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이노베이션의 가치혁신
▲ 윤종록 원장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이 글이 독자들에게 읽힐 때쯤이면 아마 미국에서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을 겁니다. 많은 국가에서는 미국의 새로운 리더십 출현에 따른 대응책에 부심하고 있겠지요.
트럼프는 사실 행복한 대통령입니다. 전임 대통령인 오바마의 풍요로운 자산을 바탕으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는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출범한 오바마는 10%대의 실업률이라는 참담한 유산을 안고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대책을 내놓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스타트업아메리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오바마가 제시한 스타트업아메리카는 스타트업을 육성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는 이 정책을 내놓은 뒤 인텔, IBM, HP, 페이스북 등과 같은 미국 대기업 CEO들을 초청해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우대하고 후한 가치를 지불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미국 대기업들은 창업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투자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실제로 자사에 노크한 스타트업을 높은 가격에 매입합니다. 그러자 전 세계 스타트업, 인재들이 미국에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원하는 가격보다 더 후하게 쳐주고 기꺼이 협력하는 대기업들이 몰려있는 곳에 안 갈 이유가 없겠죠. 스타트업아메리카는 단순히 창업지원을 넘어 열린 혁신인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정책이었습니다.
미국 대기업들은 스타트업의 아이디어와 사업모델을 수용하고 더욱 발전시켜 경제 위기에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내부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대신 열린 생태계를 조성함으로써 세계 젊은이들의 아이디어를 자사 발전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세계 인재들은 열린 생태계가 펼쳐진 미국에서 창업하고 인력을 채용했습니다. 실리콘밸리 창업자의 48%는 부모 중 한 명이 이민을 왔거나 외국에서 태어난 인재들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전통 산업에서 매달 18만 개의 일자리가 줄어든 반면 신산업에서 23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오바마는 임기 마지막 해인 2016년 완전 고용에 가까운 4%대의 실업률을 보였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심장부, 팔로알토에 ‘파크(PARC)’라는 세계적인 연구소를 만들었던 제록스는 PC, 마우스는 물론 데이터통신 표준(이더넷) 등 사실상 정보통신에 관한 거의 모든 기술을 개발한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울타리 안의 기술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 기술을 바탕으로 융합기술을 제시하고 혹은 새로운 사업을 하고자 했던 외부의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하여 지금은 겨우 복사기 회사로 연명해 가고 있습니다.
이를 일컬어 ‘NIH(Not Invented Here) 신드롬’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반면 애플, 구글, MS와 같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지향하는 회사들은 외부의 아이디어를 후하게 대접해 줍니다. 덕분에 세계의 반짝이는 상상력이 이 회사로 모입니다.
미국 회사뿐 아니라 중국의 샤오미는 고객 모두를 제품개발의 주인공으로 모시며 누구나 언제든지 아이디어를 토해낼 수 있도록 온라인 채널을 가동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예 울타리를 걷어내고 지구 전체를 연구소로 활용합니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미국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북유럽의 작은 국가 에스토니아를 아시나요?
이 나라의 영토는 남한의 절반, 전체 인구는 130만 명으로 서울 인구의 8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입니다. 불운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랫동안 덴마크, 독일, 스웨덴, 러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기도 했습니다.
1991년 구소련에서 독립할 때만 해도 인구나 면적, 천연자원 어느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에스토니아를 부르는 별명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발트해의 호랑이’, ‘정보기술 강국’, ‘북유럽의 실리콘밸리’, 최근에는 에스토니아를 영어 알파벳 e를 강조해 ‘이(e)스토니아’라고도 부릅니다. 이 나라는 지난 20년간 GDP를 열다섯 배나 늘렸습니다.
그 비결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중고 SW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등 소프트파워의 힘을 키우는 데 주력했기 때문입니다.
이 덕분에 인터넷 화상채팅으로 유명한 스카이프, 세계 최대 개인 간(P2P) 국제 송금업체인 트랜스퍼와이즈 등이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에스토니아는 내부 혁신에 집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최근 일종의 영주권과 비슷한 디지털 시민증인 ‘e 레지던스’ 카드를 만들어 전 세계 창업가들을 유인하고 있습니다.
e 레지던스 카드를 발급받은 사람은 투표권만 행사하지 못할 뿐 은행 개설, 창업 등 에스토니아에서 모든 경제활동이 가능합니다.
최근까지 에스토니아 디지털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은 총 135개국 1만 4,000명에 달하고 이들이 세운 기업은 1,000곳에 이릅니다.
해외에도 활짝 열린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습니다. 온라인 에스토니아 국민을 1,000만 명까지 늘리겠다는 그들의 목표가 기발하기도 하면서 부럽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아직 많이 미흡합니다. 외국인의 국내 취업, 창업 비자는 여전히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장시간의 비자 심사, 발급 기간으로 인해 유연한 인력 활용이 어렵습니다.
단적인 예로 대학중퇴 학력의 스티브 잡스는 우리나라에서 취업이나 창업을 꿈꾸지도 못합니다.
외국인이 국내 IT 회사에 취직하려면 국내에서 전문대를 졸업하거나, 해외에서 학사 이상의 졸업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창업비자를 받으려면 학사 이상의 학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업들도 여전히 자체적으로 대부분의 일을 해결하려 합니다. 스타트업과 협력기업들의 아이디어나 기술을 우대하기보다는 호혜를 베풀고 있다는 의식이 더 지배적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간단한 상상을 거대한 혁신으로 바꾸는 자가 주인공입니다.
우리의 연구소나 기업들도 모두 문을 활짝 열고 전 세계에서 모인 상상력의 대가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정부도 세계 인재들이, 스타트업들이 국내에 도전할 수 있는 제도, 문화를 갖춰야 합니다.
트럼프 시대가 열렸습니다. 미국 내 일자리 보호를 위해 관세 장벽을 높이고 이민도 제한하려 합니다. 미국시장을 겨냥해 멕시코 등에 공장을 지으려던 기업들은 부랴부랴 미국 공장부지를 찾고 있습니다.
해외 인재들이 넘치던 실리콘 밸리는 이민제한 방침으로 울상입니다. 그럼에도 오픈 이노베이션은 계속 확대될 것입니다. 세계는 IoT(사물인터넷) 등으로 더욱 촘촘히 연결된 디지털 지구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고 몽골, 영국이 대 제국이 된 이유 역시 순혈주의를 지양하고 관용과 개방성, 섞임의 국가체계를 토대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도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21세기 국가 혹은 기업 경영의 길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