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인사이트 - 혁신, 깜짝 놀랄 기술보다 ‘디테일과 연결’을 통한 통찰에서 나온다
혁신 인사이트에서는 혁신의 트렌드, 전략 및 혁신사례를 살펴봅니다.
▲ 고승연 기자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경영지식팀
미국 오하이오주에는 정글짐인터내셔널마켓이라는 큰 마트가 하나 있다. 그들은 스스로 ‘쇼퍼테인먼트’ 사업을 한다고 말한다.
즉, 쇼핑하는 고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종의 ‘고객 엔터테인먼트 회사’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 실제 정글처럼 꾸며져 있는 매우 흥미로운 매장이다.
쇼핑을 가면 눈과 귀가 즐겁다. 다채로운 이벤트가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마켓이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미국 최고의 화장실’이라는 평가를 받고 실제로 수상도 했다.
고객들은 ‘화장실을 구경하기 위해서’ 이 마켓을 찾는다. 모두가 ‘혁신’이라고 하면 엄청난 첨단 기술을 떠올리고 무엇인가 새롭고 대단한 것을 꼭 시도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진짜 혁신이란 바로 이런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2016년 12월 국내 최고 비즈니스 전문 포럼인 동아비즈니스포럼 2016에 참가한 세계적 경영석학 톰피터스 박사가 소개한 사례다.
피터스 박사가 제시하는 또 다른 혁신 사례를 보자. 영국의 작은 은행인 메트로 뱅크의 사례 역시 정글짐인터내셔널마켓 사례와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 은행은 일단 근무시간을 조금 변경하는 것에서부터 혁신을 시작했다.
아침 7시 30분부터 문을 열고 금요일은 밤 12시까지 운영한다. 근무시간의 변화가 이 은행 성공의 본질은 아니었다. 전혀 엉뚱한 사고의 연결 속에서 혁신이 탄생했다.
바로 강아지한테 주는 간식 ‘개 비스킷’이다. 아침 7시 30분, 출근 전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은 은행 업무도 보고 개한테 비스킷도 먹일 겸 이 은행에 들른다. ‘개 친화적 은행’이라고 불리는 이 기업은 지금까지 200만 개의 비스킷을 강아지들에게 제공했다.
‘개를 데리고 아침에 산책에 나서는 사람들의 니즈’를 정확하게 짚었고, 결국 상장까지 했다. 피터스 박사는 “강아지 비스킷과 금융업의 연결고리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라며 “이런 게 진짜 혁신적인 사고방식이고 창조적인 파괴”라고 말했다.
모바일 기기의 활성화, ATM의 보급으로 은행의 오프라인 영업점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새로운 기술’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 지점의 부활을 통해 ‘집객’을 하고 이 ‘집객’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잡았다는 것이다.
사소한 의문에서 출발해 고객의 니즈를 해결하는 것이 혁신
‘혁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 깜짝 놀랄 만한 기술의 등장과 ‘아이폰 혁명’이나 ‘구글 혁신’으로 상징되는 엄청난 변화를 상상하지만 실제 시장에서 성공하는 대부분의 혁신은 앞서 피터스 박사가 제시한 것처럼 ‘디테일’에 대한 관심과 ‘창의적 연결’을 통해 이뤄진다.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콘덴싱 기술’을 개발해 우여곡절 끝에 시장 1위를 탈환하고 해외진출에도 성공한 보일러 업체 경동나비엔 사례를 집중탐구해 보고자 한다.
경동나비엔 역시 ‘놀라운 기술력’이 아닌 ‘탄탄한 기본기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는 능력, 사소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능력, 그리고 이를 창조적으로 연결하고 해결하는 역량을 더해 세계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국내 시장에서의 1위 자리가 탄탄해질 무렵인 2007~2008년, 경동나비엔은 해외 시장 진출에 나섰다.
연간 1,000만 대규모의 ‘온수기’ 시장이 형성돼 있는 미국과 현재는 100만 대 수준의 시장이지만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러시아 보일러 시장에 뛰어들었다.
2008년 초 러시아로 건너간 경동나비엔은 보일러/온수기 박람회에 참가한다. 연 매출 2조 원 이상의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장악하고 있던 시장이라 부담감과 두려움도 컸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날 경동나비엔 사람들은 러시아 바이어들로부터 ‘이상한 불만’을 듣게 된다.
경동 임직원들이 명함을 돌리며 “콘덴싱 기술을 비롯해 훌륭한 기술력을 가진 한국의 보일러 업체에서 나왔다”고 소개를 하자 러시아 바이어들이 “여긴 독일제를 주로 쓰는데 고장이 너무 잘난다. 당신 회사물건이 고장이 잘 안 나는 물건이라면 살 의향이 있다”는 답변이 돌아온 것.
정밀과학과 기계기술의 결합체인 첨단 보일러를 독일의 글로벌 회사가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 고장이 잘 난다는 등의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주로 물을 가열하고 일정 정도 가열이 끝나면 멈춰주도록 하는 ‘컨트롤러’가 작동을 자주 멈춘다는 불만이었는데, 경동 직원들은 일단 그 ‘고장’난 컨트롤러를 들고 한국으로 돌아와 문제점 파악에 나섰다.
기계에는 이상이 없었고 오히려 아주 뛰어난 품질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독일제 컨트롤러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었을까. 전혀 엉뚱한 곳에서 답이 나왔다.
전기 공급 인프라가 취약한 러시아에서는 전기 사용량이 폭증하면 전압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독일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보일러 컨트롤러는 ‘저전압 현상’이 나타나면 보일러 오작동이나 전자기기 이상을 예방하기 위해 자동 차단되는 안전장치가 있었다.
그래서 작동이 멈췄고 엔지니어가 와서 컨트롤러를 바꿔주는 등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우수 엔지니어 부족으로 문제의 원인을 잘 짚어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경동나비엔은 보일러가 가동될 수 있는 전압의 한계선을 찾은 뒤에 안전상 문제가 없는 최저선을 다시 찾고 전압이 낮아지더라도 계속 보일러를 돌릴 수 있도록 ‘러시아에 적합한 컨트롤러’를 개발했다.
그리고 놀라운 성공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다. 경동나비엔은 러시아 진출 5년도 채 되지 않은 2012년, 러시아 가정용 벽걸이 보일러 시장에서 글로벌 강자들을 제치고 점유율 1위에 올랐다.
‘다른 관점’으로 차별화된 전략을
만들어내는 것이 혁신
경동나비엔은 온수기 1,000만 대 규모 시장인 북미지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진출을 위해 시장조사에 나선 경동나비엔은 미국의 온수기 시장이 ‘저탕식 온수기’, 즉 물을 천천히 덥혀서 물탱크에 저장한 뒤 사용하고 다시 채워 넣는 방식의 온수기가 주류인 시장이라는 점을 파악했다.
경동나비엔처럼 순간적으로 물을 가열하는 ‘순간온수기’ 시장에는 일본의 린나이, 노리쯔 등 쟁쟁한 회사들이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틈새시장 자체는 생각보다 작았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수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일본의 글로벌 강자들이 북미에서는 수백억 원의 매출도 못 올리며 1,000만 대 온수기 시장에서 겨우 연 30만 대 정도를 판매하고 있었다.
역시나 뭔가 이상했다. 잘 안 팔리는 이유를 알아보니 ‘잦은 고장’이었다.
‘기술 강국의 일본 업체들이 고장이 잘 나는 제품을 만들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연구에 돌입했다. 역시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미국의 도시가스 배관은 50~60년 전에 구축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100년 전에 깔린 배관도 있었다. 미국에 처음 도시가스 배관이 깔리던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가스 수요를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의 굵기를 가늘게 만들었는데 이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많은 양의 가스를 끌어와 빠르게 가열해야 하는 순간온수기 방식에는 맞지 않는 배관 굵기였다.
일본제 최첨단 순간온수기 역시 순간 가열에 필요한 가스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가스 공급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작동을 멈춰버렸다.
순간온수기는 물을 덥혀 저장하는 방식도 아니기 때문에 몸을 씻는 도중 갑자기 냉수가 나오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소비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단지 ‘저전압 현상’에도 문제없이 계속 보일러를 가동하도록 만들면 됐던 러시아와 달리 이번엔 경동나비엔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가스 공급량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각 주택 인근에 깔린 가스 배관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술개발에 들어간 경동나비엔은 2012년 가스관으로부터 순식간에 가스를 빨아들여 안정적으로 순간 가열을 할 수 있는 온수기를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프리미엄 순간온수기 시장이 열렸다. 일본제 순간온수기보다 20% 이상 비싸서 ‘온수기의 캐딜락’이라는 제품을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경동나비엔은 2012년 콘덴싱 순간온수기 시장에서 1위가 됐다. 2013년 미국 전체 순간온수기 분야에서는 2위에 올랐고 2년 뒤에는 시장 1위를 달성했다.
고객 중심 사고를 통해 혁신의 교과서를 쓴 경동나비엔
경동나비엔이 러시아 보일러 시장과 미국 온수기 시장에서 일궈낸 성공에는 분명 ‘기술개발’을 통한 ‘혁신’의 요소가 존재한다.
그런데 엄청난 첨단 기술을 자랑하듯 만들어 낸, 혁신을 위한 혁신은 아니었다. 오로지 고객의 관점에서 디테일을 살피고 상황을 연구하고 사소한 부분들을 잘 연결해서, 정확하게 고객의 니즈를 파악했기에 이룬 성공이었다.
많은 기업들이 놓치고 있는 혁신의 본질, 즉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것이 아니라 고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에 너무도 충실했다는 얘기다.
사실 어느 기업이든 최근에는 크게 두 가지를 화두로 삼는다. 하나는 ‘고객의 소리를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신에 성공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너무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많은 기업들이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늘 고객의 소리를 듣겠다’고 하면서도 고객의 언어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이를 기반으로 제품 개선이나 혁신에 나서서 성공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나 미국에서나 유통업자와 설치 기술자들은 “보일러가 고장이 잘 난다”, “온수기가 갑자기 고장 나서 냉수가 나온다”고 표현했지만 자세하고 친절하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해 알려주지는 않았다.
당연히 사람들이 말하는 표현의 이면에는 또 다른 진실, 즉 러시아의 경우 들쭉날쭉한 전압 문제가, 북미지역에서는 순간온수기에 맞지 않는 가는 배관의 문제가 숨어 있었다.
만약 러시아에서 ‘고장’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해 ‘엄청난 기술 혁신’을 통해 ‘고장 잘 나는 독일제를 이길 최첨단 보일러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면 성공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일제 온수기의 단점을 찾아 더 완벽한 제품,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기술개발에만 매진했다면 지금의 성공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고객의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고객들이 쓰는 언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찾으려 노력하고 연구를 하지 않았다면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경동나비엔은 큰 실패를 맛봤을 확률이 높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 ‘고장’이라는 단어에 합리적 의심을 품고 고객의 소리 이면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진짜 고객의 소리를 듣는 과정이며, 이를 기반으로 한 고객중심의 기술개발과 혁신이 진정한 혁신임을 일깨워준다.
※ 이 글은 필자가 DBR 147호(2014년 2월 2호)에 게재한 ‘DBR Case Study: 경동나비엔의 성장 및 글로벌 전략’과 DBR 216호(2017년 1월 1호)에 게재한 ‘Special Report: 톰 피터스 박사 기조강연 및 토론’을 기반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