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과 인문 - 운명을 바꾼 재주 - 천재 과학자 장영실과 조선의 신분제도
과학기술과 인문은 역사속 과학기술인의 성공과 비하인드 스토리, 당대의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해 살펴봅니다.
글_ 박은몽 소설가
측우기, 자격루 등 많은 과학기기를 만들어 조선시대에 과학혁명을 일으킨 천재 장영실.
그는 사실 기생의 아들로 천한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과학적 재능으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정3품의 지위까지 올랐다.
특히 세종의 총애를 받아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재능을 활짝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있어서나 조선에 있어서나 큰 행운이었다.
세종과의 운명적 만남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잘 만나야 한다고들 한다.
하나는 ‘때’이고 또 하나는 ‘사람’이다. 때를 잘 만나거나 사람을 잘 만나거나 하는 경우 많은 것들이 술술 풀린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잘 만난다면 그야말로 자기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을 것이다.
장영실을 생각할 때 측우기나 자격루와 같은 과학기기보다 먼저 이러한 인생사의 현실이 떠오르는 것은 아마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신분질서가 철저하게 유지되던 조선 전기. 천민, 그것도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장영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비루하고 천대받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길이길이 추앙하고 존경받는 한국 최고의 과학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는데 그가 이러한 성공을 거둔 데에는 세종이라는 인물과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질서를 잡고 안정기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부흥을 시작하고 있었던 시대적인 타이밍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장영실이 조정에 발탁된 것은 세종 이전에 태종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능력과 재주를 인정받아 궁중기술자로 일하였는데 여전히 신분은 관노였다.
관노 기술자 장영실이 제대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였다.
장영실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1421년(세종 3년) 중국으로 건너나 발달된 각종 천문기구를 익힐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로 지위가 오르면서 마침내 관노의 신분을 벗을 수 있었다.
세종은 장영실의 재주를 누구보다 꿰뚫어 보았고 그의 재주가 국가 발전에 필요함을 간파했던 셈이다.
여러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장영실에게 관직을 하사한 세종은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다시 장영실의 관직을 정4품 벼슬인 호군(護軍)으로 높여주었다.
이때도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세종은 장영실의 공을 인정하여 관직을 하사했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허물지 못하는 벽처럼 견고했다. 당시 양반, 상민, 천민이 있었는데 최하층은 천인으로서 무당, 백정, 광대, 창기 등이 이에 속했다.
장영실은 사회의 가장 최하층인 기생의 아들이었지만 최고의 과학자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으니 견고한 조선의 신분제도도 장영실의 재주를 막을 수는 없었던 셈이다.
"행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 <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장영실은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 시간을 알려주는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 앙부일구 등 많은 과학기기를 만들어 냈다.
특히 자격루는 당시 아라비아나 송나라에서 이미 발명된 게 있었는데 세종은 그러한 물시계를 조선에서도 꼭 개발하여 궁궐에 설치하기를 소원했다. 그 소원을 이뤄준 것이 바로 장영실이었다.
파수호(큰 항아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수호(원통 항아리)로 들어가면 수수호 안의 살대가 떠오르면서 그 부력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해진다.
쇠구슬이 떨어지면서 동판 한쪽을 치면 동력이 전해져 나무로 된 인형 3구가 종과 북과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린다.
마치 조선 버전의 뻐꾸기시계라도 되는 듯하다.
세계 최초로 일컬어지는 측우기가 실은 장영실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 문종의 아이디어였다거나 한국 최초의 자격루가 세종과 장영실의 공동작품이라는 등의 폄하설들이 일부 존재하지만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이미 당대에 세종 스스로 의견을 밝힌 바가 있다.
“영실이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게 아니라 똑똑하기가 보통보다 뛰어나서 매일 강무(講武)할 때에는 나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 세종실록 >에 나오는 말이다. 오직 장영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세종 자신이 말하고 있다.
아쉽게도 장영실의 만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세종실록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했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서 국문했다고 나오는데, 결국 장영실은 곤장 80대를 맞게 되었다.
화려한 전성기에 비해 다소 비루해 보이는 이 사건 이후로 장영실의 행적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가 남긴 과학기기들이 그의 천재성을 오늘날까지 증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