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강점이 곧 우리의 약점인 이유
▲ Editor 김상윤 수석연구원
포스코경영연구원
중앙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기술경영학 석·박사를 취득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기술경영, 제조업 혁신, R&D 성과평가/산학연 부문이며, 국가산업 융합지원센터 산업융합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정부 주도의 빠른 성장을 이룩한 우리 경제는 최근 위기에 직면하였다.
8대 주력 제조업의 경우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추격을 받고 있으며, 최근 4차 산업혁명이라는 선진국 주도의 ‘질서 재편’으로 인해 경쟁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향후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더이상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유효하지 않다. ‘지식’과 ‘기술’이 주도하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우리 제조업의 새로운 성장 모델은 무엇일까?
독일 프라운호퍼 연구소(Fraunhofer Institute)의 올리버 솜(Oliver Som) 박사는 2015년 「Low Tech Innovation」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은 산업 저변의 기반 기술(Low Technology) 역량에서 비롯됨을 언급하였다.
그가 말하는 기반 기술이란, 제품이나 기술군을 구성하는 요소 기술(Component Technology), 부분 기술(Part Technology)이면서도 기술 성숙도와 자립도가 높아 대체 불가능한 기술을 의미한다. 우리가 늘 강조하는 원천 기술과는 의미가 약간 다르다.
기반 기술은 세상에 없던(Brand New), 혹은 파괴적(Disruptive) 기술은 아니지만, 축적된 노하우와 지속적 개선을 통해 작은 영역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장인기술’이다.
독일은 자동차, 기계, 엔지니어링, 화학 등 그들의 강점 산업분야에서 장인 기술을 보유한 미텔슈탄트(Mittelstand)라 불리는 강소기업이 즐비하다.
중소기업의 역량이 곧 산업 전체의 기반 기술 역량이 된다. 이들의 작지만 독보적인 경쟁우위가 모여, 산업전체의 부가가치를 높인다.
지난해 한국의 산업·과학기술 분야를 대표하는 서울대 공과대학교 소속 교수 26명은 「축적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최근 한국 산업의 위기 원인을 ‘숙성된 경험과 축적된 기술역량의 부족, 그리고 이에 동반한 문화적 얕음’이라고 진단하였다.
앞서 독일의 솜 박사는 축적된 노하우와 기술혁신 역량의 ‘보유’를 독일의 강점으로, 서울대 26명의 교수들은 숙성된 경험과 축적 된 기술역량의 ‘부재’를 오히려, 한국의 약점으로 언급한 것이다.
최근 조선 산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력 산업에서 겪고 있는 문제는 바로 새로운 성장 동력의 부재에 있다. 이로 인해 최근 글로벌 시장 침체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
8대 주력 제조업의 경우, 반도체, 디스플레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산업에서 중국에 이미 세계 시장 점유율을 추월당하였고 기술력까지 위협받고 있다. 중국에 내어 준 시장만큼, 우리가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의 창출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성장동력의 창출은 지난 40년간의 고속 성장 경험과 이를 통해 축적된 기술·인적 역량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그리고 우리 주력 산업의 약점과 이로 인한 현재의 위기는 빠른 성장 경험에 뒤따르는 필연적인 ‘성장통’일까, 아니면 이제 더 이상 클 수 없다는 ‘성장 한계’의 시그널일까?
빠른 추격자 전략을 ‘빠르게(?)’ 버려야 할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성장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더 이상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유효하지 않는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국가 주도와 대기업 중심의 자원집중은 규모와 자본, 양질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효율성 극대화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으나, 최근의 변화된 새로운 패러다임 하에서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자원의 집중을 통해 선도자의 역량을 빠르게 습득하고, 효율을 끌어올리는 전략은 자동차나 반도체로 대표되는 기술집약적 조립 산업과 조선, 철강 등 노동집약적 대형 장치 산업에 유리했다.
이와 더불어 제조업의 생산 기반이 한참 아시아로 넘어오던 시대적 흐름과 맞아떨어져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30여 년 만에 이들 산업에서 글로벌 최고수준에 올라섰다. 현재 우리나라 주력 산업으로서의 제조업은 GDP 비중 31%, 고용의 16.9%를 책임지고 있으며, 지역의 발전 역시 제조업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수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거래 및 협력 문화가 왜곡되었으며, 혁신잠재력이 큰 중소·벤처 기업의 생존율이 낮아졌다.
이는 지식과 아이디어의 다양성과 융복합, 생태계 기반의 혁신 플랫폼, 새로운 돌파형 기술(Breakthrough Technology) 비즈니스 등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불리한 환경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어떠한 새로운 성장 모델이 필요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새로운 성장모델을 위한 3단계 접근법
최근 4차 산업혁명으로의 변화와 그 적응 및 대응 전략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으며 그 의견은 조금씩 다르다.
새로운 화두에 대한 맹목적 기대로 인해 그 관심이 너무 과열되어 오히려, 성급한 대안과 청사진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성장모델을 설정하기에 앞서 아래의 세 가지 단계를 점검해야 한다.
첫째, 과거의 눈부신 성장의 산물 중에 아직도 경쟁력이 있는 부분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더라도 지속적으로 통하는 무엇인가는 있다. 앞선 독일의 사례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3D 프린팅의 핵심기술인 ‘압출 적층(Fused Deposition Modeling) 기술’은 지난 1970년대 개발된 기술로서, 얼마 전 특허가 만료되어 최근의 3D 프린팅 보급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 제조업의 성장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와 기술역량의 가치를 현시점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일부 지속가능 경쟁력을 보유한 영역을 어떻게 잘 보전하고, 활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4차 산업혁명을 주창한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또한, 그들 내부적으로 ‘우리가 강점을 가지고 있는 제조, 엔지니어링 산업을 어떻게 지속가능한 형태로 업그레이드할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기존의 것들 중에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을 정확히 짚어내야 한다. 버리지 못하면 도리어 장벽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상 과제였던 효율성 추구를 위한 자원 배분과 관리 방식, 이로 인한 수직적 문화가 버려야할 요소의 대표적인 예이다.
수직적 문화는 외부와의 열린 협력(Open Collaboration)은 고사하고, 한 기업 내, 또는 한 부처 내의 조직 간 협업조차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게 한다.
어떻게 보면, 효율을 위한 비효율의 추구다. 또한, 국가산업적으로는 70년대부터 이어온 전통적인 산업분류체계 기반의 테두리를 걷어내야 한다.
2000년대 이후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이슈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이제는 국가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제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짐으로써 실제 산업 현장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반해 국가 정책으로의 수용은 매우 더딘 상황이다.
예를 들어, 현재 스마트카·커넥티드카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은 IT 기업들이며, 그 핵심 기술들도 기존 자동차 산업 영역에서 IT 영역으로 많은 부분이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 전통적 관점의 자동차 제조 산업에서 이를 다루어서는 안된다. 이미 선진국들은 최근의 융복합 산업·기술 환경을 국가 과학기술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미국은 산·학·연·관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어젠다별 연구팀 및 브레인스토밍 협의체를 태스크포스(Task Force Team)나 가상 조직(Virtual Organization) 등의 형태로 상무부 산하에 두고 활동을 장려하고 있다.
이들의 어젠다는 주로 기존 산업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융복합 영역 또는 새롭게 부각되는 중요 산업 기술 영역이다. 임시 조직에서 축적된 아이디어는 정부의 정식 분과 구성이나 국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다.
셋째, 향후 우리의 강점 산업과 핵심 역량은 무엇이 될 것인지 Big Picture의 설계가 필요하며, 이에 따라 반드시 획득해야 할 새로운 역량을 강구해야 한다.
특히, 이 과정에는 긴 호흡과, 긴 안목, 그리고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흔히 추진 방안으로 제시되는 컨트롤 타워나 협의체 구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조직이나 산업에 국한하지 않고 미래 50년, 100년을 바라보는 국가 산업의 Big Picture 제시가 필요하고, 이에 따른 필요 역량이 정의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대부분의 해답은 변화하고 있는 글로벌 산업 환경 아래에서의 제조업 주도가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토지, 노동, 자본’이라는 생산의 3대 요소가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
실물이 없는 온라인, 사이버 세상에서의 기업과 비즈니스가 확대되고,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업무를 대체하여 인류 발전의 싱귤래리티(Singularity, 특이점)가 기대되는 시점에서, ‘지식’과 ‘기술’이 새로운 주도가치로 부상했다.
지식과 기술로 인한 변화는 대부분 무형적(Intangible), 체증적(Increasing), 파괴적(Disruptive)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속도와 폭을 가늠하기 힘들다. ‘지식’과 ‘기술’의 공유, 거래, 확산, 축적이 모든산업 영역의 핵심 활동이 될 것이다.
새로운 성장모델을 기대하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주력 산업은 중국의 원가 경쟁력과 일본의 기술력 사이에 낀, ‘넛 크래커(Nut Craker)’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라 주요 선진국과도 경쟁해야 한다.
향후 글로벌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의 변화 속에, 주요 선진국의 제조업 부흥을 통한 ‘주도권 쟁탈’과, 현 제조업 강국인 한국, 중국, 일본 등의 ‘주도권 고수’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제조업의 위치는 지난 30년간 쌓아온 ‘선택과 집중’의 열매일 뿐,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는 우려가 있다. 향후, 다자 간 경쟁 체제에 대응하기 위한 새롭고 차별화된 경쟁력과 대응전략이 필요하다.
세상은 이미 4차 산업혁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도태되느냐, 살아남느냐는 변화에 대한 빠른 적응과 새로운 경쟁력 확보에 달려 있다.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는 지금, 우리에겐 그 어떠한 롤모델(Role Model)도, 매뉴얼도 없다.
남극의 어린 펭귄 무리가 더 크기 위해 어미의 품을 벗어나 미지의 바다로 향할 때, 과감히 먼저 뛰어드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을 뒤따른다는 일화에서 보듯이, 우리에게도 새로운 변화를 향한 과감성과 적극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가 정책이든 기업 경영이든, 지금까지의 성공 방정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것을 과감히 버리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는 새로운 시각과 그에 맞는 새로운 성장모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