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인사이트 - 새 세대에 ‘디지털’의 옷을 입히다
혁신 인사이트에서는 혁신의 트렌드, 전략 및 혁신사례를 살펴봅니다.
▲ 김현진 차장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경영지식팀
최근 다양한 산업계가 주목하는 소비 세력은 밀레니얼 세대다.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1980~2004년) 출생한 이들은 청소년 때부터 인터넷을 사용해 모바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IT(정보통신기술)에 대한 관심과 정보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디지털 DNA’를 장착한 이들이 소비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혁신의 방향조차 이들을 겨냥해 진행되는 사례가 많다.
최근 산업계에서 말하는 혁신 역시 IT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양한 업종 가운데서도 유독 럭셔리 업계는 IT가 주도하는 혁신을 더디게 받아들였다. IT 혁신은 소비자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대중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대체로 진행된다.
그러다보니 소수의 부유층을 겨냥하며 폐쇄성을 내세워왔던 럭셔리 업계에선 IT와 관련된 유통과 마케팅을 금기어처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약 10년 전 프랑스의 경영대학원에서 럭셔리 마케팅을 전공한 필자는 유명 럭셔리 브랜드 중 하나를 방문했을 때 당시 최고경영진이 했던 말이 잊히질 않는다.
“온라인 판매 등 IT 기술을 활용한 세일즈, 마케팅을 고려하고 있나”라는 질문에 그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럭셔리와 IT는 공존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렇게 보수적인 럭셔리 업계에서 최근 몇 년 간 IT 관련 혁신으로 가장 주목받는 브랜드가 이례적으로 탄생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바로 영국의 자존심, ‘버버리’다.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하라
▲ Burberry Kisses - New York Skyline
버버리가 혁신을 시도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키워드는 바로 ‘밀레니얼 세대’였다.
사실 개버딘 소재 트렌치코트로 유명한 이 브랜드는 라이선스 남발과 브랜드 정립의 혼란으로 당시 ‘올드 한’ 이미지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랬던 버버리가 혁신의 목표를 ‘밀레니얼 세대’로 상정하면서 IT를 기업 전략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전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2006~2014년 버버리에서 CEO(최고경영자)를 지낸 안젤라 아렌츠 전 사장(현 애플의 온라인 유통 부문 수석 부사장)이었다.
그는 2013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기고문에서 밀레니얼 세대에 대해 ‘지금까지 럭셔리 브랜드 경쟁자들이 소홀히 하고 무시하기도 했던 도화지의 여백과 같은 소비층’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해 윗세대에 비해 물질적으로 여유롭지 않고 소유보다는 공유 또는 임대로 재산을 활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이유로 간과했던 밀레니얼 세대를 들여다보니 자신의 취향과 관련된 소비에는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루한 이미지가 위협요소라고 판단한 버버리는 이후 디지털을 부흥 전략으로 활용했다. 먼저 아렌츠 전 사장은 CTO(Chief Technology Officer)를 불러 “버스의 뒷자리가 아닌 앞자리에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서비스 지원부서가 아닌 디자인과 판매 전략의 중심에 서달라는 의미였다. 이후 버버리는 스스로를 ‘디지털 미디어 컴퍼니’로 소개했다.
아렌츠 전 사장과 현 CCO(Chief Creative Officer)인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훌륭한 파트너가 돼 디지털을 패션, 특히 럭셔리 산업과 결합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오프라인 매장마저 온라인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2012년 9월 영국런던 리젠트 스트리트에 문을 연 버버리 매장 내 모든 의상에는 전자태그가 삽입됐다. 옷을 들고 특수 거울근처로 가면 해당 의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 함께 매치하면 좋을 의상 등 다양한 정보를 볼 수 있다.
한편 2009년 9월 런던에서 열린 패션쇼에서는 온라인 채널을 통해 최초로 버버리 패션쇼 전체가 실시간 생중계됐다. 통상 럭셔리 브랜드들은 바이어나, 패션지 기자 등을 초청해 실제 소비자들이 옷을 입게 되는 시점보다 6개월가량 앞서 패션쇼를 선보여 왔다.
바이어와 에디터들은 주문 및 촬영 등의 시간을 확보하고 브랜드로서도 주문량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하려는 일종의 관행이었다. 즉 생산자 중심의 사고가 계절에 맞지 않는 의상의 생산 스케줄을 좌우했던 것이다.
버버리는 이러한 스케줄을 소비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패션 업계로서는 ‘코페르니크쿠스적 발상’에 가까운 혁신을 시도했다.
지난해 베일리는 패션쇼가 끝나자 마자 쇼에서 선보였던 의상들을 즉시 매장과 온라인을 통해 판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패션 업계의 연례행사를 고객 중심의 질서로 전환한 것이다.
모든 매장 직원들에 태블릿 PC를 지급해 매장 내에서 실시간으로 고객이 원하는 상품 및 재고를 검색할 수 있게 하고 럭셔리 브랜드 최초로 스냅챗과 트위터 등을 활용해 상품을 판매하는 등 ‘친밀레니얼 세대’ 마케팅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버버리는 IT 혁신 기업과의 협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애플, 구글, 트위터, 유튜브, 라인, 카카오 등 글로벌 브랜드뿐 아니라 각 국가별로 특화된 SNS 채널과도 적극적으로 제휴해 새롭게 상정한 아이덴티티인 ‘디지털 Burberry Kisses - New York Skyline 미디어 컴퍼니’로 거듭나기 위해 힘썼다.
특히 구글과 함께 협업한 ‘버버리 키스’는 차가운 이미지의 디지털을 따뜻한 정서와 묶으면서 고급스러움도 지킬 수 있음을 증명한 ‘베스트 프랙티스’로 평가받았다.
‘버버리 키스’는 폰이나 웹캠을 이용해 자신의 키스마크를 캡처하고 가족, 연인 등 원하는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한 기술이다.
이를 통해 버버리라는 브랜드의 인간적인 가치, 그리고 그 가치를 디지털을 통해서도 전달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이미 가진 자산을 활용
버버리가 혁신의 엔진을 성공적으로 가동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브랜드의 핵심 가치(Core Value)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간파했기 때문이다. 버버리는 실제 보통명사처럼 불리고 있는 트렌치코트로 유명한 브랜드다.
아렌츠 전 사장은 취임 직후 이 역사적인 자산을 포함한 아우터(외투)의 매출 비중이 20%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후 기업 전략을 모두 트렌치코트 중심으로 수립하기 시작했다.
버버리 경영진은 이에 맞춰 자칫 고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기존 디자인을 밀레니얼 세대의 취향에 맞게 젊고 감각적으로 리노베이션하는 동시에, 버버리를 사랑해온 기존 고객들의 심기 역시 건드리지 않도록 이른바 ‘중용(中庸)’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해 애썼다.
또 단지 이미지로만 트렌치코트를 내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제품이 실제 매장에서 아이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객 반응이 가장 좋은 50개 스타일을 선정하고, 이 제품이 매장에서 원활하게 판매될 수 있도록 이 제품들에 ‘6-6-6-6’ 시스템이라는 물류 메커니즘을 적용했다.
즉 각각 판매 가능 분량을 기준으로 6주 동안은 매장에, 6주는 창고에 보관하고, 6주 분량은 실제 생산을 진행했다. 또 나머지 6주 분량은 원자재 상태로 유지하게 했다.
고객이 원할 때 이 주요 제품들이 품절돼 기다리게 하는 등의 불편을 덜기 위해 고객중심의 물류 시스템을 적용한 것이다.
또 고객과 직접 만나는 판매 직원들에게도 이 트렌치코트에 대한 교육 및 판매 인센티브를 강화했다.
100개 이상의 공정을 약 3주에 걸쳐 진행하는 등 트렌치코트 한 벌을 완성하는 데 엄청난 장인정신이 필요한 ‘작품’임을 직원들에게 먼저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각 직원에게 배포한 태블릿 PC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직원용 교육 프로그램을 널리 알리고, 매일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데도 활용됐다.
일사불란한 디지털 전략
전 세계 매장 내 판매 직원들에게 태블릿 PC를 지급한 데는 사실 이처럼 다양한 전략이 숨어 있다.
일단 태블릿 PC는 모든 매장에 다양한 제품을 진열하기는 어렵기에 매장 내 고객들에게 이러저러한 다른 옵션들이 있다는 사실을 실제에 가까운 사진과 영상을 통해 직접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에 더해 장인정신이 깃든 제품 제작 공정 등도 동영상으로 곧바로 보여줄 수 있다.
이는 오프라인 매장이 온라인 매장의 장점을 모두 갖출 수 있게 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오프라인 매장은 친절한 직원의 응대와 함께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량 생산 원칙으로 툭하면 재고가 떨어지기 일쑤인 럭셔리 제품 재고 관리의 특성상 헛걸음을 하기도 쉬운 공간이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온라인으로 전 세계 매장을 빠르게 검색해 원하는 제품을 찾아주는 물류 관리의 역할까지 매장 내 태블릿 PC가 담당하게 된 셈이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들로 버버리는 뉴욕의 리서치 회사 L2가 럭셔리 산업 내 브랜드를 디지털 IQ 인덱스로 평가하는 ‘L2 패션 디지털 인덱스’에서 2015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버버리의 디지털 혁신이 순조롭게 진행된 데는 강력한 리더십의 힘이 컸다. 하지만 이것이 조직 말단까지 효율적으로 전달된 데는 ‘젊은 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아렌츠 전 사장은 긴 역사만큼이나 관료적인 분위기의 조직 질서를 타파하고 밀레니얼 세대에 속하는 젊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경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당시 버버리 영국 본사 직원의 70%는 30대 미만의 밀레니얼 세대였다.
이들이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디지털 환경과 쇼핑 습성을 듣기 위해 버버리는 전략혁신위원회를 열고 젊은 직원들이 ‘날 것’ 상태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최고 임원진 중 하나인 베일리가 직접 경청해 다양한 보고 과정을 통해 톡톡 튀는 ‘미친 아이디어’들이 누락되지 않게 했다.
이 같은 혁신 실험은 리스크를 동반한다. 실제 버버리의 주가는 혁신 성과에 따라 다소 출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버버리는 럭셔리 브랜드들의 DNA가 사실 ‘혁신’에 있음을 제일 빨리 간파해내면서 혁신의 영토를 선점했다.
여성을 불편한 치마로부터 독립시키고, 물에 뜨는 가벼운 여행 가방을 제작해 이동을 원활케 하는 등 사실 많은 럭셔리 브랜드들은 과거 인간의 혁신 역사를 주도해 왔다.
버버리의 혁신 실험은 이러한 ‘본분’을 빠르게 간파하고 새 세대에 맞춰 빠르게 ‘새 옷’을 입힘으로써 성공적인 첫 단추를 꿸 수 있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버버리의 혁신의 본질은 디지털이나 밀레니얼 세대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이에 앞서 ‘변화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데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럭셔리 브랜드의 철칙처럼 여겨졌던 폐쇄성과 매장 내 서비스를 통한 제품 판매라는 틀을 스스로 깨고, 디지털이라는 개방적인 공간과도 충분히 공존할 수 있음을 입증해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