하고 30%는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가 개선할 것은 먼저 해주고, 안 되는 30%는 정신교육 등을 통해서 개선해 나가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후배 엔지니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바뀌지 않는 자신의 원칙을 말했다.
“살다 보면 귀인이 있다고 했지요. 그 귀인은 내가 스스로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나를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일이 생겼을 때에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선택하면 그 사람이 나에게 귀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나를 도와줍니다. 하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나를 잘 봐달라고 하면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BEST F.A에는 슬로건이 없다.
유럽 회사에 연수갔을 때 배운 것인데, 모든 것이 말 한 마디로 끝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현수막과 포스터가 없어도 정해진 단순한 원칙을 모두가 준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원칙은 통제가 아닌 모두가 편하기 위해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원칙은 단순하다.
“행동하려면 실천해야 하고, 실천하려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원칙을 조금 풀어보았다. 행동하려고 마음먹었으면 반드시 실행(실천)에 옮겨야 하고, 실행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완성과 성공을 위해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김유찬 대표의 말을 듣다 보니 중용(中庸)의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성이 없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01 각종 센서로부터 신호를 받아 제어기에 보냄으로써 사람이 지정해 둔 대로 로봇이 작동 하도록 해주는 장치이다. 입출력센서를 100~2,000개 정도 제어할 수 있는 일반 상품이 나와 있기도 하다.
02 CNC는 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의 약어이며 컴퓨터수치제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