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인터뷰

선보공업(주), 선보유니텍(주) 최금식 대표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등을 알아봅니다.

‘모듈 유닛’ 세계 1위 업체, 한국 조선업의 자존심을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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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작성_ 정원일 교수(경북대학교), 이정선 전문작가(프리랜서)


조선 산업이 불황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업계에서는 ‘대한민국 1위가 세계 1위’라는 자부심이 여전하다.

부산 사하구 다대동 ‘무지개공단’에 위치한 선보공업(주)은 국내 최초로 선박의 엔진과 연결된 여러 기관과 설비를 하나의 모듈(Module)로 제작해 조선 공정을 획기적으로 줄인 이래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대기업조차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지 목표를 정했다’며 ‘부산 조선기자재 업계의 자존심을 지켜나가겠다’고 강조한다.
 
그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일까? 조선용 배관 전문가로 30년 전통의 조선기자재 전문 생산업체인 선보공업을 이끌고 있는 최금식 대표를 만나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학벌보다 실력과 근면함으로 인정받다

‘우리는 길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길을 만들 것이다!’ - 한니발

‘실패는 낙담의 원인이 아니라 신선한 자극이다!’ - T. 사우전

‘성공의 지름길은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 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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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보공업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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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크 톱 유닛(Tank Top Unit)


선보공업 본사에 들어서자 계단의 단과 단 사이에 적힌 글들이 눈길을 끈다. 긍정과 열정의 상징인 리더들의 명언을 간직하는 회사의 CEO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 회사가 자랑하는 신제품 전시장인 2층 홍보관을 지나 3층 사무실로 들어가는 복도엔 ‘ISO9001’, ‘ISO14001’ 등 각종 기술인증서와 ‘국가생산성대상’, ‘동탑산업훈장’, ‘산업포장’, ‘부산산업대상’, ‘인적자원개발 우수기관’을 비롯한 상장 및 상패가 빼곡하다.

기술력 및 생산능력에서 세계 1위로 손꼽히는 모듈 유닛(Module Unit) 제작회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잠시 후 선보공업에서 가장 바쁜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금식 대표와 마주 앉았다.

배가 보배라는 의미에서 ‘선보(船寶)’라는 사명을 붙인 그는 조선용 배관으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곁방살이 작은 사무실에서 자본금 600만 원으로 창업해 업계의 인정을 받는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일궈낸 의지의 경영인이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30여 년 전 창업 당시로 거슬러 올라갔다.

최금식 대표는 1986년 동업자와 각각 300만 원씩 투자해 자본금 600만 원으로 남의 사무실 한켠을 세 얻어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사명은 남영공업. 사업 아이템은 해수와 오일에 함유된 각종 이물질을 걸러주는 장치인 여과기(Strainer)와 자동차의 머플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선박 엔진 소음기(Silencer)를 자체 기술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업계에 입문한 최 대표의 꿈은 수입에 의존하던 조선기자재들을 국산화하는 것이었다.

창업 이후 시련도 많았지만 결국 꿈을 이룬 그는 스스로를 행운아라 생각한다.

“공고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친구의 소개로 현대중공업에 기능관리직 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그때 처음 배를 보았는데 두고두고 생각해 봐도 배와 인연을 가진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입사 당시 배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없었던 그는 배를 처음 본 순간 군대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고 한다.

“공병대 공사계라는 곳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배를 가만히 보니 기관실을 포함해 몇 개의 층으로 이뤄진 게 집이나 아파트를 짓는 것과 비슷한 원리더라고요.”

현대중공업 입사 이후 그가 맡은 첫 임무는 배의 설계 도면을 분류하고 층별로 해당되는 부품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외주 관리 업무도 같이 맡았는데 외주업체 기술자들의 작업 과정을 보면서 어깨너머 배운 것도 많았다.

“결함이 발생하면 일을 신속하게 끝내기 위해 기술자들과 같이 작업을 했는데 밥 먹는 시간 빼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밤새도록 일을 해서 합격점을 받았는데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점차 신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내에는 그의 업무 능력을 칭찬하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러던 1975년 공정 지연 문제를 위한 비상 활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그의 진가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면서 2계급 특진을 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결혼 직후인 1980년에는 대우중공업으로 스카우트되었다.

대졸 초임 수준의 직급으로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대졸 1년 차와 동등한 대우를 받은 데 이어 다시 1년 후 대리를 거쳐 과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며 배관 업무 전반을 총괄하고 외주와 직영업체 모두를 도맡아 관리했다.

그렇게 주말도 없이 일에 파묻혀 지내던 1985년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새로 부임한 사장이 외주업체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외주업체 관리자로서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

정말 열심히 일했기에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최선의 노력으로 성장의 발판 마련

다시 부산으로 와 작은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그렇게 몇 달쯤 지났을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직접 창업을 하면 이 정도 회사는 만들겠구나’ 하는 거였죠.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였는데 혹시나 실패를 해도 초등학교 들어갈 즈음이면 다시 취업을 해도 되겠다 싶어서 무작정 창업을 했습니다. ‘망하려면 빨리 망해라! 까짓것 해보자’ 하는 마음이었죠.”

창업 아이템으로 자연스럽게 배와 관련된 일을 찾기 시작했다.

조선소 재직 당시 일하는 방식에 답답함을 느꼈던 차에 자재관리, 생산관리 등에서 ‘이렇게 하면 훨씬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직접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때마침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우조선해양에서 차장을 지낸 이가 동업을 제안했다.

자신에게 가장 취약한 설계 부분에 특허를 가진 동업자와 각각 300만 원씩을 투자해 책상 2개와 전화기 2대를 놓고 한 회사의 사무실 한 칸을 얻어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처음부터 거래는 반드시 대기업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고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창업 몇 개월 만에 재임대로 들어간 사무실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고 여기저기 떠도는 동안 동업자 역시 개인 사정으로 떠나면서 사면초가에 빠졌다.

“처음에는 선박용 여과기와 소음 저감기를 생산했는데 주문이 들어와도 생산할 공장이 없으니 정말 답답했습니다. 한번은 대우의 리그선(원유 운반선)에서 물의 양을 조정해주는 밸브를 급히 제작해 달라는 연락이 왔는데 여기저기 공장을 떠돌며 만들다 보니 대우에서 직접 실사를 나와 자체 공장을 빨리 지으라고 했습니다.”

당장 버스비를 걱정하던 시절이었으니 자체 공장을 확보할 자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설상가상으로 ‘최금식이 사업하는 데 투자하면 다 망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가까운 친인척을 제외하고 모두들 피하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어렵게 2백만 원을 대출받아 왔지만 공장 전세금이 5백만 원이나 부족했다. 바로 그때 작은 불꽃같은 희망이 보였다.

“현대중공업 재직 시절 알고 지내던 부장님이 다른 회사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무작정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더니 차용증도 없이 돈을 빌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하는데 어찌나 고맙던지요.”

그렇게 10년 동안 조선소에서 쌓은 노하우와 평판을 자산 삼아 5백만 원짜리 공장을 얻어 1천만 원에 해당하는 기계 설비를 갖추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최 대표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부딪혀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사실. 그것은 이후 최 대표 인생의 귀한 자양분이 되었다.

조선소 재직 시절 고생도 고생인 줄 모르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온 최 대표는 그와 관련한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제품을 수주하려면 조선소에 협력업체 등록을 해야 하는데 공장도 작고 시설도 열악하다 보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당시 담당자가 전 직장의 옆 부서 과장이었는데 한참을 망설이다 찾아갔더니 ‘왜 이렇게 늦게 찾아왔느냐’고 반문하더라고요.”

이처럼 과거의 최 대표를 기억하는 사람들로 인해 선보공업은 다른 어느 기업보다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창업 3년째인 1988년 대우조선해양 내에 생산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최 대표의 능력과 성품을 무한 신뢰하는 특별한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대우조선의 노사분규가 한창인 때였어요. 과거에 함께 일하던 분이 임원으로 계셨는데 위탁받은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사내 협력회사를 제안해 왔습니다. 자재와 공구, 공장부지는 회사가 부담할 테니 사람을 붙여 일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보증금이 없어 망설였더니 자신의 퇴직금으로 선뜻 보증까지 서 주셨어요.”

그렇게 대우조선 내에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하루에 수백 명씩 인력을 투입해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회사는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100평짜리 공장에서 250평짜리 공장으로 옮기고 파이프를 옮기는 크레인도 처음으로 구입했다.

설계실과 사무실도 갖추어 나갔으며, 1995년에는 마침내 자가 공장을 가지게 되었다.


‘모듈 유닛’ 세계 넘버원의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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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자재를 생산하는 선보공업에 들어서면 2,500평 규모의 공장에서 각 생산라인을 거쳐 완성 직전에 있는 제품들이 늘어서 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 정신없이 움직이는 직원들, 제품을 운반하면서도 연신 웃음을 터뜨리는 하역자….

선보는 사실 여느 조선기자재 업체들과는 다르다. 조선기자재라고 해서 배(船)의 일개 ‘부속품’ 정도를 납품하는 업체로 오인하면 곤란하다.

선보공업은 2000년대 초 선박의 기관 설비 의장품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유닛(Unit)화’한 이 분야 선도 기업이다.

선박의 기관실에는 심장 역할을 하는 메인 엔진과 이와 연결된 수많은 장비들이 유기적으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를 정확히 연결하고 조립하는데 걸리는 작업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이 바로 유닛(Unit)화다.

국내 조선소는 작업 도크가 협소한 데다 최대한 빨리 공사를 마쳐야 유리하다는 점에 착안해, 메인 엔진 외에 선박용 여과기, 소음 저감기 등을 제작 조립해 모듈 형태로 조선소에 납품한 것이다.

기존에 없던 시장을 조선소에 제안해 새로 창출해낸 것이었기에 선보공업은 독보적인 입지를 얻게 됐고, 이로 인해 국내 조선업계 활황과 함께 세계무대로 진출했다.

이는 젊은시절, 현대중공업과 대우중공업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며 선박 배관과 설비 분야 설계에 경험을 쌓았던 최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선보의 제품들 중 어떤 것(탱크탑 유닛)은 웬만한 건물보다 크다. 고객사 역시 현대중공업, 미포조선, 삼성중공업, 대우조선 등과 같은 대형 조선업체들이다.

특히 선보가 돋보이는 것은 엔진 주변기기인 ‘탱크탑 유닛’, 바닷물 여과장치 ‘스트레인너(Strainer)’, 소음기 ‘사일렌서(Silencer)’ 등 주요 제품들을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는 점이다.

이들 제품은 고객사로부터 우수한 품질과 철저한 납기 준수로 인정을 받고 있다.

선보공업은 국내 조선업계에 모듈 유닛이라는 패러다임을 최초로 제시하며 모듈 유닛 세계시장 점유율 1위, 국내시장 점유율 60% 이상을 확보하고 있다.

우수한 기술력으로 2010년 국가생산성대상, 2012년 동탑산업훈장, 2013년 전략산업선도기업인증(부산광역시) 등 각종 수상 및 인증을 받았다.

조선업계의 불황 속에서도 뛰어난 기술력과 도전정신으로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선보공업은 현재 2천여 억 원에 육박하는 매출에 9백여 명에 가까운 구성원을 갖춘 중견기업이 되었다.

창업 초기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며 주문 물량을 제작하던 데서 벗어나 이제는 전국 8개 지역에 자체 생산공장을 둘 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선보는 과연 어떻게 지금의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혁신으로 공정 단축·비용 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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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보 Family 창립 30주년 기념 행사


선보공업은 배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필요한 부품들을 모듈화하여 공급하는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최 대표가 단일 부품만으로는 성장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각종 설비 시스템에서 유입, 발생할 수 있는 유기적 부유물을 걸러내는 여과망인 스트레인너(Strainer)는 국내시장 점유율 1위로 전체 시장의 60~70%를 지배한다.

그러나 매출액은 200억 원 정도다.

그 해결책으로 고객이 배를 만들면서 늘 목말라 하는 부분을 해결해 주면서 그 해결 방법인 모듈 제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게 최 대표의 설명이다.

“1995년도 말경이었지요. 현대조선에서 엔진에 연료를 공급해주는 장치를 만들어야 했는데 엔진 메이커에서는 일본의 히타치제작소가 앞선 기술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선주들은 엔진과 연료 공급장치를 패키지로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부품들을 적기에 수주하지 못하면 배를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현대중공업은 어렵게 이를 개발했습니다. 개발해 놓고 보니 엔진 회사의 생각, 선주들의 생각 등이 혼재되어 일을 풀어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현대중공업은 이 기술을 가지고 제품을 만들어 줄 업체를 물색했고 결국 선보에게 제작과 동시에 독자적인 영업도 해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엔진룸도 고객의 편의성을 생각하여 모듈 형태로 공급했다.

최 대표가 사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제일 어려운 점은 설치를 다 한 후 녹을 빼내는 작업이었다.

결국 하나의 모듈로 제공하니 업주 측도 효율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이 고객사를 통해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요가 증가했다.

회사는 말 그대로 날개를 달게 된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고객 감동을 이루어 내니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창출하는 회사가 된 것이었다.

선보가 정한 사훈은 ‘항상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자’이다. 최 대표는 이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골몰히 혼자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 최 대표는 사업에서 얻은 깨달음이나 아이디어를 꾸준히 실천해 왔다.

그 가운데 최고의 작품은 ‘생산·자재관리 시스템’이다.

“그동안 많은 공장에서 생산·자재관리를 허술하게 하는 것을 봐 왔습니다.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한 가지 자재라도 부족하면 모든 직원들이 일을 중단하고 그것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효율이 오르지 않습니다.”

선보의 생산·관리 시스템의 가장 큰 특징은 ‘도면 회의’와 ‘자재 검열’이다.

‘도면 회의’란 작업 개시 전에 제품의 설계자와 작업자들이 만나 대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 시간에 설계자는 ‘어떤 의도로 제품을 설계했는지’를 설명하고 작업자는 작업의 최종 목적을 확인한다.

또한 ‘자재 검열’은 말 그대로 ‘생산을 위해 필요한 자재가 모두 갖춰져 있나’를 점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보의 모든 생산직원들은 매일 업무시작 30분 전에 한자리 모인다.

이때 자재가 하나라도 없으면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런 체계를 갖춘 선보공업은 다른 어떤 업체보다 공기(工期)가 빠르고 제품의 오류도 적을 수밖에 없다.


일하기 좋은 일터 위한 ‘직원감동 경영’

선보공업은 일반인에겐 가족친화기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총 18억 원 규모의 복지 재단을 설립해 의료비 지원, 문화공연 관람 지원, 주택자금 보조, 동호회 활동 지원 등 다양한 사내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선택적 복리후생 제도를 도입해 자기계발, 건강관리, 문화 활동, 가족친화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과거 최 대표가 꿈꾸었던 직장의 모습이다.

“조선소 직원으로 근무할 때 회사로부터 꼭 받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월급, 생일선물, 쾌적한 근무조건 같은 것들이었죠. 사업을 시작하면서 우리 직원들에게 제가 꿈꾸었던 것들을 그대로 해주고 싶었습니다.”

바쁜 직원들을 대신해 회사가 결혼기념일과 배우자의 생일, 경조사까지 챙기는 이유 또한 과거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창업 초기는 물론 사업이 안정된 후에도 일에 집중하느라 집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생일은 물론 결혼기념일도 모르고 지냈어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만큼은 가족에게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가족을 위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은 ‘가정’이라는 신념에서 시작된 가족친화 활동은 1998년 ‘5개년 계획’ 아래 추진되었다.

가정에서 작업복을 빨기가 쉽지 않으니 회사에서 세탁을 담당하고, 작업이 아침 일찍 시작되니 정문 앞에 김밥과 샌드위치 등을 준비했다.

생일을 맞은 직원을 불러 차를 함께 마시며 격려하고 봄, 가을이면 국제신문이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에 직원들과 함께 참가한다.

그 결과 2008년 국내에서 중소기업으로서는 처음 보건복지부로부터 가족친화기업으로 선정됐다.

조선업계의 불황이 찾아온 올해 강제적인 인적 구조조정 없이 비용 절감과 급여 동결로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최 대표의 제안에 모든 직원들이 수긍하고 따라준 비결은 한결같은 그의 스킨십 경영 덕분이다.

창업 초기 자금 및 여러 어려움을 이기고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이끈 최 대표는 선보유니텍과 선보하이텍, 선보엔젤파트너스 등 자회사를 설립하며 사업 분야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특히 부산지역 기술 기반 창업팀의 발굴 및 육성을 위해 설립된 선보엔젤파트너스에 대한 최 대표의 애정과 비전은 더욱 특별해 보인다.

“선보는 미래형 씨앗 사업을 수행하는 젊은 스타트업 기업을 키워주는 토양을 제공하고 투자 측면에서 인큐베이션 기능을 함으로써 사회환원 성격이 강한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엔젤파트너스에 지시한 것은 ‘잘못되더라도 괴롭히지 말고, 스트레스 주지 말고, 능력이 없어서 못하면 지도를 해주어야 한다. 자금이 모자라면 선보가 투자해줄 수 있도록 하라. 업종도 제한하지 말고 20개를 선정해 한 개라도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CEO를 꿈꾸는 기술 엔지니어들에게도 따뜻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어떤 열정을 품고 어떻게 노력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항상 모든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나보다 먼저 남을 배려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내 관객이며 고객입니다. 직원들도 제 고객입니다. 모든 사람을 ‘내가 모신다’고 생각하십시오. 인적 재산을 금전적인 재산보다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목표가 있다면 열정을 가지고 노력한 만큼 그 결과는 무조건 온다고 믿어보십시오. 어떤 생각을 갖는지가 중요합니다. 긍정의 힘을 믿고 항상 최선을 다하십시오.”

2016년 조선업의 위기에 대한 뉴스가 연일 들려오고 있어서일까.
 
기술력 및 생산능력에서 세계 1위로 손꼽히는 모듈 유닛(Module Unit) 제작회사가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최금식 대표는 불황의 터널 끝에서 머지않아 찾아올 호황을 준비하며 직원들과 함께 고군분투하고 있다.

‘2020년까지 성장률 2배, 비효율 제로화, 부가가치 2배, 재해 제로화’를 위한 “PLUS2020”이라는 경영혁신 목표 아래 최 대표와 그 임직원들이 함께 일궈낼 선보공업의 미래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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