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 이공계 인재양성의 현황과 과제
▲ Editor 박기범 연구위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 고등과학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주)LG CNS 연구개발센터를 거쳐 현재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서 과학기술인력정책과 기초연구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해방과 전쟁 이후 우리 고도성장의 밑거름이었던 이공계 인력정책은 2000년대 이후 다양한 측면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추격형으로부터 선도형으로 과학기술과 경제성장 체제는 전환되었지만, 취업난과 인재난의 공존, 우수인력의 이공계 기피, 수도권-지방과 대-중소기업의 인력 양극화 등 과학기술인력과 관련된 문제들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글로벌 기술경쟁이 더욱 심화되는 환경을 고려할 때 이제는 산업현장과 교육현장이 함께 인재의 육성과 활용에 참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제 제기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가 우리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해방 이후 우리 경제 발전 과정을 돌이켜보면 천연자원이 부족한 국가에서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놀라운 성장을 달성한 주역은 과학기술인력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한 산업인력과 기능인력의 공급은 최우선 과제였으며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과학기술인력은 양적인 증가와 질적인 성장을 함께 이루어 갔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으로의 패러다임 전환과 함께 창의적 인재의 중요성은 높아갔지만 우리 과학기술인력정책은 오히려 여러 측면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우수학생들의 이공계 지원 감소로 촉발된 소위 ‘이공계 위기’는 지난 10여 년간 다양한 부문으로 확대되어 지금은 고질적인 사회적 문제로 자리 잡았다.
제조업 기반 성장이 정체되면서 고용 창출력도 저하되어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한 가운데 중소기업은 오히려 적합한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는 구인난을 호소하고 있다.
대학 진학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고 대학 졸업생 중 이공계 비율도 주요국 대비 훨씬 높지만 수준급 엔지니어의 공급 정도에 대한 국제 비교 결과는 조사 대상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수도권과 지방의 인력 수급 격차도 심화되고 있으며 고급인력이라 할 수 있는 석·박사 인력 노동 시장의 여건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정부와 기업, 대학의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인력의 문제가 우리 경제와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와 함께 얽혀 있어 어느 한 부문에서 다루어지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인력을 양성하면 석·박사급은 연구개발 인력으로, 학사급은 산업기술 인력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단순한 도식은 산업현장에서 이제는 거의 무의미한 구분이며, 양성된 인력의 경력 경로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해지고 있다.
사회적 토대의 구성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고 과거에 서로 무관하게 발전해 온 다른 분야와 결합하는 속도도 현저히 빨라짐에 따라 과학기술은 전통적 경계를 넘어 서비스, 문화, 예술 등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지만 교육의 틀은 여전히 전통적 경계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초고령화 시대의 도래와 인구구조의 변화, 잠재성장률 하락 등 우리의 당면 과제를 고려할 때 과학기술인력정책의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전환 없이는 인공지능과 제조업 혁신, 4차 산업혁명이라는 세계적 흐름에 적응하여 과거와 같은 성장을 이루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예측일 것이다.
이에 이번 특집에서는 우리 과학기술인력정책과 산업인력정책의 지난 성과와 한계를 요약하고 새로운 이공계 인재정책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과거 추격형 경제 체제와는 달리 미래 기술혁명 시대를 선도할 산업인력의 양성은 산업과 교육 현장이 함께할 때 가능하며, 과학기술인력을 경제성장과 혁신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모든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간주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과학기술인력정책과 산업기술인력정책의 성과와 한계
경제성장 단계에 따라 시기별로 필요한 과학기술인력의 수요는 변화하였으며 인력정책의 초점도 이에 따라 진화하였다.
경제개발 초기 단계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각각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한 현장 기술자가 사회적 수요의 중심이었다.
산업의 고도화와 함께 점차 전문성을 지닌 과학기술인력과 연구개발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1980년 대부터 우리나라 자체의 고급 과학기술인력 양성 체계가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즉,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력정책은 기본적으로 산업 및 경제정책의 하위 계획으로 자리매김하였다가 고급 인력에 대한 중요성과 사회적 수요가 늘어나면서 독립된 정책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변화에 대한 대학과 기업체의 대응 속도를 고려할 때 대학에서 양성된 인력이 산업구조의 변화와 수요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지적은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 급격한 기술의 변화에 따라 더욱 부각되고 있지만 1990년대부터 산업 현장의 기술인력부족과 대졸 인력의 대량 실업 상태가 공존하고, 대기업의 비교적 안정적인 인력 상태에 비해 중소 제조업체의 인력 부족 현상은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있었다.
게다가 1997년의 외환위기는 인력정책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쳐 이공계 인력의 직업 안정성 문제와 위상 저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가과학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이공계 지원특별법’(2004년)을 제정하고 이공계 인력의 육성과 활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1990년대부터 제기된 많은 현장의 문제들은 해결은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특히 국가 혁신의 허리 역할을 담당할 중소기업의 인력 문제는 가장 심각하다.
사실 인력과 관련된 이슈들이 모두 인력정책 내부의 개선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회·경제적 요인, 문화적 요인, 거시경제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게다가 산업정책, 노동정책, R&D정책, 교육정책 등 많은 정책 부문에서 다양한 사업들이 각기 독자적인 목적 하에 추진됨에 따라 이공계 인력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도 현실이다.
과학기술인력정책과 산업기술인력정책의 한계는 정량적이 아니라 정성적 측면에 있으며 많은 문제가 최근에 대두된 것이 아니라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된 문제라는 점에 더 심각성이 있다.
이는 보다 근본적인 시각 및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인력정책은 중장기 경제성장 전망과 기술전망을 통해 분야별로 필요한 인력을 석·박사-학사-전문학사급으로 예측하고 이를 대학과 대학원을 통해 양성하여 공급하는 체계에 근거해 있다.
인적자원(Human Resource),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는 용어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는 전적으로 인력을 경제성장이나 기술혁신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사고는 성장 하락과 일자리 침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급변하는 기술혁명과 사회경제적 환경 변화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
다음 글에서 소개될 2000년대 이후 정부의 투자가 집중된 나노기술 분야를 예로 들어보면, 정부의 직접 투자 증가에 의해 나노 관련 학과가 2배 이상 증가하고 석·박사 졸업생 수도 연평균 17% 이상 증가하였지만 전공을 살려 나노 분야에 취업하는 학생의 비율은 13% 수준이며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 산업현장에서의 필요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실제 취업과 이직 등 노동 시장에 참여한 이후에는 전공 분야의 지식 활용보다는 고용 안정성이나 보수 등의 문제가 더욱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전문인력의 과도한 공급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국가연구개발사업 참여를 통해 교수들과 학생들은 직무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이 향상되는 것으로 느끼고 있지만 실제 현업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인력들은 산업현장을 경험할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과제 수행을 통해 가장 향상된 역량은 직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단지 문서를 읽고 작성하는 능력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연구개발 지원을 기반으로 한 고급인력 양성 정책의 수요와 공급 간 괴리가 매우 심각함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박사 노동시장에 관한 한 조사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박사 학위자들에게 현재 자신이 맡고 있는 일자리에 필요한 최소 학력 조건이 무엇인가, 그리고 현재 일자리에 필요한 학력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1980년대에 학위를 취득한 박사들은 70% 이상이 박사학위가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응답한 것에 비해 최근에 학위를 취득한 박사들은 불과 24.5%만이 박사학위가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응답한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박사 인력의 3/4 가량은 굳이 박사학위가 필요 없는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 인재 육성의 방향이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미래 이공계 인재 육성의 방향
인재를 육성하기까지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므로 수요와 공급은 항상 불일치하기 마련이며 이는 인력정책의 근본적 한계라 할 수 있다.
재직자 교육이나 맞춤형 학과처럼 기업의 요구가 직접 반영되지 않는한, 대학이 산업과 기술의 변화에 따라 신속하게 필요 인력을 공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목표라 할 수 있다.
또한 인력의 부족 또는 과잉은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업이 인력을 채용하고자 하나 적절한 인력을 찾을 수 없는 경우뿐 아니라 과거에 비해 급여가 훨씬 높아진 경우에도 인력의 부족 현상은 나타나며 이는 공급을 늘림으로써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공계 인력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노동시장에 대해 일정 부분 정부의 개입은 필요하다.
그러나 강조한 바와 같이 2000년대 이후 이공계 인력의 문제는 수급구조가 정부 주도의 공급 위주에서 기업과 수요자 시각이 반영된 시장 메커니즘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급변하는 산업 환경 하에서의 미래 인재육성은 교육기관만의 과제가 아니라 산업현장과 교육기관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
기술의 변화 속도가 빨라 학교 교육에서 익힌 지식보다는 산업현장에 진출한 이후에 배우는 지식과 기술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 소개될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의 자체적 교육 시스템을 통한 창의적 인재 기반의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자체적 양성 시스템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강조되는 지식은 특정 기술분야의 전문지식만이 아니라 이종 분야 지식 간 융합역량과 협업 능력, 의사소통 능력, 그리고 기업가 정신이다.
따라서 이공계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요구되며, 무엇보다 양성 이후 현장에서의 성장이 더욱 중요하므로 이공계 인재정책의 초점도 양성 중심에서 활용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노동 시장에서는 학교 졸업 이후 취업보다는 취업 이후의 이직과 경력 경로 변화가 더욱 핵심이므로 우수인재나 여성, 고경력자 등 인적자원의 관리 체계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재직자의 경력개발 지원 및 관리 등 평생교육 관점의 활용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이공계 인재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은 사회의 수요와 거리가 먼 대학의 과제수행보다는 기초지식의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본적인 교육비 지원을 중심으로 하고 국가연구개발사업에서도 우수한 논문의 생산보다는 산업현장의 수요에 부합하는 연구과제의 비중을 더욱 늘려야 한다.
기업의 노력도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중소·중견기업이 당장 직원에게 제공할 수 있는 보상은 대기업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수 인력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급여가 아니라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톡옵션이나 우리사주 등 경제적 보상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경력과 역량 개발의 비전을 통해 장기근속과 몰입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연구개발에 필요한 인력과 재원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는 핵심 역량에만 집중하는 대신 외부와의 협력을 더욱 늘려야 한다.
이러한 협력의 코디네이터로서의 역량은 대기업보다는 중소·중견기업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며 이를 통해 경쟁력 있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비전을 연구개발 인력에게 제공하여야 한다.
기업의 문화도 수직적 위계보다는 창의성을 존중하는 개방적인 조직 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직무발명제도 등을 통해 창의적 성과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과 기술의 융복합화, 글로벌 경쟁 체제를 고려한다면 우수 인력의 양성이 우리의 생존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 작업을 시작으로 로봇과 인공지능으로의 대체가 빠르게 일어날 것이며 대신 창의적 직업군의 근로자에 대한 수요는 크게 증가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필요한 인재의 양성은 대학이나 정부의 변화만으로는 이루기 어렵고 연구계와 산업 현장의 기업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