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과 인문 - 인류를 위한 과학의 꿈을 따라 '피에르 퀴리'
과학기술과 인문은 역사속 과학기술인의 성공과 비하인드 스토리, 당대의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해 살펴봅니다.
- 마리 퀴리와 함께 라듐을 발견한 과학자, ‘피에르 퀴리’
피에르라는 자신의 이름보다 퀴리 부인의 남편으로 더 잘 알려진 남자 피에르 퀴리. 사람들은 ‘퀴리’라는 성을 피에르의 성이 아니라 그의 아내인 ‘마리 퀴리’의 성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피에르 퀴리는 훌륭한 남편이기 전에 훌륭한 과학자였고, 과학의 꿈을 향해 평생 동안 한길을 걸어간 인물이었다.
인류를 위한 과학의 꿈
“당신과 내가 같은 꿈을 꾸면서 함께 살아간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당신이 조국 폴란드를 사랑하는 꿈, 우리가 인류를 위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특히 과학의 꿈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참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94년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는 한 명의 독립적인 과학도이자 젊은 여성인 마리 스크로도프스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소르본대학에 들어가 수학, 물리학을 공부하고 일찌감치 연구를 시작해서 ‘피에조 전기(電氣) 현상’을 발견했으며, 24세 때 공업물리화학 학교의 실험 주임이 된 이 똑똑한 남자는 가까운 미래에 아내가 될 마리 스크로도프스카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연구만 하느라 35세의 노총각이 되어 버린 피에르 퀴리는 마리에게서 운명을 느꼈던 것일까? 감동적인 구애로 마리의 마음을 열었고 그 이듬해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했다.
마리 스크로도프스카는 마리 퀴리가 되었고, 피에르는 결혼 전 마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를 믿어요, 당신의 매우 헌신적인 피에르 퀴리”라고 자신을 표현했듯이 평생 동안 ‘마리’라는 여인의 든든한 남편이자 동료로서 역할을 잘 해냈다.
그는 평생 실험실에서 살았다. 물론 아내도 함께. 가난했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아이들을 낳아 함께 기르며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과학의 꿈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끝없이 걸어야 하는 듯한 일상을 평생 견뎌야 했다. 그의 실험실은 비가 새는 헛간 같은 곳이었다.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아 독한 가스를 고스란히 들이마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피에르는 돈이나 명성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요동하지 않은 바위처럼 묵묵히 과학자의 길을 걸어간 그도 가끔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마리 퀴리는 회상했다.
“참 힘드네. 우리가 선택한 이 삶 말이야.”
"당신과 내가 같은 꿈을 꾸면서 함께 살아간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당신이 조국 폴란드를 사랑하는 꿈, 우리가 인류를 위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특히 과학의 꿈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세상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894년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마리 퀴리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라듐을 발견하다
피에르 퀴리가 활동하던 1890년대 당시의 물리학자들은 더 이상 물리적 세계에서 새로 발견할 수 있는 물질은 남아 있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이미 발견될 만한 것은 다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98년 피에르는 아내 마리와 함께 더 이상의 새로운 물질이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폴로늄과 라듐이라는 물질을 발견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피에르와 마리가 방사능 연구에 뜻을 두고 “우라늄 화합물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원자적 성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물질 탐구에 매진해 온 결과였다.
폴로늄(Polonium)은 아내 마리의 조국 폴란드에서 딴 이름이고, 라듐(Radium)은 라틴어로 광선이란 뜻이었다.
그 이후 피에르 퀴리의 삶은 라듐과 방사능 연구로 가득 찼다.
그때까지만 해도 방사능의 위험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피에르는 액체 상태의 라듐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연구를 진행하곤 했다.
1903년 피에르 퀴리는 방사능 현상을 연구한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물리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런데 노벨물리학상 후보로 지명된 것보다 피에르를 더 놀라게 한 사실이 있었다. 노벨물리학상 후보에 아내인 마리 퀴리의 이름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피에르는 바로 노벨위원회에 편지를 썼다.
“이 연구는 저와 마리 퀴리의 공동 연구이며 그녀가 한 역할을 매우 중요했습니다. 제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마땅히 마리 퀴리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내에 대한 애정이자 과학자로서의 순수한 양심이기도 했다.
다행히 노벨위원회에서는 피에르 퀴리의 의견을 수용해서 피에르와 아내 마리는 그해에 나란히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는 노벨물리학상 수상 기념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라듐은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아니면 오히려 해로운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그와 아내가 항상 자문하고 고민하는 화두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실한 남편이자 과학자였던 피에르 퀴리의 말년은 그
리 밝지 않았다. 평생 가난과 싸우며 연구에 몰입하던 힘든 삶이었는데, 그의 최후는 더 암담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후 소르본대학의 교수가 된 지 몇 해 지나지도 않은 1906년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거리에서 마차사고로 쉰도 안 된 나이에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인류를 향한 꿈, 과학을 향한 꿈을 위해 아직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의 시간은 허락될 수 없는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내 마리 퀴리는 남편의 사후에도 연구를 계속해서 1911년 화학분야에서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그리고 1934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사인은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백혈병이었다. 남편과 함께 라듐 발견 이후 방사능 연구에 매달린 결과였으리라.
라듐은 질병, 특히 암 치료에 사용됨으로써 현대의 암 치료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방사선 치료의 새 길을 열었다.
과학 역사상 가장 육체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험난했던 피에르와 마리의 라듐 연구가 인류 질병 치료의 새장을 열었던 셈이다. 피에르의 인류를 위한 과학의 꿈은 그렇게 열매를 거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