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전기전자 산업 융합을 기회로 삼아
위기의 삼각 파도를 넘어···
▲ 이주완 연구위원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산업 간의 융합이 발생할 때마다 ICT 산업은 융합제로 작용하기 때문에 과거 개별 산업으로 존재할 때보다 훨씬 다양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가 열리게 된다.
IT 산업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산업융합을 통해 1차원적인 Supply Chain에서 벗어나 3차원적인 Supply Cube의 비즈니스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일부 산업이 불황을 겪고 있는 이면에는 단순히 해당 산업의 경기가 둔화된 것 외에 국가 포트폴리오 불균형이라는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한국 경제의 근대화 과정을 보면 정부가 주도하고 일부 대기업이 호응하여 단기간에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로 등장한 경우가 많다. 이때 산업을 선정하는 기준은 고용 및 인프라 구축 효과가 크고 자본과 인력이 성공의 핵심요소인 경우이다.
최근까지는 이러한 전략이 유효해 중후 장대한 굴뚝산업과 IT 산업 중 일부 영역에서 글로벌 시장의 선두지위를 누려왔다.
예를 들면 철강, 조선, 반도체, 디스플레이, 가전제품 등이 그렇다. 그 과정에서 산업 전체의 균형이 무너졌으며 특정 섹터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어 일부 산업에 불황이 오게 되면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는 구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조선, 철강 등 일부 산업의 경우 포트폴리오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경기 침체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01
조선의 경우 글로벌 수출 포트폴리오는 3~4% 수준인데 한국은 7~12%를 유지해 왔다. 철강 역시 지난 25년 동안 글로벌 포트폴리오에 비해 한국이 2~3배 높았기 때문에 공급과잉이 발생하면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자부품과 자동차가 제2의 조선, 철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전자부품과 자동차 역시 글로벌 시장과의 포트폴리오 갭이 큰 산업들인데 현재는 성장성이 높아 심각한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시장이 둔화되는 순간 급격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제적인 구조조정과 비중 축소노력이 필요하다.
전자부품의 경우 일부 섹터는 이미 장기 불황의 터널에 진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을 진앙으로 하는 공급과잉으로 인해 LCD, LED, 휴대폰, 이차전지 등은 이미 레드오션으로 변했고 반도체, OLED 등도 몇년 안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IT 산업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수요시장이 존재한다. 그동안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해 왔다. 그리고 그 품목의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들이 TV, PC, 휴대폰 등 전기·전자 제품들이다.
중국이 이러한 제품들을 생산할 때 한국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핵심 부품을 중국에 수출해 글로벌 선두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009년 중국 정부가 LCD를 필두로 전자부품 국산화를 선언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중국 기업들이 IT산업에 진출하면서 중국이 수요자에서 경쟁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가장 먼저 국산화가 진행된 LCD의 경우 중소형 시장에서 중국의 점유율은 이미 30%를 넘어섰고 대형 시장에서도 20%에 근접하고 있다.
동일한 상황이 LED, 이차전지 등에서도 발생했는데 중국이 본격적으로 진출한 분야에서는 예외 없이 장기 불황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다음 타깃으로 OLED와 반도체를 선정했는데 특히 반도체의 경우 중국의 연간 무역적자가 1,500억 달러에 달하기 때문에 국산화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들 산업이 공급과잉에 따른 불황에 직면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한국 IT 산업이 직면한 위협은 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올해 초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트럼프는 공공연히 반(反) 시장 정책을 펴고 있는데 반덤핑, 관세 등 무역장벽을 쌓는 것은 물론, 노골적으로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와 공장 이전을 종용하고 있다.
결국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미국 시장을 잃지 않기 위해 인건비가 비싼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 하며 한국의 IT 기업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최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중국산 가정용 세탁기에 대해 각각 52.5%와 32.1%의 반덤핑관세를 부과했다.
이러한 조치는 조만간 TV, 휴대폰, 에어컨, 세탁기 등 다른 가전제품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으며 중국뿐만 아니라 동유럽, 동남아시아, 중남미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IT 산업은 구조적인 포트폴리오 불균형에 따른 잠재적 리스크 요인에 더해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중국, 그리고 높은 무역 장벽으로 압박해오는 미국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삼각 파도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없을 것인가?
영어의 접두사 Trans(트랜스)의 사전적인 의미는 ‘~를 넘어서, 저쪽으로’라는 뜻인데 이것은 지형학적인 경계를 넘는다는 의미 외에 영역, 분야, 범주를 넘어선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IoT로 촉발된 4차 산업혁명(Industry 4.0),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융합, 이공계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통합형 인재 등 최근 이슈가 되는 시대 흐름은 결국 경계를 넘어서는 것에서 출발한다.
Industry 4.0 시대에는 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심지어는 생산과 서비스가 결합되기도 한다. Industry 4.0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 산업 간, 업태간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자의든, 타의든 생존을 위해 트랜스를 경험하게 된다.
산업과 경제 분야에서 진행되는 트랜스 즉, 경계가 파괴 내지는 변경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트랜스 인더스트리02(Trans Industry)라 칭한다.
기존 사업과의 연관성, 보유 인프라 활용 정도 등에 따라 트랜스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A 유형은 기존의 코어(Core: 핵심) 비즈니스와 연관성이 높은 즉, 유관 분야로 진출하는 경우이다.
B 유형은 코어 비즈니스를 계속 유지하면서 코어 비즈니스와의 연관성이 높지 않은 이종 비즈니스로 진출하는 경우이다.
C 유형은 산업 간의 융합을 의미하는데, 코어 비즈니스와 이종 비즈니스를 결합하여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것을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D 유형은 경쟁력 상실, 시장쇠퇴, 타깃 전환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 코어 비즈니스에서 철수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로 옮겨가는 것이다(그림 1).
네 가지 유형 가운데 IT 기업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세 번째 유형인 융합이다. 융합(融合)은 녹아서 합쳐지는 것이다.
즉, 기존의 형태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됨을 뜻한다. 옥스퍼드 영영사전은 융합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담고 있는데 서로 다른 방향들로부터 공통된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감(Moving Together from Different Directions)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업 간의 융합이란 이종 비즈니스를 녹여 내어 하나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던 비즈니스들로부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포함한다.
융합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비즈니스 변형 혹은 확장의 한 형태이지만 과거에는 결합의 형태가 단순하고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과거에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지 못했던 이종 산업 간의 융합 모델이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기존의 전통적인 사업자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근래에 산업 간의 융합이 활발해진 배경을 살펴보면 과거에 개념으로만 존재했던 형태의 비즈니스를 현실화 시켜주는 정보통신(ICT) 관련 기술의 진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ICT는 하나의 독립된 산업이라기 보다는 모든 산업에 필수적인 인프라의 성격이 크고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산업 간의 결합을 가능케 해주는 첨가제 혹은 촉매 역할을 한다.
따라서 ICT는 융합이라는 단어와 첨가제라는 단어가 합성된 ‘융합제’(Convergitive: Convergence+Additive)03 혹은 ‘융합 인프라’라는 새로운 용어로 정의할 수 있다.
전통적 산업분류인 1차, 2차, 3차 산업 및 이들간의 상호 결합으로는 현대적 산업 융합의 흐름을 설명하기 어렵고 제조업, 서비스업, 1차 산업, 주거/인프라 등 네 개 영역이 각각 ICT와 결합하는 구조로 설명이 가능하다.
즉, 네 개의 섬(영역)이 하나의 인공섬(ICT)을 허브로 삼아 다리로 연결되는 Island Model04인 것이다. 이때 ICT는 융합인프라 혹은 융합제의 역할을 수행한다(그림 2).
섬으로 표현된 네 개의 영역이 각각 ICT와 결합해 이루어지는 융합,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ICT라는 융합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융합 및 제조업과 서비스업 내의 내부 융합 등 산업 융합에는 총 7개 유형이 존재한다.
즉, 5개의 큰 융합(대교: 大橋)과 2개의 작은 융합(내륙교: 內陸橋)으로 이루어진다.
개별 산업들이 결합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것을 1차 융합이라고 하며 융합의 산물로 탄생한 비즈니스가 또다시 이종 비즈니스와 결합하면 2차 융합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현재까지 완성된 대부분의 비즈니스 융합은 1차 융합이지만 점차 이종 비즈니스 간의 결합이 활발해지게 되면 2차, 3차 융합이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산업 융합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비즈니스 생태계는 기존의 1차원적인 Supply Chain에서 2차원인 Supply Plane을 거쳐 3차원인 Supply Cube로 발전하게 된다(그림 3).
이렇듯 산업 간의 융합이 발생할 때마다 ICT 산업은 융합제로 작용하기 때문에 과거 개별 산업으로 존재할 때보다 훨씬 다양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가 열리게 된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전기·전자 산업이 개별 산업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한 중국의 추월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도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과 미국을 추월한 바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통상압력을 피할 길도 없다.
그러나 ICT 산업이 융합의 인프라 역할을 하고 융합제로서 모든 비즈니스 영역에 참여하게 된다면 더이상 개별 산업 혹은 독립된 제품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국의 통상 공세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중국이 쉽게 모방할 수도 없다. 또한, 국가 전체의 산업 포트폴리오 불균형 문제도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IT 산업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산업 융합을 통해 1차원적인 Supply Chain에서 벗어나 3차원적인 Supply Cube의 비즈니스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존 산업의 틀을 허물고 앞서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한국의 IT 기업들은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01 이주완, 글로벌 산업 지형 변화와 중장기 포트폴리오, 하나금융경영연구소(2016)
02 이주완, 트랜스 인더스트리 시대와 경영 혁신, 하나금융경영연구소(2016)
03 이주완, 산업 융합의 유형과 비즈니스 생태계의 변화, 하나금융경영연구소(2016)
04 이주완, 산업 융합의 유형과 비즈니스 생태계의 변화, 하나금융경영연구소(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