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인터뷰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등을 알아봅니다.

한국의 맛으로 세계인을 사로잡다

공동 작성_ 서민석 교수(한양대학교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이정선 전문작가(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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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농심 신라면~ 저도 신라면 좋아하는 1인입니다.”

“쇠고기 국물 맛을 바탕으로 얼큰한 맛을 더한 라면의 대표. 여러 번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맛있어요.”

수십 년 전부터 한국의 국민 라면으로 자리매김한 농심 신라면이 올해로 출시 30주년을 맞았다.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온 만큼 성과 또한 눈부시다.
 
국내외 시장으로 판매된 신라면의 개수만 약 280억 개. 올 4월에는 국내 식품 단일 브랜드 사상 최초로 누적 매출 10조 원을 돌파했다. 이렇듯 눈부신 ‘신라면’의 활약 뒤에는 ‘업계 최고참 라면 연구가’로 인정받는 박수현 부사장이 있었다.


맛있게 매운 ‘신라면’, 기획에서 출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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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출시 후 라면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지켜 온 ‘농심 신라면’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을 뒤로하고 시원한 가을바람과 함께 서울 보라매공원 인근에 위치한 농심본사 사옥을 찾았다.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예나 지금이나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신라면이 처음 개발된 연구소와 공장 자리를 방문한다는 것은 라면 애호가인 필자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잠시 후 바쁜 시간을 쪼개 인터뷰에 응해준 박수현 부사장과 마주 앉았다.

고려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농심에 입사한 후 37년간 라면 연구에 매달려 온 업계 최고참 라면 연구원인 만큼 첫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신라면 개발 이야기로 이어졌다.

“신라면은 ‘깊은 맛과 매운맛이 조화를 이룬 얼큰한 라면’을 목표로 개발됐습니다. 1983년 안성탕면, 1984년 짜파게티를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라면 업계 1위 업체였던 S사를 밀어내며 시장 1위를 차지한 농심은 독주 체제를 굳히기 위해 신상품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농심이 가장 힘을 기울인 부분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얼큰한 소고기장국의 매운맛 구현’이었다. 개발팀은 전국에서 재배되는 고추 품종을 모두 사들여 매운맛을 실험했다.

하지만 고춧가루의 매운맛을 라면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한 직원의 제안은 문제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당시 영업담당 부장이 새로운 제안을 하셨는데 해장국에 넣어 먹는 다대기가 들어간 라면을 개발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죠.”

고객 접점 현장에서 나온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신라면의 매운맛은 ‘다대기’로 불리는 다진 양념에서 비롯됐다. 다대기는 칼국수·냉면·설렁탕처럼 국물 있는 음식에 섞어 먹도록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 등을 버무려 만든다.
 
‘매운맛을 좀 더 감칠맛 나게 만드는 다진 양념을 이용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나오자 개발팀은 유명 음식점들을 돌면서 다대기를 모아 실험에 들어갔다.

그렇게 완성한 분말스프는 ‘맛있는 매운맛’의 비결이 됐다. 면발도 기존의 라면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양념이 잘 스며들면서도 쫄깃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내기 위해 200여 종의 면발을 물의 양과 온도에 따라 실험한 결과 지금의 둥글고 넉넉한 면발을 새롭게 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맛의 균일성 확보가 필수인데 안동, 봉화, 청양 등 무려 40개나 되는 고추의 산지마다 그 맛이 달라지는 까닭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해마다 다른 기상상황과 수확시기별로도 그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결국 농심이 선택한 방법은 ‘매운맛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었다.

“매운맛의 기준을 정한다는 것이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라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어요. 전국의 농협과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각 지역의 농협을 통해 모아들인 고추를 분석해 재배 지역과 수확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맛을 표준화했습니다. 한국 고추 특유의 매콤하면서도 약간 달콤한 맛을 가장 잘 생산해 낼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가 안 될 만큼 분석 기술이 발달하고 다양한 장비들이 구축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모든 것이 열악했기에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말이 좋아 연구지 하루 종일 고춧가루를 뒤집어쓰고 살았어요. 그렇게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이 농심이 아니라 농협에 근무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맛있게 매운 라면’이라는 점에서 제품명을 신(辛)라면으로 결정한 후 상표를 등록하는 과정 역시 녹록치 않았다.
 
‘식품의 상품명 표시는 한글로 해야 하며, 외국어를 병기할 때는 한글 표시보다 크게 할 수 없다’고 규정한 당시 식품위생법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심사숙고 끝에 정한 제품명을 새로운 이름으로 바꿔야 하는 상황에서 농심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자 문화권에서 과연 한문을 외국어로 분류하는 것이 맞나”며 끈질기게 보건사회부를 설득한 끝에 결국 1988년 해당 조항이 개정됐다.


전 세계에 울려 퍼진 이름, 농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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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 최남단 칠레 푼타아레나스 신라면집을 찾은 현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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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탄생한 ‘신라면’은 출시되자마자 가파른 매출 상승곡선을 그렸다. 신라면을 먹어본 소비자들은 ‘얼큰한 국물 맛도 좋고 면도 맛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운(辛)맛 콘셉트와 그를 강조하는 붉은색 제품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에게 어필했다.

“사나이 울리는, 농심 신라면~”이라는 CM송 가사 또한 소비자들에게 각인되면서 신라면은 농심이라는 브랜드를 넘어 사실상 한국의 라면 맛을 상징하는 제품이 됐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현재 신라면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미국·중국·일본·호주 등 4개국에 생산·판매 법인과 영업지점을 구축한 가운데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의 라면 시장인 중국 시장에서는 현지 브랜드보다 3배 정도 높은 가격에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스위스 융프라우, 칠레 푼타아레나스, 네팔 히말라야 등 전 세계 랜드마크에서도 신라면을 맛볼 수 있다.

이렇듯 신라면이 국내외에서 인기를 끄는 비결은 무엇일까? 출시 이후 맛과 품질을 한결같이 유지한 전략이 있다는 게 박 부사장의 설명이다.

“같은 동양권이라 해도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나라와 민족에 따라 음식의 맛과 향은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면은 전 세계 어디로 수출되든 동일한 맛과 품질을 지킵니다. 마케팅은 철저하게 현지화를 추구하지만 어느 나라에서 구입하든 한국의 매운맛은 동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맛이 세계인의 입맛에도 맞을 것이라는 농심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현재 신라면의 해외매출 비중은 35% 수준으로 앞으로 50%까지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최근 제가 눈여겨보고 있는 시장이 있는데 인도와 브라질, 그리고 아프리카입니다. 지난해에 진출을 시도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아서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농심은 아프리카에 라면과 과자 등을 수출하고 있는데 서아프리카의 관문인 가나를 비롯해 동아프리카 케냐, 유통 채널이 발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수출 주력 국가다.
 
물론 수출 품목의 대부분은 신라면이다. 아프리카 라면시장은 기존 시장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잠재력이 높은 곳으로 꼽힌다.


실패는 있어도 후회는 없다!

신라면의 성공 이후 박수현 부사장은 스낵개발팀장과 개발본부장을 거쳐 CTO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성공의 경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8년 국내 최초로 개발한 인스턴트국인 ‘번개국’과 2005년 생라면을 과자처럼 먹고 싶은 수요층을 겨냥해 개발한 ‘차비라면(차 안에서 국물 없이도 먹을 수 있는 비타민 라면이라는 뜻)’은 빛을 보지 못하고 시장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이들과 유사한 콘셉트의 제품들을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퍼스트 무버(First-mover)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박 부사장은 이때의 경험들을 통해 배운 것들을 연구개발 활동에 중요한 지침으로 삼고 있다.

“CTO로서 시장을 선도할 아이디어들을 장려하는 것은 회사를 떠받치는 미래 주춧돌을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니즈를 너무 앞서거나 불필요한 비용만 상승시키는 요인들을 혹시 시장의 니즈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지요.”

아무리 훌륭한 제품이라도 시대에 맞지 않거나 시 장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가격이 설정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박 부사장의 생각이다.

이와 반대로 시장을 반영한 올바른 의사결정 끝에 개발이 결정된 경우라면 끈기 있게 계속 도전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 일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입 연구원이 들어오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단 1년 동안 자신의 일과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부터는 ‘일에 미쳐라’라고 강조합니다.”

회사가 잘 되려면 R&D의 역할이 큰 만큼 후배들이 자신보다 앞서가길 바라기에 늘 당부하는 말이 또 있다.

“유일하게 연구원들에게 하는 잔소리가 있습니다.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결과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무언가 끝까지 해봤다면 거기에서 얻어지는 것들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항상 강조합니다.”

신라면, 안성탕면, 짜파게티 등 스테디셀러 제품군을 다수 보유한 농심의 저력이 바로 이러한 도전정신의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10년 전 처음 연구소장(CTO)이 되었을 때 한 신입 연구원이 건넨 질문이 있어요. ‘어떻게 해서 연구소장이 될 수 있었느냐’고 묻길래 ‘하고 싶은 일을 미친 듯이 하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남들이 연구소장이 된 걸 축하한다고 하더라’라고 했어요.”

40여 년 연구개발 인생을 살면서 실패는 있었어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고 말하는 박 부사장. 문득 그의 청년 시절이 궁금해졌다.

“대학 재학 시절 아버님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탔어요. 그러다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 장학금을 지원해 준 기업이 어딘지 궁금해졌습니다. 한참 교수님을 조른 끝에 농심이란 걸 알고는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그때의 만남이 이렇게까지 긴 인연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1979년 농심에 입사한 그에게 처음 주어진 일은 ‘감자깡’ 개발이었다.

“당시 연구소장께서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감자스낵을 만들어 가져와 보라시니 정말 난감했죠. 하지만 정작 개발에 들어가니 모든 게 재미있고 신기하더라고요. 정말 미친 듯이 전념했어요.”

감자의 성분을 분석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다양한 배합을 시도한 끝에 완성한 감자깡은 새우깡의 뒤를 이어 히트를 쳤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박 부사장이 깨달은 것은 ‘기록의 중요성’이다.

“시제품을 만들고 테스트를 하고 부족한 점을 고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직감들이 느껴져요. 그것은 다른 유무형의 제품들로는 느낄 수 없는, 단지 식품을 섭취할 때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이죠.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매뉴얼화하기 위해 빠짐없이 기록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40여 년을 한결같이 아침 7시에 출근해 개발의 전과정과 그 결과물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CTO의 자리에 오른 지금도 가장 먼저 출근해 제품개발 보고서를 정독하고 일일이 리뷰해 주는 박수현 부사장.

그가 늘후배들에게 당부하는 것이 있다. 개발자 들에게 남는 것은 ‘기록’이며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큰 자산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게 많아요. 현장에서 보고 듣는 수많은 경험들이 중요한 자산이 되죠. 그것들이 마치 접착제처럼 단단하게 서로를 연결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얻어지는 소중한 정보들은 바로 농심의 역사이자 한국의 가공식품 산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요.”


임직원들의 역량이 곧 회사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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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원들의 역량 개발을 위해 실행하고 있는 ‘해외연수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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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국내 최초 오픈한 ‘농심 식문화 전문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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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도연(道延)한마당


현재 농심은 다가올 미래를 위해 많은 고민과 준비에 여념이 없다. 65세 이상의 실버 세대가 증가하는 가운데 결혼과 출산 비율은 낮아지고 있어 가공식품에 대한 수요 감소가 전망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것은 미래의 실버 세대는 이전의 실버 세대보다 가공식품에 대한 친밀도가 높을 것이라는 예측 아래 150조 원 규모로 예측되는 실버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수요층의 니즈 파악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동안 농심은 변화하는 수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체질을 만들어 왔습니다. 독자적인 소비자 정보 공유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시장의 수요를 적극적으로 흡수해 제품 개발에 활용해 왔으며 회사 내의 아이디어를 고도화시켜 제품 개발에 적극 반영하는 체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의 역할은 크게 현재 사업 강화 및 미래 사업준비로 구분하고, 기술 부문 역시 기존 기술과 신기술로 구분하여 포트폴리오의 비율을 조정 관리하고 있다.
 
단기성과와 장기성과에 대한 적절한 조율 과정은 박 부사장이 담당하는 중요한 업무로 연구소 역량 강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모든 연구원들에게는 해마다 열리는 국내외 각종 전시회와 해외 연수 프로그램 참가 기회가 제공됩니다. 또한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기술 노하우와 개발 이력을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도록 국내 최초의 식문화 전문 도서관도 운영 중입니다.”

신대방동의 농심 연구소 내에 위치한 식문화 전문도서관은 기업의 창립이념에 따라 일반인에게도 개방함으로써 식품업계 관계자들은 물론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앞으로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과 실무능력을 갖춘 인재를 육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연구소는 연구소 내 직무 순환뿐 아니라 생산/마케팅 부서와의 직무순환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연구원들이 한 분야를 깊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분야와 만났을 때 그 시너지가 대단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시도가 많이 나오고 있으며 연구원들의 만족도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직무순환제도를 통해 타 부서의 업무를 이해하고 업무를 진행함으로써 업무 처리 시간이 단축되고 서로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자율적으로 창의적인 연구 성과를 도출할 수 있는 연구문화 조성을 위해 각자 자유롭게 수행한 연구 결과를 소개할 수 있는 ‘인큐베이션 페어’ 행사도 매년 2회씩 개최하고 있다.

그 결과 연구원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내며 전사적인 행사로 자리 잡았으며 제품 개발 및 출시와도 연계되어 연구원들의 성취감과 업무 만족도를 크게 높이고 있다.

“농심에서는 협업(Collaboration)문화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협업에 대한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BPP(Best Practice & People) 제도를 운영해 협업문화 조성에 기여하는 인재들을 발굴하고 우수 사례를 공유하며 적절한 포상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임직원들의 역량이 곧 회사의 미래’라는 믿음 아래 많은 지원과 관심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1965년 설립 이래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영업망과 11개 공장을 자랑하고 있으며 자산규모 2조 2,575억원, 종업원 4,916명에 달하는 초일류 글로벌 식품기업으로 성장한 농심은 수치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저력과 가능성을 보유한 회사이다.
 
농심의 연구개발을 총 책임지고 있는 박수현 부사장의 포부에서 우리가 앞으로 목격하게 될 농심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저력은 단발성의 히트제품이 아닌 세계인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제품들을 연속적으로 만들어 왔다는 데 있습니다. 농심의 미래는 바로 임직원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신념으로 임직원들의 역량을 계발하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독려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가장 일할 맛 나는 회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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