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02 - 혁신적 벤처 문화 정착 및 확산 방안
▲ 김도현 교수 / 국민대학교 경영학과 / drkim@kookmin.ac.kr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거대한 기업들도 ‘성숙한 개인’과 ‘상호존중’이라는 신념이 내면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근무시간의 일정부분을 자신의 원하는 일을 하도록 한다거나, 성소수자에 대한 관대한 태도, 육아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잘 마련되어 있는 것과 같은 사례들은 그런 신념의 일부를 드러낸다.
우리나라 기업의 많은 경영자들에게 ‘성숙한 개인’과 ‘상호존중’은 아직 낯선 것이다.
어떤 종류의 혁신을 위해서는 자율성을 일부 희생하고 단기적인 몰입을 강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하려면 조직 내에서 경영진이 혁신적인 태도와 진취적 자세를 가지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가 자문해야 한다.
상황 1
▲ 하버드비즈니스리뷰 표지(2011. 12)
2011년 12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우선, 매니저들을 다 해고 해버립시다(First, Let’s Fire All the Managers).”라는 아주 자극적인 제목의 글이 실렸다.
매체 역사상 가장 선동적인 제목이었을 뿐 아니라, 그 저자가 생존해 있는 최고의 경영사상가라 평가받는 게리 하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글에 대한 반응이 그리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게리 하멜이 이제 몽상가가 되어간다는 비아냥이 적지 않았다.
이 글에서 그가 보스도 없고, 직급도 물론 없으며, 업무상 필요한 일을 할 때 필요한 비용이 있다면 누구의 허가도 없이 집행할 수 있는 “자기경영(Selfmanagement)” 방식의 회사를 만들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모닝스타’라는 회사가 그 사례로 제시되기는 했지만, 이런 방식이 많은 회사에 널리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적었다.
상황 2
2013년 1월, 페이스북의 COO인 셰릴 샌드버그는 이른바 “Culture Deck”라고 불리는 넷플릭스(Netflix)의 사내문화 설명서를 GQ매거진의 기자에게 “실리콘밸리에서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문서”라며 소개했다.
2009년 공개된, 별다른 그래픽도 없는 이 파워포인트 문서는 지금까지 수천 만 건 이상 다운로드 되었다.
이 문서는 넷플릭스에서 일하거나 일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 그리고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서에 열광하는 이유는 기존 기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담대한 생각이 문서 곳곳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넷플릭스는 회사가 성장할수록 규칙이 늘어난다는 상식에 저항하면서 자신들은 성장하되 점차 규칙을 줄이겠노라고 선언하고 있고, 이에 따라 실제로 휴가일 수나 선물, 식사, 여비 규정을 없애버렸다.
이 문서는 때로 잠언처럼, 때로는 혁명구호처럼 읽힌다. 넷플릭스의 CEO인 리드 해스팅스는 2014년의 한 인터뷰에서 이 문서의 내용은 조직이 “성숙한 성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에만 달성 가능하다고 말했다.
상황 3
▲ 자포스 로고와 경영이념 홀라크라시(Holacracy)
2015년 3월 24일, 자포스(Zappos)의 CEO인 토니 셰이는 전직원에게 매우 장문의 이메일을 썼다.
이 메일에서 그는 이제 자포스는 전통적인 조직구조와 직급을 버리고, 자기조직화와 자기경영을 기반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생각은 이미 홀라크라시(Holacracy)라는 새로운 경영이념에 근거한 것으로서 이 이념의 신봉자들은 자연계가 복잡적응계인 것처럼, 기업 내부의 조직 구성원들도 참여와 연결, 그리고 상호작용을 통해 창발적인 진화를 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기업내부의 권력과 의사결정권 역시 특정 구성원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토니 셰이는 메일에서, 이 같은 변화를 위해 한 달여 뒤인 4월 30일부터 사내의 모든 직급을 폐지하겠다고 선언하고, 이에 동의할 수 없는 이들은 회사를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자포스의 직원 가운데 약 15%가 회사를 떠났다.
상황 4
2015년 4월 13일, 창립 10주년째의 초기 기업인 그래비티페이먼트는 갑자기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CEO인 댄 프라이스가 약 110만 달러에 달하던 자신의 연봉을 7만 달러로 낮추는 대신, 전 직원의 연봉을 최소 7만불로 인상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TV와 신문이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줄을 섰고, 일주일 만에 5,000여 장 이상의 입사지원서가 밀려들었다. 적들도 늘어났다.
폭스 뉴스를 비롯한 미국의 우파 언론들은 그를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폄하했고, 일부에서는 그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재원마련을 위해 프라이스가 자신의 집과 적금을 포함한 모든 자산을 다 매각하자 회사가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일부 거래처는 회사가 정치적인 행동을 한다며 거래를 중단했다.
공동창업자였던 형은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현재 회사는 잘 운영되고 있다. 매출도 이익도 높은 증가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상황 5
2015년 8월, 뉴욕타임즈는 대규모 특집기사를 통해 아마존의 ‘끔찍한’ 문화를 고발했다.
아마존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노동한계를 실험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아마존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많은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구성되어 있다.
모든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울어본 경험이 있다거나, 매일 누군가는 일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둔다는 이야기, 경쟁이 치열해서 동료애는 찾아볼 수 없다는 증언들이 쏟아졌다.
회사 안에서 진솔한 의견을 밝히고 논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라는 것이 인터뷰한 전직 직원들의 의견이었다.
아마존에서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은 일이 먼저고 삶은 나중, 그리고 균형은 맨 뒤에 챙긴다는 뜻이라고 말한 이도 있었다.
제프베조스는 이 기사에 대해 과장이 심하다고 불평했지만, 증언들이 거짓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규모 자원을 신속하고 집중적으로 투입함으로써 선도혁신자를 따라잡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서 세계시장에 자리잡아온 우리나라 기업들의 전략에 대한 의심이 늘어가고 있다.
우리보다 더 강력한 ‘빠른 추격자’가 중국과 인도에서 탄생하고 있고, 따라 잡을만한 혁신의 수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진단, 그리고 이제 스스로 선도혁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실제로 가시적 전략변화를 이루어낸 기업은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스타트업이 선도혁신자로서 크게 성장하여 고용과 경제성장을 이끄는 것이 물론 생태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일이지만, 기존 기업들이 ‘스타트업처럼’ 행동하여 전략적 갱신(Strategic Renewal)을 이루어나갈 수 있다면 그 역시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스타트업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은 일치하지 않고 혼란스럽다.
이 혼란의 배경에는 성공적인 스타트업들의 행태가 제 각각 달라보인다는 어려움이 있다.
흔히 혁신적인 스타트업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복장, 유연한 출퇴근, 그리고 수평적인 문화 같은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런 기대는 상당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상황 2는 그 상징과도 같다. 넷플릭스의 Culture Deck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믿는 ‘종교적 신념’을 담고 있기에 그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받아 온 것이다.
그들은 훌륭한 기업은 훌륭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며,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문화에 이끌린다고 믿는다.
훌륭한 문화에 대해 넷플릭스는 쓸데없는 규정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실 이런 강조는 게리 하멜이 상황 1의 글에서 던진 질문과 맥락을 같이 한다.
게리 하멜은 원래 3,000만 원짜리 차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성숙한 사람들에게 회사는 왜 3만 원짜리 물건을 살때도 허가를 받도록 하는지, 그래서 충분히 성숙한 사람들을 어리고 수동적인 존재로 취급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제안한다.
어리고 수동적이라고 평가 받는 구성원들이 어떤 혁신을 스스로 만들어내겠냐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규칙을 줄이려 애쓰는 회사는 구성원을 성숙한 개인으로 존중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상식은 조직의 성장과 함께 규칙이 늘어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이론도 이런 현상을 당연하고 불가피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 3에서 이 ‘당연함’과 고집스럽게 대결하는 경영자를 만난다.
토니 셰이는 그 ‘당연함’과 결연히 맞서 싸우고 있다. 그는 필요하다면 구성원 가운데 ‘성숙하지 않은 개인’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율성과 자발성을 얻어내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상황 4의 댄 프라이스는 구성원 간의 상호존중이 가능하려면, 그래서 자율적인 혁신이 흘러 넘치게 하려면, 구성원이 적어도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성숙한 개인’이라면 금전적 보상의 차이나 금전적인 박탈을 통해서 자극을 받기보다는, 안정된 생활 위에서 자율적인 동기부여를 통해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
흥미롭게도, 그의 생각은 사회주의적이거나 몽상적인 것이 아니고, 최근 10여 년간 인사관리 분야에서 이루어진 최신 연구결과와 일치한다. 인간은 금전적 보상이 커진다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거대한 기업들도 ‘성숙한 개인’과 ‘상호존중’이라는 신념이 내면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근무시간의 일정부분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한다거나, 성소수자에 대한 관대한 태도, 육아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잘 마련되어 있는 것과 같은 사례들은 그런 신념의 일부를 드러낸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어떨까? 잘 알려진 제니퍼소프트, 잡플래닛, 그리고 에이스프로젝트와 같은 기업들은 실리콘밸리의 기업들 못지않게 ‘성숙한 개인’과 ‘상호존중’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최근 2~3년 사이 만들어진 많은 스타트업들도 문화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기업들의 경우에는 아직 변화에 둔감한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 들었던 소식 중에 가장 씁쓸했던 것은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임원이 ‘우리 회사는 일요일에는 반바지를 입고 일해도 되는 유연한 회사다’라고 자랑했다는 이야기와 또 다른 대기업이 ‘회장님이 토요일 아침 8시마다 연구원들과 격의 없이 조찬을 할 만큼 연구개발에 관심이 많아요’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만든 것이었다.
뭔가 흉내를 내고는 있는데 본질과는 다르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유연성과 큰 관심도 고맙지만, 일요일 아침에는 늦잠을 자는 것이, 토요일 아침 8시에는 가족과 함께 있는 쪽이 더 ‘정상적’인 것은 아닐지.
주말엔 부장님이 이끄는 등산으로, 그리고 평소엔 잦은 부서 회식으로 집단 정체성을 굳건히 하는 와중에 ‘성숙한 개인’과 ‘상호존중’은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은 아닐지.
만약 정말 혁신을 원한다면, 아니 적어도 혁신의 제물이 되고 싶지 않다면, 우리나라 기업의 성공동력으로 칭송되어 온 ‘우리가 남이가’, ‘까라면 까’ 주의를 진지하게 응시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숙한 개인’과 ‘상호존중’이라는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고 성공적인 기업도 있다.
상황 5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마존은 판이하게 다르다. 설립초기부터 그랬다.
CEO는 목적을 향해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고, 놀라운 집중성으로 과제에 집착한다.
이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기한 내에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는 직원들에게는 가차없는 조치가 취해진다. 아마존만의 예외는 아니다.
스티브잡스의 독선은 매우 유명했고, 스페이스X와 테슬라의 CEO인 앨런머스크도 못지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 기업은 아주 성공적이다. 이런 회사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990년 중반 이후 많은 경영학자들은 어떤 기업을 ‘스타트업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연구해왔고, 최근 상당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이런 성향을 기업가적 지향성(Entrepreneurial Orientation)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에 따라 조금 다르기도 하지만, 대개 기업가적 지향성은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혁신성, 진취성, 위험감수성, 경쟁적 공격성, 그리고 자율성.
흥미로운 것은 앞의 세 가지 성향은 많은 기업들에서 공통적으로 관측되고 있지만, 산업환경이나 추구하는 혁신의 특성에 따라 뒤의 두 가지는 서로 상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추구하는 혁신이 일단 의사결정을 하고 나면 다시 수정하기 어려운 소위 ‘가소성(Plasticity)’을 수반하는 경우에는 경쟁적 공격성이 자율성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스페이스X와 같은 경우, 매우 급진적인 플랫폼 혁신을 추구하고 있으며 일단 발사장과 로켓에 대한 투자가 일어난 다음에는 그 의사결정을 되돌리기 어려운 사업이므로, 자율성보다는 경쟁적 공격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많은 경영자들에게 ‘성숙한 개인’과 ‘상호존중’은 아직 낯선 것이다.
그래서 흔히 아마존이나 스페이스X와 같은 ‘반례(Counter-example)’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어떤종류의 혁신을 위해서는 자율성을 일부 희생하고 단기적인 몰입을 강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하려면 조직 내에서 경영진이 혁신적인 태도와 진취적 자세를 가지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가 자문해야 한다.
그 대답에 자신이 없다면, 아마존이나 스페이스X의 사례를 들어 수직적 문화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