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철강 산업 경쟁과 협력을 위한
경계의 재정의가 필요하다
▲ 이은창 수석연구원 포스코경영연구원
우리나라 조선·철강 산업의 근본적인 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진정한 협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조선·철강·해운의 혁신 네트워크를 통해 경쟁과 협력의 경계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R&D 투자와 선박펀드를 활용하여 조선·철강사는 스마트 선박기술이나 친환경 기술을 접목한 선박을 개발·건조하고, 해운사가 운영하여 실질적인 효과를 검증한다면 세계적인 기술표준을 주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기적의 산업에서 우려의 산업으로
현대적인 우리나라 조선 산업은 197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000년대부터는 명실공히 세계 1위가 됐다.
또한 1972년 초대형 조선소 운영지원을 위해 포스코는 후판(두께 6mm 이상의 두꺼운 철판) 공장을 먼저 완공했을 정도로, 우리나라 철강 산업은 조선산업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해왔다.
우리나라 조선 및 조선기자재 산업에서 소비하는 후판량이 국내 후판 시장의 약 70%로 추정될 만큼 두 산업의 관계는 밀접하다.
조선 산업과 마찬가지로 철강 산업도 경이로운 성장을 했다. 1973년 백만 톤을 돌파한 우리나라 철강생산량은 2015년에 7천만 톤 규모로 성장했다.
2016년 선박 수출액은 343.2억 달러, 철강 제품 수출액은 285.5억 달러를 기록했다. 조선·철강 산업은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2.7%를 차지하는 중요한 산업이 됐다.
하지만 두 산업 모두 글로벌 공급과잉, 수요산업 침체와 같은 수식어와 함께 취약업종으로서 구조조정 대상으로 기사에 단골로 등장한다. 조선 산업은 2008년 이후 크게 위축됐다.
11개 중소 조선사가 문을 닫았고, 대형 조선사와 일부 중소 조선사만이 운영되고 있다. 대형조선 3사는 2015년에만 6.4조의 엄청난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이는 해양플랜트로 외형성장을 꾀하려했던 전략이 유가 급락과 부족한 역량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2007년 66백만 GT(Gross Tonnage)였던 우리나라 조선 수주는 2016년에 3.5백만 GT에 그쳤다.
철강 산업도 매출액 감소와 수익성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6년에는 공급과잉의 주범인 중국의 구조조정으로 시황이 약간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지속적인 공급과잉, 보호무역의 확대, 수요산업 불황으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조선·철강 산업 경쟁력은 세계 최고
두 산업 모두 경쟁력이 없어서 위기를 겪는 것은 아니다. 철강 산업의 대표주자인 포스코는 2010년 이후 7년 연속 WSD(World Steel Dynamics)가 뽑은 최고의 철강사로 선정됐다.
우리나라는 철강을 대량 소비하는 산업이 많아, 철강 산업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즉,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자동차, 조선, 건설, 기계 산업과 함께 성장하면서 철강의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철강 산업 경쟁력의 핵심은 일반적으로 규모의 경제를 통한 원가절감 능력이다. 포스코는 단일 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고, 현대제철 또한 세계적 규모의 제철소이다.
철강에서는 가장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알려진 자동차용 강재를 두 철강사 모두가 생산, 판매할 정도로 질적 경쟁력도 충분하다.
일본계 자동차 업체들 또한 포스코의 자동차 강판 구매 비중을 꾸준히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우리나라 철강사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1, 2, 3위 규모의 조선사는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 육상건조, 메가블록 등의 세계적인 혁신기술을 수도 없이 개발했으며 선박의 품질 또한 뛰어나다.
Nordic Association of Marine Insurers가 2016년 발표한 자료를 토대로 2007년에서 2015년 사이에 건조된 선박의 보험 청구 건수를 분석했다.
선박의 품질과 관련된 기계적 결함을 이유로 청구된 보험의 비율은 국내에서 제작된 선박이 3~6%, 일본이 1~4%인 반면 중국은 12~16%였다.
우리나라 조선소가 상대적으로 대형·고부가가치 선박을 많이 건조한 것을 고려한다면, 품질 수준은 일본과 대등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 자국 수요나 유리한 선박금융으로 많은 수주와 건조를 하지만, 품질 수준에서는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 철강·조선 기업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혁신 능력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위기에 놓인 대상과 그 원인이 다를 뿐이다.
포스코, 현대제철과 같이 일관제철소(제선, 제강, 압연의 세공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나 특수한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제철소는 규모 및 수익성 면에서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
이에 포함되지 않는 철강기업이 구조조정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주로 전방 산업이 극심한 불황을 보이고 있는 후판, 강관 제품이나, 중국산 저가 제품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봉형강 제품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들이다.01
반면, 조선 산업은 전방 산업의 극심한 불황과 전략 실패로 인해 전체적인 위기 상황이다. 이런 현상은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대형 철강사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반면, 주요 조선사는 대부분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조선·철강 산업의 어려움은 원인이 다르므로 해결도 달라야
조선·철강 산업은 전후방 산업으로 함께 어려움에 겪고 있지만, 위기의 원인이 다르므로 동일한 관점에서 심각한 구조조정 대상 산업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철강 산업은 하공정 업체의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반면에, 조선은 모든 업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기적인 경쟁력도 고려해야 한다. 조선 불황으로 심각한 공급과잉이 예상되는 우리나라 후판 시장은 2016년에 9백만 톤 규모인데, 이중 수입이 260만 톤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 불황으로 수백만 톤의 시장이 줄어들기 때문에 후판 시장의 구조조정이 필요하지만, 대규모 수입 물량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
조선 산업이 어렵기 때문에 중국산 저가 후판 수요가 꾸준할 수밖에 없다고 확단하고 후판 공장을 없애버린다면, 추후 조선 시장이 회복될 때 후판은 수입품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세계적인 후판 기술을 보유한 철강사가 후판 사업을 크게 축소한다면 조선·철강 산업의 선순환 구조가 깨지고, 서로 간의 시너지는 사라질 것이다.
근본적인 위기 돌파를 위해서는 진정한 협력이 필요
산업 간 협력이 얼마나 큰 시너지를 내는지는 조선·철강의 사례로부터 알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로 철강가격이 폭락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철강사는 원가경쟁력을 바탕으로 일본이나 중국보다 더 저렴한 양질의 후판을 공급함으로써 우리나라 조선 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최근에는 포스코가 100mm 두께의 EH40 취성균열정지특성 인성보증 강재를 세계 최초로 인증, 생산, 공급함으로써 대우조선해양이 2만 TEU급 컨테이너선을 건조하는 등 우리나라 조선사가 초대형 컨테이너선 시장을 주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듯 근본적인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기업 및 산업 간 적절한 경쟁과 협력이 필요하다.
개별 산업은 기업 간 경쟁을 통해 세계적인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기업이나 산업 간 협력 사례는 많지 않다.
해양플랜트에서 조선사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극심한 내부 경쟁으로 인한 저가수주였다. 세계적인 조선사가 즐비한 우리나라지만 해운사의 경쟁력은 점차 약해지고 있다.
따라서 내부 경쟁을 줄이고 조선·철강·해운 산업의 시너지를 내야 한다는 주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원자재 수입과 완성품 수출을 많이 하는 국가로 컨테이너 처리량에서 세계 6위 항만인 부산항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조선·철강처럼 세계 1위는 아니지만 높은 수준의 해운사와 화주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협력이 부족하여, 여전히 산업 간 시너지를 내자는 말만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협력을 위해 경계의 재정의 필요
해외에서는 전통 산업에 있어 벤처기업으로부터 혁신을 가져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네덜란드의 델프트 공대(Delft University of Technology)와 로테르담 항만(Rotterdam Port)은 Port Innovation Lab을 도입하여, 항만과 해운 산업에서 혁신 아이디어를 보유한 스타트업 기업을 발굴·지원하여 물류혁신을 꾀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Green Ship of the Future라는 파트너십을 통해 다양한 조선·해운기술을 실증하거나 개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주력 산업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조선·철강·해운·화주·항만의 혁신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또한 관련 창업 기회를 확대하여 구조조정에서 희생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보호 및 활용하여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우리나라 조선 산업에서 경쟁력을 잃었다는 벌크선을 저부가가치 선박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새로운 기술이 접목된다면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변할 수 있다.
스마트 선박, 에너지 절감, 선적·양하 효율성 향상을 위한 기술을 개발·적용하고, 항만시스템 및 해운 관리의 효율적 연계로 해양물류혁신을 꾀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벌크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해운사가 운용하는 대부분의 선박은 대형 조선사가 생산하는 고부가가치선이 아니다. 중소 벌크선이나 탱크선이 주를 이룬다.
1970년대나 1980년대 불황기에 특화된 벌크선이나 탱크선으로 조선 산업을 유지해온 일본의 사례를 배울 필요가 있다.
혁신적인 벌크선이나 탱크선을 개발하고 만든다면, 우리나라 철강, 조선, 해운, 화주, 항만 모두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허물고 있으며, 디지털 기술은 전통 산업 혁신의 핵심이 되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이제 모빌리티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고, 자동차사와 서비스사가 협력과 경쟁을 통해 기술을 표준화하여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
우리나라 조선·철강 산업의 근본적인 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전·후방 산업도 고려하여 경쟁과 협력의 경계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기술이 조선, 철강, 해운, 항만 산업에 적용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어떤 기술이 주도할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두 합심하여 실현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고 검증해야 한다. 이를 위해 조선·철강·해운 산업 활성화를 위한 R&D와 선박 펀드의 활용이 중요하다.
조선사는 스마트 선박 기술이나 친환경 기술을 접목한 선박을 개발·건조하고, 해운사가 운영하여 실질적인 효과를 검증한다면 세계적인 기술표준을 주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화주와 해운사의 경쟁력도 자연스럽게 향상될 것이다.
개별 기업의 규모가 거대하여 정부 주도로 산업을 재편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이 맞는다면 정부는 협력과 경쟁을 위한 경계를 구분하고 진정한 시너지 창출을 위한 구조를 만들어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01 이진우(2016), “철강산업 동향과 철강업계의 대응 방안”, 산업입지 Vol.64, 한국산업단지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