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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과학탐구 - 인간이 지구에 남긴 흔적, 인류세

 

생활 속 과학탐구는 일상생활 속 물리학, 첨단과학, 과학일반에 대해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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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인류세(Anthropocene Epoch)는 지난 2000년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창안한 용어다.

파울 크뤼첸은 오존층 파괴의 메커니즘을 연구해 노벨 화학상(1995년)을 받았다.

그는 현재의 지질시대는 더 이상 홀로세(Holocene Epoch)가 아니라 새로운 지질세대라 주장했다.

인류가 지구에 가하는 변화가 지질시대를 바꿀 만큼 크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사용되진 않지만, 지질학자들은 이 개념에 대해 호의적이다.

‘세(Epoch)’는 지질시대를 나눌 때 쓰는 단위 중 하나이며, 지질연대 단위로는 누대(Eon), 대(Era), 기(Period), 세(Epoch), 절(Age)이 있다.

지구상에 새로운 생물의 출현과 멸종 등 큰 변화가 있을 때 지질시대를 구분한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공룡을 기준으로 고생대(공룡 출현 전), 중생대(공룡 출현), 신생대(공룡 멸종)으로 나누는 식이다.

신생대는 다시 1, 2, 3, 4기로 나뉘고 현재는 신생대 4기 홀로세에 해당된다.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는 총 38개의 ‘세’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 세가 지속된 기간은 대략 1,420만 년이다.

현세인 홀로세가 시작된 건 약 1만 1천 년 전이므로, 새로운 세를 말하기는 시기상조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류세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단호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46억 년 지구의 역사 어느 지점으로 날아가 봐도 지금 시대는 확실히 구분될 만한 특징을 지녔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인류세 시작의 근거로 크게 3가지를 든다.


인간이 남긴 흔적 하나, 핵실험

인류가 지구에 남긴 가장 강력한 흔적은 핵실험으로 지구에 떨어진 방사성 낙진이다.

시작점은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미국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르도(Alamogordo)에서 이뤄진 최초의 핵실험이다.

‘트리니티’라고 불린 이 최초의 핵실험은 ‘플로토늄-239’ 등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방사성 물질을 지구에 남겼다.

이후 1960년대까지 미국, 소련, 프랑스 등의 국가는 태평양과 중앙아시아 등 각지에서 수백 차례의 핵실험을 단행했다.

핵폭탄과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성 낙진은 퇴적층에 붉은색 실선을 남긴다.


인간이 남긴 흔적 둘, 플라스틱

플라스틱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영국 화학자들에 의해서이고, 대중화되기 시작한 건 2차 세계대전 이후다.

백년이 채 안 되는 이 짧은 기간 동안 플라스틱은 유리, 나무, 철, 종이, 섬유 등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재료들을 모조리 대체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 식품, 화장품, 세제, 의약품 등 현대인의 생활은 모두 플라스틱으로 싸여있다.

싼 가격, 무궁무진한 활용 가능성에 더해 플라스틱이 가진 놀라운 특성 중 또 하나는 영속성이다.

플라스틱은 분해되거나 녹이 슬지 않는다.

그 덕에 플라스틱은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암석’이 되었다.

열이 가해져 녹은 플라스틱에 모래, 나무조각, 조개, 암석 등 자연물이 뒤엉켜 만들어진 플라스틱괴(Plastiglomerate)는 이미 수년 전부터 발견되고 있다.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학교 등의 지질학자들은 하와이 남동해안 카밀로 해변에서 채집한 플라스틱 암석을 분석해 이것이 암석의 일종이라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플라스틱의 보존력은 수십 만 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해저 바닥에 퇴적된 상태에서는 수명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예상한다.

플라스틱 외에도 콘크리트, 알루미늄 등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막대한 양의 이른바 ‘기술화석’이 지구상에 쌓이고 있다.


인간이 남긴 흔적 셋, 닭

쥐라기와 백악기는 공룡 화석으로 대표된다. 그렇다면 인류세를 대표할 화석도 있을까?

닭뼈가 인류세를 대표하리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화석은 공룡 뼈다.
 
영국 레스터대 얀 잘라시에비치 교수는 “닭이 세계에서 가장 흔한 조류”이며 “세계 곳곳의 쓰레기 매립지에서 닭뼈가 화석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한 해 지구인이 먹는 닭은 600억 마리.

우리나라의 경우 한 해 닭 소비량은 4억 2천 마리에 이르며, 하루에만 120만 마리를 먹어 치운다.

본래 닭의 수명은 20~30년에 이르지만 식용 닭은 부화한 지 6주가 지나면 도축한다.

좁은 우리에 키우는 공장식 양계장은 더 많은 닭을 더 빠르게 키워내는 데 집중한다.

지난 겨울 조류독감으로 살처분된 닭과 오리의 수는 3천만 마리에 달한다.

이들이 집단 매립된 곳은 언젠가 화석으로 남아 그 비극을 기록하게 될지 모른다.


1610년? 1945년? 인류세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만일 인류세를 인정한다면, 그 시작 시기는 언제가 될까? 여러설이 있다.

우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100년 뒤
인 1610년을 기점으로 잡는다.

이때 시작으로 인간과 동식물이 대륙과 대륙을 넘나드는 이동이 본격화되었다.

인간과 동물을 따라 질병도 이동했다. 유럽에서 넘어간 전염병은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천연두 때문에 무려 5천만 명 이상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망했고 문명의 몰락을 불렀다.

1945년도 유력한 후보다. 핵실험의 시작, 석유 연료에서 유래하는 대기 중의 납 성분 증가, 화학 비료와 플라스틱의 사용,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등이 이때를 기점으로 삼는 이유들이다.

인류세는 아직은 주장일 뿐이다. 인간이 지구 환경에 가하는 위협을 해결하자는 사회운동 정도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지질시대를 나누려면 지구 전체에 일어난 사건이어야 하고, 이전 시대와의 확연히 구분되는 퇴적층이 존재해야 한다.

1945년을 기준으로 인류세를 구분한다면 아직 이런 ‘증거 자료’를 갖추기는 무리다.

그렇다고 해도 지난 46억 년 동안 지구를 거쳐 간 생명체 중 인간만큼 짧은 시간에 지구에 강한 흔적을 남긴 종족은 없었다.

대기와 토양의 성분이 바뀌고, 새로운 암석이 만들어지고, 무수한 종이 멸종하고, 인간의 식량이 되는 식물과 동물만이 대량 생산되고 있다.

영국 레스터대학교와 미국 듀크대학교 연구진은 지난 12월 흥미로운 발표를 했다.

건축물, 산업시설, 컴퓨터나 전자제품, 항공기와 선박 등 인간이 만든 문명 산물의 무게를 계산하면 총 30조톤에 달한다는 것이다.

30조 톤은 지구 표면을 제곱미터 당 50킬로그램 씩 쌓을 수 있는 양이며 지구에 사는 모든 동식물 무게의 10만 배에 달한다.
 
인류세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먼 미래에 오늘의 지구는 ‘인류’라는 키워드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