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과학기술인력정책의 변화와 미래 방향
▲ 변순천 선임연구위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우리나라는 정부의 강력한 산업·경제정책과 이를 뒷받침해 준 과학기술인력정책 덕분에 고도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 주도 및 공급자 중심의 인력정책 성공신화가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글에서는 4차 산업혁명, 인구 절벽 시대 등 우리가 직면한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과학기술인력정책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들어가면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인력정책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산업구조 변화에 발맞춰 대학교육을 중심으로 공진화해 왔다.
하지만 2000년대에 이르러 정부 주도의 인력양성정책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이공계기피, 고급인재의 해외 유출 등 과학기술인력의 수급 불균형 현상이 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2004년도 정부는 이공계지원특별법을 제정하여 이공계 인력 육성·지원 기본계획 수립 등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양성, 활용 및 지원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정권의 이념과 철학에 따라 과학기술인력정책도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되고 있는 환경 변화와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절벽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과학기술인력정책은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 글에서는 과거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인력정책을 연대별, 정권별로 정책의 패러다임 변모과정을 회고해 보고, 미래사회에서 요구되는 과학기술인재를 양성하고 이들의 지속적인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004년 이공계지원특별법 이전의 과학기술인력정책
우리나라 과학기술인력정책은 2004년도에 제정된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한 이공계지원특별법(이하 ‘이공계지원특별법’)을 기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공계지원특별법 제정 이전에는 경제정책 또는 과학기술정책의 하위 부문으로 귀속되었던 반면, 제정 이후에는 독립정책 영역으로 분화하였기 때문이다.
초기 과학기술인력정책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정책과 공진화해 왔다. 특히, 1960년대 및 1970년대는 농업에서 경·중공업 중심으로 경제정책 기조가 변화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 및 기능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직업훈련제도의 기틀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으며 수급 전망 등을 토대로 양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공급 중심의 양성 정책이 주류를 이뤘다.
산업 기술 및 기능인재 양성을 통해 단기적으로 수출주도의 경공업과 중공업을 부흥시켰으며, 동시에 재외 한인과학기술인 유치 사업 등을 통해 중장기적으로는 연구원 등 핵심 과학기술인재 유치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또한 과학기술인력 양성 및 지원을 위해 한국과 학재단 등 지원 기관을 설립하고 과학기술처에 인력계획관 등을 두면서 과학기술행정체계 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기본적으로 산업정책의 하위계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가 육성하고자 하는 산업이 과거 경·중공업에서 반도체, 자동차, 휴대전화 등 첨단 산업으로 이동했다는 점이 차이라 할 수 있다.
첨단 산업 육성을 위해 석·박사급 인력이 중요해짐에 따라 핵심 정책 대상도 연구개발 인력중심으로 이동하였으며, 외국인 석학 유치 사업과 박사 후 해외연수 지원 사업 등 두뇌순환 정책도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과학기술인력정책의 범위가 넓어지고 다양해지면서 정책 간 갈등과 충돌을 조정하기 위한 인력정책심의위원회가 설립되는 등 행정체계 기능도 다변화되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과학기술인력정책은 경제정책의 틀에서 벗어나 독립된 정책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2002년 과학기술 분야 최상위 정책인 제1차 과학기술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거시적인 정책 틀이 구상되기 시작되었고 과학기술인력은 이 계획의 부문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2004년에는 제1차 여성과학기술인 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인력 대상별 독립 계획도 이 시기에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부터 2004년까지 과학기술인력양성을 위해 정책 기반을 다지고 산업 및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견인한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폐해도 존재했다.
예를 들면, 1995년 5.31 교육개혁(대학 설립 준칙주의)으로 인해 경쟁력 없는 대학이 난립하면서 결국 노동시장 내 과학기술인력의 처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이공계 진학을 기피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
이공계지원특별법 이후부터 현 정부까지의 과학기술인력정책과 도전과제
이공계 인력 공급 확대 정책으로 인해 이공계 기피현상이 본격화됨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2004년 12월 이공계지원특별법을 제정하여 우수 학생의 이공계진학을 촉진하고 이공계 인력을 보다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동법에 따라 2005년 이공계 기피현상 해소 및 처우 개선을 목표로 명실상부한 이공계 인력 최상위 법정계획인 ‘제1차 이공계인력 육성·지원 기본계획(2006~2010)’이 수립되었다.
제1차 계획에 서는 이공계 대학교육 혁신, 핵심 연구인력 양성, 수요지향적 인재 양성, 이공계 인력 복지 지원, 이공계 인력 인프라 지원 등 5대 중점 추진과제를 제시하였다.
제1차 계획은 과학기술인력 육성·활용을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 마련과 과학기술인력의 양적 확대라는 성과는 있었으나, 전략목표에 대한 구체성이 낮고 과학기술인력의 배분 및 활용 정책은 미흡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정부는 이공계인력 종합계획과는 별도로 여성과학기술인 및 과학영재 육성을 위한 부문 계획을 수립하는 등 인재 그룹별 정책 수립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과학기술인력 관점에서 가장 큰 이슈는 교육과 과학의 통합이었다.
교육부와 과기부가 교육과학기술부로 통합되어 출범하였고 당시 정부의 이념과 철학에 따라 정책대상 범위는 초·중등까지 확대되어 제2차 과학기술인재 육성·지원 기본계획(2011~2015)이 수립되었다.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 흥미, 잠재력을 높이기 위한 융합인재교육(STEAM) 등 5대 영역별 과제가 중점적으로 추진되었다.
제2차 기본계획 기간동안 과학기술인력 육성 지원 정책에 총 14조 4,322억원이 투자되어 제1차 기본계획 투자 대비 106% 증가했으며, 이공계 박사 배출 및 경제활동인구 1천 명당 연구원 수 등 인력양성 측면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청년 일자리 수급 불일치, 교육과 노동시장의 괴리 등 사회 변화 대응에 미흡하였고 제1차 기본계획과 마찬가지로 초·중등, 대학(원) 중심의 인력양성에 초점을 맞춘 정책 수립으로 입직 단계와 노동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재직 단계에서의 활용정책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저조하였다.
이에 이공계 졸업자의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한 이공계 르네상스 5대 희망 전략이 별도로 추진되기도 하였다.
2013년도에 출범한 박근혜 정부의 인력정책은 일자리·창업, 중소기업 인재 유인, 능력·역량, 융합인재, 여성·해외 인재 등 5개의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
2013년도에 수립된 ‘창조경제를 견인할 창의인재 육성방안’은 현 정부의 인재정책 철학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비법정 계획으로 창의인재의 핵심 역량을 제고하기 위하여 꿈·끼, 융합·전문, 도전, 글로벌, 평생학습 등 개인의 성장에 초점을 둔 5대 역량 중심의 Five-jump 전략을 제시하였다.
이 밖에도 ‘해외 우수인재 유치 방안’ 등 30여 개의 정부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글로벌 시대, 도전하는 과학기술인재 육성을 비전으로 제시한 ‘제3차 과학기술인재육성지원 기본계획(2016~2020)’이 수립되었다.
제3차 계획은 일자리 미스매치 해소 등 미래 과학기술역량 확충을 위해 시급히 대책이 필요한 문제 중심으로 설계되었고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 등 미래 환경 변화를 감안한 시의성 있는 중장기 과학기술인재정책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본 계획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 인재 양성 정책에 편중되었던 정책방향을 양성, 배분, 활용 등 균형적 정책으로 전환하고, 전문지식 중심의 양성 정책은 능력·역량 중심으로, 소극적인 일자리 연계 정책에서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 정책으로, 안정적인 연구·근로환경 개선에서 재직자의 도전적 성장환경 구축으로 정책의 중점을 두고자 한 점이다.
2004년에 제정된 이공계지원특별법을 계기로 과학기술인력정책은 독립된 정책 영역으로 분화하면서 발전을 거듭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매우 심각하다.
청소년의 수학·과학에 대한 흥미도는 여전히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고, 대학은 산업체에서 요구하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공계 졸업자는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안정적인 직장만을 선호하고 있으며, 재직 과학기술인은 자신의 전문성을 향상시키고 활용할 기회가 많지 않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능력보다는 스펙·학벌 중심의 사회이고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배타적인 국가이다. 한편, 과학기술인력정책을 둘러싼 미래 환경도 매우 도전적이다.
당장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생산가능인구는 2016년 72.9%(3,704만 명)을 정점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데 반해, 고령인구는 2030년에는 1,269만 명(24.3%)으로 2010년 대비 2.3배, 2060년에는 1,762만 명(40.1%)으로 3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화의 진전으로 글로벌 인재 확보경쟁은 더욱 심해지고 국제 노동시장의 확대 및 유연성이 높아져 국가 간 고급인재의 이동 장벽은 낮아질 전망이다.
다만, 여성의 교육과 경제활동 참여 증가로 인해 인력의 다양성과 잠재인력 활용 기회는 확대될것이며,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과학기술의 발달과 기술·산업의 융복합화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향후 정책 방향
과거 정책 경험으로부터의 교훈과 현재 직면한 현안 및 문제점에 대한 냉철한 성찰,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 환경 변화 전망을 바탕으로 5대 정책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지식 중심의 이공계 교육에서 역량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미래에는 특정 과학기술 분야에서 만의 전문 지식이 아닌 이종 분야 지식 간의 융합 역량이 더욱 중요하다.
즉, 과학기술인력의 문제해결 능력, 팀워크 및 협업 능력, 의사소통 능력 등 지식을 생산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시켜 줄 수 있도록 이공계 교육방식의 최신화 및 다양화가 필요하다.
둘째, 과학기술인력의 양성 중심에서 활용 중심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이 이동해야 한다.
다가올 인구 절벽시대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내·외 과학기술인적자원개발 및 관리 체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해외 우수인재, 여성·고경력 과학기술인 등 잠재인력의 활용을 극대화하고 재직자의 경력개발 지원 및 관리 등을 통한 평생교육 관점의 장기적인 활용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외국인 전문 인력 중심의 중장기 한국형 이민정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셋째, 과학기술인 개인의 내재적 동기에 기반한 인적자원관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간 과학기술인 동기부여 정책은 처우 및 복지 등 외생적 동기요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동기부여 이론과 창의성 이론에 따르면 창의적 성과는 직무와 관련된 내재적 동기요인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학기술인이 희망하는 경력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개인의 경력개발 성과가 조직의 창의성과 혁신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넷째, 과학기술인력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기술·산업 간 융합과 그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점점 더 복잡다기해지고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 분야 전공, 경력 등 기능적 다양성(Functional Diversity)과 여성, 해외 인재 등 사회 범주의 다양성(Social Category Diversity)을 포용할 수 있는 정책과 사회문화가 조성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창의성을 중시하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교육·연구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다양성이 창의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에서 다양성이 창의성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창의성을 존중하는 개방적인 사회·조직 문화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끝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은 미래 일자리 지형을 크게 요동치게 할 것이며, 미래 인재에 요구되는 역량도 빠르게 변화시킬 것이다.
반복적 단순 작업 중심의 직무와 직종은 로봇으로 대체되고 과학기술, 예술 등 창의적 직업군 근로자에 대한 수요는 크게 증가할 것이다.
대학 등 특정 주체의 변화 노력만으로는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 인재를 양성할 수 없다.
초·중·고, 대학, 산업계, 연구계 등 과거 주체별로 분절된 인재 양성과 활용 정책 기능을 일체화(Triple Helix for HRST)하여 공동으로 미래 과학기술 인재상을 만들어가며 공감하는 체제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과학기술인력정책은 궁극적으로 과학기술인이 꿈꾸는 자아실현을 통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지속적인 성장을 돕고 지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