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문화 - 인간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감각 전시기술
과학과 문화는 과학과 인문, 사회, 문화, 예술 등을 접목,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학기술 이야기를 다룹니다.
글_ 임동욱 연구교수(한국외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천재 이세돌이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알파고(AlphaGo)에게 패배했다.
2016년 10대 뉴스를 꼽는다면 반드시 들어갈 사건이다. 어쩌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사람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 IBM의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는 체스 세계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를 꺾었고, 2011년 IBM의 또 다른 슈퍼컴퓨터 왓슨(Watson)은 인터넷 연결망 없이 퀴즈쇼에 출전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렇다고 이번 알파고 사건의 충격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한정된 데이터만을 처리하는 체스와 퀴즈와 달리 바둑은 무한에 가까운 변수를 계산해 창의성을 발휘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컴퓨터에 왕좌를 내주는 바람에 최근 우리 사회는 미래사회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디스토피아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한편 컴퓨터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의 혼란은 오래 전부터 예견되어 왔다.
미국 사학자 브루스 매즐리시(Bruce Mazlish)는 1993년 ‘불연속’ 개념을 통해 비슷한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기존의 패턴을 따라가지 않는 파국적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예측하지 못한 인류가 연속성의 단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가진 기계의 등장이다. 사람처럼 움직이는 로봇, 사람처럼 생각하는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더 이상 기계를 마냥 우직하게 반복하는 존재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불연속을 일으킨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이득보다 더 많은 해악을 끼치는 존재인가.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적인 것들이 설 자리를 잃고 삭막한 세상이 도래하는가.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만한 분야는 과연 있을까.
최근 늘어나는 ‘감각 전시기술’을 통해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라앉히고 인간의 생활과 창조성에 도움을 주는 모범적 사례를 찾아보자.
감각 전시기술은 말 그대로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를 극대화시킨 전시기법을 가리킨다.
인간의 감각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 5개로 구분되며 하나의 자극으로 다른 감각기관이 영향을 받는 공감각이 포함되기도 한다.
전시(Exhibition)는 특정 주제나 테마에 맞게 여러 물품을 진열해서 구경하게 만드는 행위를 가리키므로 기본적으로 시각이 포함된 개념이다.
최근 시각적 요소를 강화하거나 시각 자체를 왜곡시키는 방식의 전시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몰입형 전시(Immersive Exhibition)다. 몰입은 관람객이 특정한 상황이나 행위에 매혹되거나 집중한 나머지 외부요소에 대한 주의력이 느슨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허구 또는 가상의 세계를 마치 현실인 것처럼 느끼게 하려고 전시물 이외의 요소를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관 내부를 어둡게 하고 특정 물품에만 빛을 비춰서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화면의 크기를 시야 전체로 확대시켜서 오로지 영상만 바라보게 하는 아이맥스(IMAX) 기술이나 유명 화가의 작품을 초고해상도(UHD) 화질로 벽면 전체에 영사시키는 프랑스의 ‘빛의 채석장(Carrières des Lumières)’ 전시기법도 이와 비슷하다.
최근에는 머리에 쓰는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HMD) 형태의 가상현실(VR) 장치들이 몰입형 전시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의 살바도르 달리 전시관(Salvador Dali Museum)은 가상현실로 즐기는 전시 서비스 ‘달리의 꿈(Dreams of Dali)’을 올해 초 시작했다.
오큘러스 리프트(Ocululs Rift)라는 가상현실 장치를 쓰고 고개를 돌리면 달리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조형물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기기를 이용한 몰입형 전시도 지속적으로 개발되는 중이다. 프랑스 북서부 소도시 플레르를 방문할 때는 ‘버추얼 플레르(Flers Virtuel)’ 앱을 설치해야 한다.
거리를 거닐면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들어 올리면 화면 속에는 지금 보이는 거리의 100년 전 모습이 등장한다.
곳곳의 관광명소를 돌아다니며 19세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사람이 아닌데도 진짜와 똑같은 입체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홀로그램(Hologram) 전시도 시각을 이용한 기술이다.
미국 일리노이주 홀로코스트 교육센터(Illinois Holocaust Museum)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학살에 희생된 유태인 피해자를 홀로그램으로 등장시켰다.
무대 위 의자에 앉아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실제 생존자를 홀로그램으로 되살린 입체영상이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인터랙션 기능까지 갖췄다.
감각 전시기술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관람객의 체험을 극대화시키는 ‘감각 강화’로서 위에서 소개한 몰입형 전시가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의 감각기능에 이상이 있는 장애인들의 예술 향유를 돕기 위한 ‘감각 대체’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지면서 미술작품을 즐기게 한다거나, 다리가 불편한 관람객이 로봇을 대신 보내 전시물을 구경하는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은 2015년 한 해 동안 ‘터칭 더 프라도(Touching the Prado)’라는 특별한 전시회를 진행했다.
6점의 명화를 복제하되 색깔과 모양에 따라 앞으로 튀어나오는 정도를 달리하는 부조 기법을 적용해 시각장애인을 초대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모나리자,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려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안토니오 다 코레지오(Antonio da Correggio)의 명화 ‘만지지 말라(Noli Me Tangere)’,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불카누스의 대장간을 찾아온 아폴로(Apollo in the Forge of Vulcan)’ 등 6개 작품이 특수 제작되었다.
덕분에 시각장애인들도 미술관을 찾아와 손으로 만지며 명화를 감상하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또 눈물을 흘렸다.
박물관이나 전시관 건물 자체가 문화재라서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설치가 어려울 때는 로봇이 대신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다니기도 한다.
프랑스 서부의 우아롱 저택(Châteaud’Oiron)에서는 관람객 사이를 돌아다니며 전시물을 관람하는 로봇 노리오(Norio)를 만날 수 있다.
키 170㎝에 무게 50㎏이고 머리에는 카메라와 화면이 장착되어 있고 바닥에는 바퀴가 달려 있다.
1층에 위치한 특별실에서 장애인 관람객이 조종을 하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해 영상으로 전경을 보여주고 사람들 틈에 섞여 안내인에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공포가 번져가는 와중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오히려 사람의 감각을 확장하고 대체해 더욱 풍성한 문화생활을 만들어주는 전시기술이 확산 추세에 있다.
과학기술을 사람의 대척점에 놓지 않고 오히려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로 여긴다면 요즘의 소식들이 마냥 슬프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