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멋지다. 쎈돌! 고마워요. 톰린슨!
▲ 정진교 상무 코스닥협회 회원서비스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무 놀랐다.”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에게 첫 판을 진 후 이세돌 9단이 기자회견장에서 한 말입니다.
“우리가 달에 도착했다.” 구글 딥마인드의 CEO인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가 1국이 끝난 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입니다.
세상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둔다는 프로기사가 인공지능 프로그램에게 불계패를 했다는 뉴스는 충격이었습니다.
다음날 그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다루지 않은 조간신문을 찾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1997년 IBM의 컴퓨터 딥 블루(Deep Blue)는 체스 세계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벌써 20년 가까운 옛날의 일입니다.
하지만 바둑에서 기계가 인간을 이기려면 아직 적어도 몇 년은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바둑은 돌을 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최대 250의 150제곱에 이른다고 합니다.
지구를 포함한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수(약 10의 80제곱)를 합친 것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연산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모든 수를 다 살펴보고 최선의 수를 찾는 것이 쉬울 리 없습니다.
더욱이 바둑에는 ‘세력’과 같이 지금 당장은 수치화하기 어려운 요소도 승부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저도 인간의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한 판이라도 진다면 그게 이변일 것’이라는 ‘쎈돌’의 말을 믿었습니다.
‘쎈돌’은 바둑 두는 스타일을 반영한 이세돌 9단의 별명입니다.
입신(入神)이라 불리는 바둑 9단도 실수는 할 수 있고, 그 기회를 이용해 알파고가 한 판을 이기는 정도가 제가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면 승리는 인간의 몫이 되고, 딥마인드의 개발자들도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키우게 될 터이니 그 정도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예상 혹은 기대는 무참히 깨졌습니다. 알파고가 세 판을 내리 이겼습니다.
‘한 판 정도는 질지도 모른다’는 여유는 ‘제발 한 판이라도 이겼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알파고가 연일 화려하게 뉴스를 장식하자 SNS에는 이런 우스갯소리가 돌았습니다.
‘전국의 중3 엄마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도대체 알파고가 어디에 있는 고등학교냐고…’
데미스 하사비스는 2010년 ‘딥마인드 테크놀러지’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4년 후에 구글은 그 회사를 4억 달러에 인수하고, 회사 이름을 구글 딥마인드로 바꿉니다.
저는 업력 6년의 구글 딥마인드가 알파고를 개발하는 데 어느 정도 투자를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찾은 것이라곤 ‘최소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 원’이라는 추정뿐입니다.
구글 딥마인드의 주소조차 공개하지 않는다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거래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우리나라 기업들의 R&D 투자총액은 50조 원에 육박하고 있고, 코스닥기업들의 R&D 투자총액은 3조 원이 넘습니다.
기업들의 R&D 투자 규모와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R&D 투자의 비중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통계는 고무적입니다.
하지만 숫자가 R&D의 성과와 미래를 모두 말해주지는 못합니다. 지난 3월 6일 레이먼드 톰린슨(Raymond Tomlinson)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메일을 발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프로그래머입니다.
1971년 보스턴의 한 사무실에서 옆자리 동료에게 인류 최초의 이메일을 보내는 데 성공한 후 톰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봐,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돼. 이건 우리 개발과제가 아니거든.”
그가 ‘@’ 기호가 포함된 형태의 이메일을 만든 이유는 ‘왠지 멋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톰린슨이 회사가 정해 놓은, 따라서 통계에 잡힐 수 있는 프로젝트를 잊고 잠시 한눈을 팔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이메일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올해는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이 세계 각지의 인공지능 전문가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50%의 전문가들이 ‘2050년까지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탄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2075년까지로 시간을 더 주면 ‘가능성이 있다’는 응답률이 90%에 이른답니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조만간 인공지능에게 R&D를 맡겨야 하는 건 아닐까?’ 네 번째 대국에서 역사적인 첫 승을 거둔 이세돌 9단은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파고가 흑으로 두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흑으로 이기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니 흑으로 이겨보고 싶습니다. 5국은 돌을 가리게 되어 있는데 제가 흑을 잡고 두면 어떨지 제안합니다.”
컴퓨터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저는 박수를 쳤습니다.
‘인공’이 넘어설 수 없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살짝 엿본 기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가장 시선을 잡아끄는 R&D의 결과물 중 하나와 맞서 힘든 싸움을 하면서도 ‘R&D의 다른 이름은 도전’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인류 대표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멋지다. 쎈돌!’ 이 원고를 이메일로 전송하면서 ‘사람들의 개인적, 업무적인 소통 방법을 혁명적으로 바꾼’ 이에게도 늦었지만 인사를 보내야겠습니다. ‘고마워요. 톰린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