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플러스 - 실제 세계를 꿈꾸는 가상현실
과학기술 플러스는 최근 이슈가 되는 과학 기술 및 연구, 과학발전사 등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글_ 이성규 과학칼럼니스트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깨어보니 본래의 나였다. 꿈에서 깬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장자’의 ‘제물론편’에 나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에 대한 일화다.
1999년에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 분)도 장자처럼 생생한 꿈을 꾼다.
아니, 그의 꿈은 호접지몽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다.
그가 맛있게 먹는 스테이크를 비롯해 집과 직장이 모두 현실이 아닌 가상이다. 그 가상의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사랑한다.
그는 미래 세계에 지구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인공지능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에서 의식만으로 살아간다.
매트릭스란 프로그램이 어찌나 사실적인지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이 가상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사실 가상현실이라는 기술이 추구하는 원래 목표가 매트릭스와 같은 ‘원격현전’이다.
원격현전이란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조성한 어떤 환경 속에서 실재하고 있음을 경험한다는 의미다.
즉, 가상현실은 컴퓨터 기술을 이용해 사용자가 실제 공간처럼 몰입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상호작용적인 기술 및 콘텐츠를 총합해 일컫는 개념이다.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이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물건과 공간을 말한다면,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은 실제의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가상의 정보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AR은 구글 글래스처럼 현실에다 새로운 가상의 물체나 정보를 겹쳐서 보여주는 기술이라고 보면 된다.
이처럼 VR과 AR은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컴퓨터를 통해 만들어진 가상의 정보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동일 범주로 보는 경향이 크다.
많은 언론들이 올해를 가상현실(VR) 산업의 원년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만큼 가상현실 관련 기술 및 디바이스들의 출시가 풍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페이스북에서 출시한 오큘러스 리프트와 HTC에서 출시한 바이브다.
이 기기들은 마치 눈앞에서 실제 상황처럼 펼쳐지는 가상현실 세계를 보여주는 헤드셋으로서, 게임을 좋아하는 열성 팬들에게 큰 환영을 받고 있다.
사실 가상현실의 응용 분야는 게임뿐만 아니라 무궁무진하다.
지난해 11월 미국 뉴욕타임스의 정기구독자들에게는 신문과 함께 ‘구글 카드보드’가 배달됐다.
구글 카드보드는 판지로 만든 저가형 가상현실 안경으로서, 착용한 채 몸을 회전하면 영상도 360도 회전하며 펼쳐진다.
뉴욕타임스가 이 안경을 무료로 지급한 것은 가상현실 저널리즘에 대한 실험 때문이었다.
독자들은 이 안경을 쓴 채 부모와 헤어져 악어가 우글거리는 늪을 통과해 배를 타고 조국을 탈출하는 아프리카 및 중동의 난민 아동들에 대한 뉴스를 마치 현장에서 체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우울증이나 공포증, 통증 등의 질병 치료에도 가상현실 기술이 접목되고 있다.
공포증 환자의 경우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위험한 상황의 재현을 통해 구체적인 행동과제를 부여하면서 공포증을 가진 대상에 대한 잘못된 시각과 해석을 수정해 나가는 인지적 행동치료가 매우 중요하다.
이때 과거 상황을 정확히 재현해 내는 문제를 가상현실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올해 초부터 가상현실을 통해 우울증의 치료 실험을 하고 있는 영국 런던대학에서는 공포증에 대한 과거 상황 재현 역시 가상현실로 해결하기 위해 연구 중이다. 또 레딩대학에서는 통증 치료에 가상현실 치료를 도입하는 시도를 구체화하고 있다.
그밖에도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인지 능력 측정이나 녹내장 등의 신경질환 치료에 가상현실을 도입하는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최근 출시된 VR 헤드셋은 시각과 청각만으로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기기다.
그런데 시각과 청각만이 아닌 온몸으로 가상현실을 느낄 수 있는 패키지 형태의 시스템도 개발되고 있다.
미국의 스타트업인 ‘AxonVR’이 옷처럼 입을 수 있는 가상현실용 수트와 공중에 뜨는 형태의 외골격 시스템을 조합하여 개발 중인 신개념 VR 시스템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시스템은 외골격에 의해 몸이 공중에 뜬 상태에서 수트 및 디스플레이가 제공하는 가상현실을 통해 산을 오르거나 운동장을 달리는 등의 상황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AxonVR’의 개발이 완료될 경우 극한의 스포츠를 안전한 상황에서 생생하게 즐기거나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재난 상황을 재연해 실제 재난이 발생했을 때의 대처 방법을 배우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2018년 2월에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전 세계인들이 VR 영상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경기 장면을 고화질 360도 VR 카메라로 촬영해 5세대 이동통신 시범망 등으로 실시간 중계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선수가 착용한 헬멧에 초소형 카메라와 데이터 송신기를 달아 선수 시점에서 촬영한 중계 화면도 앱으로 생중계될 계획이다.
또한 스키점프나 스노보드 등의 경기장을 VR 시뮬레이터로 구현해 일반인도 평창올림픽 코스를 원하는 방향과 각도에서 가상체험을 할 수 있다.
지난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개발자 컨퍼런스 ‘F8’ 행사에서 10년 로드맵을 발표한 페이스북은 가상현실 및 증강현실을 향후 기업을 이끌어갈 차세대 플랫폼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로 꼽았다.
페이스북이 VR에 집착하는 이유는 미래의 소셜 기능이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글과 사진만 공유하는 소셜 미디어 대신 하나의 가상공간에 모여 함께 식사도 하고 토론도 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세계 최대 e커머스업체인 중국 알리바바도 ‘VR 실험실’을 설립하고 VR 개발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가상현실 속에서 고객이 직접 옷을 고르고 냉장고를 사는 등의 VR 쇼핑을 구현시키기 위해서다.
시장조사기관 디지캐피털이 올해 초에 발간한 ‘2016 VR․AR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해 VR과 AR에 투자된 자금 규모는 6억 8,600만 달러(약 8,200억 원)에 이른다.
VR과 AR에 대한 투자액은 지난해부터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작년 4분기 투자액은 전년 2분기의 6배에 달했다.
2020년에는 기기 보급과 함께 이를 활용하는 콘텐츠 및 플랫폼의 확산으로 VR과 AR 시장의 매출 규모가 1,200억 달러(약 144조 원)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 가상현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네오는 한탄처럼 내뱉었다. ‘무엇이 현실인가?(What’s real?)’라고.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도 네오나 장자처럼 자신에게 되물을지 모른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가상현실인가 아니면 실제 세계인가?’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