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문화 - 역사 속 인물의 신원 밝혀내는 고고학 기술
과학과 문화는 과학과 인문, 사회, 문화, 예술 등을 접목,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학기술 이야기를 다룹니다.
글_ 임동욱 연구교수(한국외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2015년 3월 26일, 영국 중남부 레스터(Leicester) 시의 대성당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장례식이 엄숙하게 거행되던 중이었는데 유명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가 단상에 올라온 것이다.
이날 장례식은 15세기 요크 가문 출신의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다시 매장하는 행사였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오갔겠지만 놀랍게도 컴버배치는 후손 자격으로 당당히 참석했다.
사건의 시작은 2011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레스터 대학교 연구진은 그레이프라이어스(Greyfriars) 수도원 복원에 앞서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1255년에 세워진 그레이프라이어스 수도원은 300년 가까이 운영되다가 헨리 8세(Henry Ⅷ) 시대에 종교개혁이 실시되면서 파괴되었다.
470년이 흐른 뒤 수도원 터는 시의회 건물의 주차장이 되었고 복원 결정이 나면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 출토된 리처드 3세의 유골
그런데 이듬해 8월에 특이한 형태의 유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척추가 S자 모양으로 굽어 있던 것이다. 상태를 살펴보니 매장되기 이전부터 기형인 채로 살아갔던 인물이었다.
▲ 꼽추왕 리처드 3세
연구진은 '리처드 3세(Richard Ⅲ, 1452~1485)'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여러 역사책에서 ‘꼽추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기 때문이다.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1592년에 쓴 희곡 ‘리처드 3세’에서 왕의 형상을 “심하게 일그러졌다”, “만들어지다 만 사람처럼 뒤틀렸다”고 묘사한 바 있다.
발굴된 척추의 모양으로 유추해보면 꼽추라 불릴 정도로 심하지는 않고 한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눈에 띄게 처졌던 정도로 추측된다.
리처드 3세는 이러한 신체적 악조건을 극복하고 지략을 이용해 왕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그 즈음 잉글랜드는 왕위계승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 북서부 도시 앙주에서 출발한 플랜태저넷 가문이 1126년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한 이후, 방계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왕위를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랭커스터 가문은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상징물로 썼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요크 가문은 리처드 3세의 친형 에드워드 4세 때 처음으로 랭커스터 가문을 누르고 왕위를 차지했다.
이후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리처드 3세는 친형의 결혼이 공식적이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조카를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를 빼앗았다.
리처드 3세는 레스터 인근에서 벌어진 보즈워스 전투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 휘하 군사들에 의해 전사했다.
유해는 발가벗겨져 놀림감으로 시내에 내걸렸다가 그레이프라이어스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527년 만에 발굴작업에 의해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유골을 리처드 3세로 확정 지은 것은 척추 기형 때문만은 아니다. 레스터 대학교 연구진은 발굴된 유골에서 DNA를 추출해 후손들의 유전자와 비교하는 작업을 거쳤다.
인체의 세포 내에는 미토콘드리아라는 에너지 변환기관이 존재하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오로지 모계를 통해서 전달되며 원래 상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자녀에게 전해진다.
리처드 3세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요크 백작부인인 어머니 세실리 네빌(Cecily Neville)의 모든 직계 자손을 추적했다.
가장 확실한 인물로는 ‘요크의 앤(Anne of York)’이라 불렸던 리처드 3세 친누나의 17대 직계 자손이자 런던에 거주하는 마이클 입센(Michael Ibsen)이 선택되었다.
입안 상피세포에서 DNA를 채취해 검사한 결과, 미토콘드리아 DNA가 유골에서 채취한 것과 일치했다. 리처드 3세의 신원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도 리처드 3세 삼종 형제의 16대손으로서 관련 후손에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련의 조사과정을 거친 뒤 유골은 레스터 대성당에 다시 안치되었고 컴버배치는 장례식에 참석해 시를 낭독했다. 그리고 발굴현장은 현재 ‘국왕 리처드 3세 방문자 센터’로 꾸며져 수많은 관람객을 만나고 있다.
뒤늦게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다. 우선은 연대측정법을 이용해 토층과 유물의 시기를 가늠한다.
요즘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뿐만 아니라 핵분열 손상흔 연대측정법, 우라늄 연대측정법, 칼륨-아르곤 연대측정법, 광자극형광 연대측정법, 포획전자 연대측정법 등 정밀한 연대측정법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여기에 미토콘드리아 DNA 추적을 비롯한 유전자 분석기술을 결합시켜서 정확도를 높인다. 특히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관련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에 실마리를 찾기가 수월하다.
▲ 대문호 미겔 데 세르반테스
▲ 발굴된 세르반테스의 유물
이런 방식으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대문호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유해가 2014년 발굴되어 올해 서거 400주년에 맞춘 여러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세르반테스는 1547년 귀족 출신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군인을 직업으로 선택했다. 지중해에서 벌어진 레판토 해전에서 3발의 총알을 맞은 후 귀국길에 해적에게 납치되어 알제리에서 노예로 지내는 바람에 평생 왼팔을 못 쓰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페인으로 돌아와 선택한 직업이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소설가’였다. 그러나 1605년 소설 ‘돈키호테’의 제1권을 펴내자마자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새로운 스타일 덕분에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국왕 펠리페 3세는 시끄럽게 웃는 사람에 대해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것인가” 했을 정도다. 세르반테스는 셰익스피어보다 하루 이른 1616년 4월 22일에 숨을 거뒀고 마드리드 시내의 ‘맨발의 삼위일체 수녀원’에 묻혔다.
그러나 1673년 수녀원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묘지가 사라졌다. 이를 다시 찾기 위해 마드리드 시청은 고고학 연구진에게 자금을 지원했고 2014년 발굴이 시작되었다.
건물에 손상을 주지않는 범위 내에서 지하의 묘지를 찾기 위해 적외선 카메라, 지표 투과레이더(GPR), 3D 스캐너, 방사능 측정기 등의 최신기기를 사용했다.
총 200구가 넘는 시신과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는 ‘M.C.’라는 글자가 쓰여진 쇠장식과 관 조각도 있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약자는 아닐까. 주변에 위치한 유해가 여럿이어서 누가 세르반테스인지 알아내기 어려웠다.
해답은 유골에 새겨진 흔적이 제공해 주었다. 한 유골의 가슴뼈에는 총에 맞은 자국이 있었고 왼팔 뼈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 시민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1971년 충남 공주에서 송산리 6호 고분 수리 중에 우연히 나타난 ‘무령왕릉’이다.
우리나라의 왕릉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었으며 출토된 유물의 숫자만 2,900점이고 그중 17점이 국보로 지정됐을 정도로 중요한 고분이다.
그러나 성과를 자랑하려는 성급한 마음에 토층과 유물을 삽으로 퍼서 포대자루에 담는 방식으로 1년도 아닌 17시간 만에 발굴작업을 마쳤다.
게다가 이후의 관리도 엉망이었다. 38년이 지난 2009년에 되어서야 포대자루 안의 흙 안에 유골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무령왕일까 아니면 왕비일까. 또는 순장된 다른 인물일까. 그러나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발굴된 이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해 부식이 심하게 발생하는 바람에 연대측정에 필수적인 방사성 탄소도 검출되지 않았고 신원 확인에 꼭 필요한 DNA도 채취할 수 없었다. 목관을 만드는 데 사용된 소나무가 일본산이라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이다.
1,400년 넘게 안식을 취하던 무령왕은 후손들의 무지로 인해 어이없는 일을 겪었다.
수백 수천 년 전에 매장된 유해의 신원을 밝히는 고고학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신중하게 연구하는 태도도 갖춰져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