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인사이트에서는 혁신의 트렌드, 전략 및 혁신사례를 살펴봅니다.
▲ 한인재 센터장/기자
동아일보 경영교육센터/DBR·HBR코리아
변화 없이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기업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영자는 없다.
하지만 언제 주력 사업과 기술, 조직을 바꿔야 할지 판단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실제 변화를 실행하는 일도 쉽지 않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따르면, 개혁을 10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CEO들은 3분의 1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결국 많은 리더들이 ‘일단 기다려 보자’는 접근을 택하곤 한다. 하지만 코닥, 모토로라, 컴팩, 블록버스터와 같은 사례들이 보여주듯, 그때가 되면 ‘만시지탄(晩時之歎)’, 너무 늦을 수도 있다.
‘나일론’과 ‘라이크라’, 20세기를 대변하는 섬유 제품의 공통점은 200년 기업 듀폰의 대표적 브랜드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 브랜드 덕분에 듀폰을 섬유·화학 회사로 알고 있지만, 사실 듀폰은 1802년 화약 제조 회사로 출발한 기업이다.
듀폰이 나일론을 출시한 건 1940년이었다. 듀폰은 이 나일론이라는 획기적인 기능성 합성섬유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자 듀폰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듀폰을 대표해 온 핵심 주력 사업인 섬유 사업에서 탈피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실제로 2004년 듀폰은 섬유 사업을 매각했다. 이어 듀폰은 종자 회사를 인수하고, 옥수수를 비롯한 농산물 업종에 진출한다. ‘듀폰 역사상 최대의 도박’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과감한 변신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듀폰은 3년 만에 전체의 3분의 1을 넘는 매출을 신제품에서 올렸다. 그리고 농산물·식품 분야의 매출이 기존 주력 사업인 기능성 섬유제품의 매출을 능가하게 된다.
반면 세계 섬유 산업의 중심은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가며, 섬유 산업의 성장률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듀폰이 만일 기존의 주력 산업에만 한정된 자원을 계속 투입했다면 현재 듀폰의 위상은 유지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지금의 듀폰은 농작물 종자 사업에 생명공학, 재생 에너지, 환경 기술, 첨단 소재, 전자 정보 사업을 비롯한 미래형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는, 종합 과학 기업이라고 불릴 만하다.
변화와 혁신, 초경쟁 시대의 필요 조건
듀폰 CEO는 “듀폰의 200년 역사는 과거와 결별하는 과정의 역사”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같은 듀폰의 전략은 ‘성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언제든 움직이는 것’이라고 정리된다.
듀폰이 오랫동안 최고의 기업의 자리를 차지해 온 원동력은 바로 이처럼 기존의 성공을 가져온 주력 핵심 사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미래의 변화를 내다보며 과감하게 새로운 성장 사업에 투자해 온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GE(제너럴 일렉트릭)와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도 적시에 사업을 다각화하는 변화와 혁신으로 오랜기간 선도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해 온 대표적 사례다. GE는 잘 알려진 것처럼 토마스 에디슨이 창립한
회사다. 그가 발명한 전구 등 조명기기와 전기 설비는 오랫동안 GE를 대표해 온 주력 사업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말 GE는 전통적인 전기, 조명뿐 아니라, 화학 등 중공업과 방송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그룹의 가장 큰 자산은 금융 사업이 차지할 정도였다.
21세기에 접어들자 GE는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다. 현재의 수익성이 좋은 주력 사업이라 하더라도 미래의 성장성이 떨어지는 사업들은 과감히 버리거나 규모를 줄이기로 한 것이다.
GE는 주력 사업을 매각하거나 투자를 줄여 확보한 재원을 ‘에코매지네이션(Ecomagination: 친환경을 의미하는 Eco와 상상력을 뜻하는 Imagination을 조합해 만든 신조어)’ 관련 사업에 쏟아부었다.
점차 환경과 에너지, 건강과 삶의 질의 중요성이 커지는 메가트렌드를 내다보고, 수처리 회사와 에너지 기술 회사를 인수하는 등 물 관련 기술, 에너지 기술, 의료 장비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한때 그 위상이 흔들렸던 GE는 세계 최고의 친환경 인프라 회사로 변모하는 데 성공했고, 손꼽히는 글로벌 최고 기업으로서 위치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은 5대에 걸친 긴 역사를 가진 가족 기업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엄격한 승계 체계를 준수하며, 경제적 이익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존경받는 기업으로 손꼽힌다.
발렌베리 그룹은 한때 삼성그룹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더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런데 이 그룹이 잘 알려진 가전 분야뿐만 아니라, 은행, 금융, 전기, 통신 장비, 건설 장비, 제약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실 발렌베리 그룹이 150년 넘게 지금의 자리를 지켜온 데에는 ‘문어발식 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과감한 다각화 전략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한 우물만 판다면···
“한 우물만 팠다.” 기업인이나 유명 전문가의 인터뷰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잘나가던 기업이 실패하면 이를 두고 ‘관련 없는 분야로의 무리한 확장 때문’이라는 지적이 가장 먼저 언론 지면에 나오곤 한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는 해설이 덧붙여진다.
경영학계에서는 사업 다각화와 기업 성과와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까.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들은 평균적으로 ∩자 곡선(역 U자 곡선)의 관계가 있다고 보고있다.
경영자는 보통의 경우 기존 사업과 관련성이 큰 분야로 진출하는 ‘관련 다각화’를 먼저 시도한다. 관련 다각화를 하면 ‘규모의 경제(Scale Economies)’가 나타나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되는 등 기업 전체의 성과가 높아진다고 본다.
나아가 경영자는 기존 사업과는 명확한 연관성이 없는 분야로 확장하는 ‘비관련 다각화’로 큰 변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
이렇게 연관성이 적은 사업 분야로 진출하게 되면 비용 절감 효과는 상대적으로 작게 나타나는 반면 리스크는 커지게 된다.
성과가 좋은 일부 사업이 나머지 사업을 보조하는 역효과가 날 수 있고, 이 경우 그룹 전체의 성과가 낮아지게 된다.
특히 자만심이나 과시, 확장 욕구에서 비롯된 무리한 인수합병(M&A)은 ‘승자의 저주’에 빠지게 되는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 이처럼 학계에서도 사업 확장은 기존 사업과 연관성이 큰 관련 다각화가 좋다는 분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패러다임을 수정해야 할 때가 왔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트렌드의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른 초경쟁 시대다.
언제 어디서 산업 간 경계마저 무너뜨리는 경쟁자가 나타날지 모른다. 컴퓨터를 만들던 애플이 스마트폰을 만들더니, 콘텐츠 유통업을 점령했다.
온라인 검색업에서 시작한 구글이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장악하고, 단말기 제조업체들을 좌지우지한다.
책 유통업에서 출발한 아마존이 종합 이커머스 기업으로 도약하더니 태블릿PC까지 내놓았다.
비단 대기업만의 얘기가 아니다. 이 같은 큰 변화의 흐름에서 영향을 받지 않은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은 거의 없다.
‘한 우물만 파서 성공한다’가 아니라 한 우물만 파다가는 거기에 빠져 죽거나 순식간에 물이 말라 버리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핵심 역량과 핵심 사업은 다르다. 기존의 성공을 가져온 핵심 주력 사업 분야에만 머무르지 말고, 앞으로의 성공의 기반이 될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재빠르게 사업 기회를 찾아 변신해야 한다.
한 기업이 벤처기업에서 출발해 중기업,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나아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 우물’적인 시각과 사고 체계를 버려야 할 때도 온다는 뜻이다.
고성장 기업들의 성공 비결, 변화와 혁신
넷플릭스는 1990년대 말 DVD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기업이다. 우편으로 DVD를 주문할 수 있는 우편 주문 DVD 서비스를 내놓아, 당시 주류를 이뤘던 대형 비디오 대여 프랜차이즈들을 누르고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그런데 2011년 넷플릭스의 CEO 리드 헤이스팅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주력 사업인 우편 주문 DVD 서비스를 별도 회사로 분리시키고, 앞으로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조직 내부의 강력한 반발은 불을 보듯 뻔했다.
고객들의 반응도 좋지 않았다. 실제 수십만 명의 고객이 서비스를 해지했다고 한다. 이런 반발에 넷플릭스는 전략을 일부 조정하긴 했다.
그러나 변화의 결과는 놀라웠다. 3년 만에 넷플릭스의 매출은 두 배로 뛰었다. 2017년을 맞은 지금,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가 앞으로의 영상 소비를 주도할 것이라는 데 의문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도는 선진국 기업들의 콜센터 외주처로 인기가 많다. 타타그룹의 계열사인 타타 컨설턴시 서비스도 외주 콜센터 사업으로 급격히 성장한 기업이다.
하지만 콜센터 외주 수요가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에 이 회사는 콜센터 사업을 과감히 정리했다.
타타 경영진은 앞으로 외주 서비스 전체가 클라우드 환경으로 바뀔 거라 내다봤다.
즉, 오프라인 콜센터 사업이 위축되는 대신, 온라인을 활용한 양질의 서비스가 대세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이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재들을 더 많이 유치해야 했다.
하지만 업의 특성상 콜센터의 직원 이탈은 매우 심했고, 연간 50만 명에 이르는 인력을 채용하고 교육하는 게 큰 부담이었다.
HR부서는 혹사당했고, 많은 회사의 재원이 낭비됐다. 결국 타타는 캐시카우인 콜센터 사업에서 과감히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판단은 매우 선도적이고 적절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불황이라는 말도 사치라고 불릴 만큼 구조적인 저성장이 고착화된 시대다. 여기에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경영 환경에서, 새로운 사업 분야에 진출하기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기업들이 증명하듯 정보, 콘텐츠, 환경, 에너지, 바이오, 헬스케어 등 미래 유망 분야는 여전히 많이 있다. 유통, 식품, 소재 등 전통 산업에서도 새로운 기회는 열리고 있다.
대량생산 혁신으로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연 헨리 포드도 당시에는 혁신가였다.
1913년 그가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해 대량생산 혁신을 이뤄내기 전까지 자동차는 사실 대중이 이용할 수 있는 운송 수단이 아니었다.
포드는 사고의 전환에서 출발한 생산 기술의 혁신을 발판으로 쓸 만한 품질의 자동차를 저가에 양산해 인류의 생활상을 바꿀 수 있었다.
포드는 자신의 혁신 비결을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내가 만약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물어봤다면, 더 빨리 달리는 말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소비자라고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지금 고객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변화와 적시 투자로 미래 시장이 원하는 것을 구현하기 위한 미래의 기술과 역량을 갖출 때, 게임의 룰을 바꾸는 'Rule Changer'로 도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