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나침반

자기혁신 칼럼 - 어른이 되어서도 꿈이 필요한 이유

자기혁신 칼럼은 회원사의 기업인, 이공계 연구원 등에게 자기혁신과 리프레시가 되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자기계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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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린이는 꿈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새싹인 어린이는 머지않아 줄기가 될 것이고, 우람한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새싹이 줄기가 될 생각을 하지 않으면 꽤 곤란하다. 어린이는 열매를 바라는 절대적인 꿈이 있어야 한다, 고 어른들은 입을 모은다.

위인들의 생애를 들려주고, 역사적인 롤 모델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어린이가 푸른 꿈을 품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꿈에 관한 대화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꿈이라는 새싹 대신에 즉, 아직은 열매를 맺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애매모호한 머나먼 이야기 대신에 강력한 주문의 마법이 등장한다.
 
‘일단 학생이니까 공부만 열심히 해’, ‘일단 일류 대학을 목표로 해’··· '일단'이라는 마법은 청소년기를 지나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강력한 접착제로 남는다.
 
‘일단은 취직부터’라는 접착제는 취직하고 나면, ‘일단은 돈 벌자’로 강력히 붙고, 돈이 어느 정도 모아지면 ‘일단은 결혼하고 나서’로 이어지며, 결혼하고 나서는 ‘일단은 아이들 양육’ 등으로 그 접착제의 위력을 잃지 않고 끈끈히 달라붙는다.

‘일단’이라는 강력한 주문에는 그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두 가지 이유의 배경이 존재한다. 하나는 ‘남들이 그렇게 하기에’ 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변 사람들의 의견과 시선에 무척 신경 쓰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일정한 규칙과 법, 시스템을 나름대로 정해놓고 개인이 그것에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다.

개인의 욕망이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돌출되는 사회는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믿고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만 ‘개인’이 인정된다. ‘남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면 저도 모르게 안심한다.
 
‘현실적’이라는 강력한 방패는 꿈, 비전, 머나먼 목표의 창을 모두 물리칠 수 있다. 어릴 때 품었던 꿈은 세월이 흐르면 그토록 허무하게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남들이 그렇게 하기에, 라는 접착력은 ‘현실적’이라는 강력한 파트너를 만나 오랜 시간 굳건히 유지된다.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하지만 그 접착력도 힘을 다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왠지 공허하다는 느낌이 찾아온다.

난공불락의 요새에 빈틈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재빨리 빈틈의 수리 작업에 돌입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똑같이 빈틈을 수리할 방법을 택한다.
 
‘그런데, 먹고 살기가 빠듯해서’, ‘그런데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 돈이 없어서’, ‘그런데 나이가 많아서’, ‘그런데 부모가 아파서’, ‘그런데 자격이 없어서’···.

‘그런데’라는 빈틈 수리 작업은 만병통치약과 비슷하다.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몇 시간이고 장황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널려 있다. 반면에 꿈을 열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드물다.

대개의 사람들은 뜨뜻한 아랫목에서 엉덩이를 떼고 찬바람 쌩쌩 부는 길거리로 나가지 않는다. 꿈을 계속 유지하기란 사실 버겁다. 그 중에는 꿈의 돛단배를 타고 한 발자국 전진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곤란, 역경, 파도를 만나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돛단배는 쉬이 부서진다. 대개는 거기서 꿈을 향한 항해를 포기한다.

왜, 라고 남들이 물으면 ‘그런데 파도가 세서’, ‘그런데 바람이 너무 불어서’, ‘그런데 먹을 게 떨어져서’, ‘그런데 해적을 만나서’··· 그래서 앞으로 어떡할 거냐고 남들이 물어보면 일단 항구로 돌아가서, 일단 먹을 것부터 확보하고, 일단 해적을 물리칠 무기도 보충하고 다시 항해할 예정이라고 대답하지만, ‘일단’ 항구로 돌아가면 다시 바다로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일단’, ‘그런데’는 늘 세트를 이루면서 꿈을 교묘히 피해나간다. 나중에는 꿈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진다.
 
이 강력한 세트는 자식들, 친구, 후배, 동료직원, 지인,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누가 이러저러한 꿈이 있다고 말하면, ‘일단’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판단되는 조언과 충고를 줌으로써 자신과 마찬가지로 꿈을 접게 만든다.

사실 그 조언과 충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자신은 올라가 보지도 못한 산의 정상을 말할 자격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쁜 바이러스는 쉽게 퍼지고 전염되는 법이다. 꿈을 접고 살면 꿈을 향한 노력, 열정의 부담에서 해방될지도 모른다.

굳이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고 우길 수도 있다. 꿈이란 애당초 ‘현실적’이라는 거대하고 무자비한 장벽 앞에서는 일개 바람개비와 같아 무용지물이라고 뻗댈 수도 있다.

나쁜 바이러스는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퍼지는 반면 그 백신을 개발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꿈을 가지려면, 지속적인 인내와 열정, 목표 의식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유지하기란 좀체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을 유지하기보다는 꿈을 포기한다. 이러저러한 문제로 꿈을 저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순전히 선택의 문제다.
 
꿈을 계속 갖기를 강렬히 원하는 것과 꿈을 버리는 것, 이유야 어쨌든 양자택일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 시타마치 로켓 >은 우주 로켓에 들어가는 밸브를 만드는 작은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의 분투기를 그린 일본소설이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일하나? 돈 때문인가? 자네는 사장인 내가 꿈만 좇고 현실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지? 하지만 엔지니어는 꿈이 있어야 해. 가령, 이층집 같은 거야. 1층은 생계를 위해 열심히 땀 흘리는 공간이지. 살기 위해서는 생계가 필수적이니까. 그런데 1층만으로는 뭔가 아쉽고 허전해. 빈 껍질을 안고 있는 느낌이 들지. 그래서 가끔은 2층에 올라가야 해. 거기는 생계는 잠시 잊고 꿈을 생각하는 공간이야. 꿈만으로는 1층 살림을 해 나갈 수 없으니까, 2층에서 꿈을 먹고 다시 1층으로 내려오지. 자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 너무 일에 대해 돈만 따지면 1층집밖에 안 돼. 엔지니어는 꿈이 없으면 발전하지 못하니까. 돈이나 회사의 규모보다 꿈의 크기가 커야 진정한 엔지니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서 일하든 꿈은 꼭 가져야 해.”

꿈을 지속적으로 가지길 열망하는 즉, 꿈의 지속이라는 ‘선택’을 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꿈을 좌절시키지 않고, 지속적인 효과를 갖게 해주는 백신은 없을까.

내가 꿈을 갖지 않고, 꿈이 나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꿈을 가지면 내 형편이나 사정, 이유에 따라 꿈이 분해되고 변형되며 조각조각난다.

반면에 꿈이 나를 가지면, 꿈이 나를 이끌어주고, 시련을 참게 해주며, 당장 지금이 아닌 조금 앞선 미래를 보여준다. 훌륭한 조각가는 나무나 돌, 대리석 안에 자신이 조각할 이미지가 이미 들어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창작이 아닌, 이미 창작된 이미지를 바깥으로 드러나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꿈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꿈을 바깥으로 꺼내서 실현시킬 의무가 있다. 그러니 꿈이 나를 갖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꿈을 함부로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꿈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