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 엣세이 - 제2의 직장을 준비하며
플러스 엣세이는 사회 원로와 저명인사, 각계 전문가가 기고한 글입니다.
글_ 변재완 SK Telecom 전 CTO, 부사장
올해는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민 지 30년이 되는 해이자, 그간의 현역생활을 마치고 고문으로서 느긋하게 유급 휴가를 즐긴 첫해이다.
그 동안 업무로 볶아대기만 하던 후배들과도 업무를 떠나서 편하게 소주 한 잔 나누는 개인적인 모임이 많았던 해이자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만 왔던 나의 직장 생활 1기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해이기도 했다.
나는 팀장을 7년, 임원을 14년을 했으니 직장 운이 괜찮은 편에 속할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임원 생활을 10년 넘게 하고 부사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후배에게서 가끔 듣게 된다.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브랜드를 쌓으면 되지, 밥값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면 되지.”라고 답을 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회사를 잘 선택한 행운, 뛰어난 선배들 밑에서 핵심 업무를 할 수 있었던 행운이 더 큰 요인일 것이다.
팀장, 임원 생활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까 나와 일을 같이하던 후배들이 팀장, 임원으로 커가는 흐뭇한 모습도, 반면에 뛰어난 자질의 친구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리더로 크지 못하고 마는 안타까운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또한 같이 일한 후배들이 어느 팀장들, 어느 임원들 밑에서 일을 배웠는지 알다 보니까 우리가 싫든 좋든 부모를 닮아가듯이 그들 모두에게서 그들의 리더들의 모습이 여기 저기 묻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첫 끗발이 xxx이라는 농담과는 달리 직장 첫 사수복은 성공적인 삶의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 우리 모두는 성공을 향한 열정과 야망이 넘쳐난다.
자신들이 더 이상은 회사의 핵심 인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40~50대 후배들도 20~30대 초반에는 누구 못지않은 야망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무엇이 누구는 성공한 인물로 만들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 인물로 만들었을까?
젊은 시절의 역량이나 열정과 야망의 크기는 아닐 것이다.
유능한 리더 밑에서 핵심 업무를 부여 받아서 성공 경험을 쌓고 일 처리 근육을 키워가면서 동료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갈 수 있는 행운을 잡았는가에 좌우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듯이, 1등도 성공도 해 본 놈이 또 하게 되는 법.
소림사 최고 고수에서 직접 무공을 사사 받는 사람과 동네 사범에게서 무공을 배우는 사람의 무술 실력이 어떠할지 뻔하지 않겠는가?
성과 좀 창출하겠다고 전도유망한 다른 부서로의 이동을 막았던 몇몇 후배들아 미안하다.
끊임없이 뛰어난 성과 창출을 추구하고, 핵심 업무를 통해서 강하게 후배를 키우는 그런 리더 밑에서 일을 배우는 것이 좋기는 한데 문제는 어느 리더 밑에서 일할지는 대부분 회사가 정해주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팀장 초기시절 나는 비 핵심 부서에서 근무했었는데 비 핵심 부서에서 일하는 것도 나름 장점이 있었으니 바로 여유 시간을 활용하여 자기 개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시절의 기술 공부는 몇 년 후 기술 전략 업무를 담당하게 되어 CEO에게 기술에 의해서 바뀔 미래 사업 환경 하에서 회사는 어떠한 기술적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보고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톡톡히 제 역할을 해냈다.
이 업무 덕분에 나는 사내 기술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임원이 될 수 있었다.
역량에 비해서 너무 쉬운 일을 맡아 고민하는 후배들, 함량 미달의 리더 밑에서 일을 해야 하는 답답함을 호소하는 후배들에게 나는 얘기한다.
기회와 행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온다. 자기 개발에 노력하면서 오는 기회를 꽉 잡아서는 다시 놓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매일 숨쉬기 운동도 하고 여기 저기 걸어 다니는 다리 운동도 하지만, 보디빌더처럼 근육 발달이 안 되는 이유는 근육입장에서 볼 때 그 정도의 일상 활동은 이미 있는 근육으로 쉽게 할 수 있는 Comfortable Zone에서의 활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 처리 역량이라는 근육도 마찬가지로 질적, 양적으로 내 역량의 한계를 넘어간 Stretching된 일을 할 때야만 비로소 일이 고통스러워지고 고통스러운 만큼 일 처리 역량이 커지게 된다.
지난 20년간 이동통신 고객 숫자는 40만 명에서 5,8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기술적으로도 벽돌 크기의 모토로라 전화기로 대표되는 1세대 아날로그 기술이 지금의 4세대 LTE 기술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회사에는 준비된 인력이 항상 모자란다.
덕분에 원하든 원치 않든 내 역량이 담당하기에는 벅찬 그런 도전적인 핵심업무를 계속 수행할 수밖에 없었고, 과제에 실패하면 어쩌나 노심초사 걱정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개발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을 살 수 있었다.
마치 초등학생이 커다란 무등산 수박을 이리 저리 끙끙거리면 옮기는 형상이라고나 할까?
무등산 수박 옮기기 게임의 백미는 누가 뭐해도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업무일 것이다.
아무도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던, 심지어 상당 기간 동안은 그 일을 하는 우리 스스로 조차도 믿지 못하던, CDMA 세계 최초 상용 개발 신화창출 주역인 서정욱 CEO, 이성재 본부장 두 분 리더의 불타는 열정, 남들이 안 된다 안 된다 하지만 “내가 하는데 안 될 리가 없다.”라는 두 분 특유의 이해 못할 무모한 자존심과 저돌적인 추진력은 30대 중반의 주니어 팀장이었던 내게는 경이 그 자체였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개발, 현대자동차의 자동차 개발이 아마 이런 느낌이었으리라.
“나는 과연 40대, 50대가 되면 저분들처럼 저런 일들을 할 수 있으려나? 내게도 저런 일을 할 기회가 장차 주어질 것인가?”, “나도 이제 40~50대로서 예전 저분들 나이가 되었는데, 과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은퇴하고 나서 나의 직장 생활을 돌이켜볼 때 과연 나는 무엇을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을까? 그분들이라면 이 정도 난관에 주저앉아 포기했겠는가?”
두 분에 대한 나의 이러한 어줍지 않은 라이벌 의식은 여태껏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나의 발전과 도전의 원천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저런 분이 되고 싶다. 저런 분을 능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삶의 지향점이 되는 Role Model은 어느 분야에나 있기 마련이므로 나는 요즘 눈을 크게 뜨고는 어느 분을 본받을까 찾아보고 있다.
나는 이제 제2의 직장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기술 기반 Startup 회사의 젊은 기술자들에게 나의 경험이 어떠한 도움이 될지 고민하고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 분야의 일도 지금까지의 일만큼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