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관찰과 다양한 경험이 주는 세렌디피티 - 혁신
▲ 심상배 대표이사 (주)아모레퍼시픽
여러분은 우리가 오늘날 친숙하게 접하는 바닐라에 얽힌 이야기를 아십니까? 바닐라는 흔히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에 많이 첨가되며 심지어 콜라에도 들어가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향신료입니다.
고급 향수와 화장품에도 사용되는 등 그 쓰임새는 정말 다양합니다. 그런데 사실 바닐라는 귀하디 귀한 식물이었습니다.
경작하기가 어려워 원산지인 멕시코에서도 1년 생산량이 1~2톤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데다, 스페인 사람들이 이를 유럽에 들여오려 시도했지만 바닐라는 유럽에서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귀중한 대접을 받았죠.
그런데 19세기 중반, 어떤 계기를 통해 바닐라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는 아프리카 동쪽 프랑스령 식민지 섬인 레위니옹에 살던 에드몽이라는 흑인 노예 소년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300여 년 동안 유럽의 석학들이 풀지 못한 바닐라 수정의 비밀을 풀어냅니다.
학교 한 번 다닌 적 없는 이 12살의 소년은 주인 가족의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농장 주인은 식물재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바닐라 덩굴을 가져와 키워보려 했지만 역시나 실패를 거듭했죠.
그러던 어느 날, 농장에 심어진 바닐라 덩굴을 발견한 에드몽이 바닐라를 수분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바닐라 꽃잎을 뒤로 젖힌 다음 대나무 가지로 자가수정을 방해하는 부분을 들어 올린 뒤, 화분을 품고 있는 꽃밥과 함께 화분을 받아들이는 암술머리를 부드럽게 모아 쥐면 바닐라 꽃이 자가수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죠.
에드몽은 농장 주인이 일전에 수박 꽃의 자가수정에 성공했던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닐라에 적용해 본 것입니다. 바닐라의 자가수정에 성공한 에드몽은 농장을 찾아다니며 다른 노예들에게 바닐라를 수분시키는 비법을 전수했습니다. 이것이 확산되어 레위니옹 섬은 바닐라 재배지로 주목받게 됩니다.
프랑스인들은 에드몽이 발견한 이 방법을 ‘르 제스트 데드몽(Le geste d'Edmond)’ 즉 ‘에드몽의 손짓’이라고 부르는데, 바닐라 수분에는 지금도 여전히 이 방법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에드몽의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작곡을 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창의적인 활동을 할 때 우리는 소위 ‘유레카’를 외치는 마법의 순간이 온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적 행위는 마법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창조적 능력을 많은 생각과 도전을 통해 가능성으로 연결하는 것이죠.
창조성은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마법 같은 힘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 태어난 특질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창의적’이라고 말하는 행위와 생각은 선천적이고 평범하며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와 혁신의 출발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시작합니다.
창조에는 수많은 경험과 관찰이 필요합니다. 실험을 통해 실패도 해보고 다른 이의 의견도 구해봐야 합니다.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를 이어가다 보면 관찰과 경험이 쌓여 비로소 ‘창조’할 수 있게 됩니다.
바닐라의 인공수정도 마구잡이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발상을 전환하고 시도한 것이 혁신이라는 결과를 창출한 것입니다.
지금은 낯설지 않은 화장품이 된 쿠션 제품을 개발할 때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선크림을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사용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사용시 겪는 어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끊임없이 관찰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양한 기능을 가지면서도 휴대와 사용이 간편한 화장품을 만들 수는 없는지, 이런 장점을 모두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제품을 구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습니다.
오랜 시간 관찰과 고민을 거듭한 연구원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주차 확인 스탬프’였습니다.
묽은 잉크를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함유하고 있으면서, 또 쉽게 도장에 옮겨져 균일하게 주차 티켓에 찍히는 스탬프는 연구원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이를 잘 응용해 저점도의 유화제형을 안정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해 현재의 쿠션제품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스펀지에 화장품이 함침된 이 낯선 형태의 제품이 오늘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혁신은 꾸준한 관찰과 경험이 주는 뜻밖의 발견, '세렌디피티(Serendipity)'에서 시작됩니다.
주위의 사소한 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을 해 보십시오. 그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아이디어와 영감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