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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 꿈꾸는 이상이 혁신을 만든다 - 조선을 설계한 사상가 정도전

혁신의 아이콘은 기술혁신과 기업경영에 성공한 글로벌한 인물들의 성공비하인드 스토리를 분석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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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 영정

글_ 박은몽 소설가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혁신을 낳는다. 아니 새로운 혁신이 새로운 시대를 만든다.
 
겉으로 볼 때 세상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대세를 만들어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을 세운 것은 이성계와 그의 무력이었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사상적 기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청사진을 그린 브레인의 힘이 컸다.

그러한 설계도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왕조와 역사를 바꾸려는 시도가 그저 헛발질로 끝나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교 국가를 꿈꾼 이상주의자

고려가 불교 국가였다면 조선은 누구나 알다시피 유교 국가였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되기 훨씬 전부터 유교 국가 건설의 꿈을 가슴에 품은 사상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정도전이다.

비상한 머리와 학문에 대한 깊은 조예, 도전적인 기질, 꺾이지 않는 카리스마.
 
정도전은 누가 봐도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고, 시대가 그를 낳은 것인지 그가 시대를 낳은 것인지 알 순 없지만 아무튼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난세가 정도전을 필요로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제대로 된 자신의 때를 만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0대에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나 고비를 만나 유배생활과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고려 말 공민왕에 이어 즉위한 우왕 초,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그는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도전이 원의 사신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권문세족들은 오히려 그에게 원의 사신을 접대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그때 그는 권문세족 중 실세인 경복흥이라는 자를 찾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로 묶어서 보내 버릴 것이오!”

그때부터 그의 대쪽 같고 갈등을 불사하고서라도 뜻하는 바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뜨거운 기질이 엿보였던 셈이다.

결국 그는 전라남도 나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지인이자 관리인 염흥방이 사람을 보내어 “경복흥 시중의 화가 어느 정도 풀렸으니 유배지로 떠나지 말고 잠시 기다리라”고 방면 받을 기회를 주었으나, 정도전은 오히려 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내가 주장한 것이나 경복흥 시중이 노한 것은 견해가 달랐을 뿐 모두 나라를 위한 일이었소. 지금 왕께서 유배 명령을 내린 터에 어찌 중지하겠소?”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는데 지금 또 이편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 < 조선왕조실록 > 태조 편,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의 말



그는 유배지로 서둘러 떠나버렸고 이런 단호한 태도들은 반대파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유배생활이 그에게 잃어버린 시간만은 아니었다. 천민촌에서의 곤궁한 유배생활 속에서 그는 백성을 보고 고려 말 가진 자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한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관직을 얻을 수 없던 그는 고향에서 처가로 떠돌기도 하고 왜구의 침략 통에 피난민 시절도 보내면서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혁신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젊은 후진을 양성하는 일을 시도했지만 그 또한 권세가들의 방해로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8년 여를 떠돌이처럼 유랑하면서 그의 가슴 속에서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에 대한 포부가 강해지고 그 구상이 구체화되었다.

썩을 대로 썩은 고려는 그에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왕조에 불과했다.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그 운명의 트라이앵글

정도전은 유교 국가를 꿈꾸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인물을 기다렸다.

그런 그가 당시 한창 신흥세력으로서 떠오르던 이성계를 주목했다.

마흔 살로 접어든 정도전은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머무르던 이성계의 막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두 사람의 운명적인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1388년에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여 최영 장군을 제거하고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하자, 정도전 역시 대세의 한복판에 우뚝 서게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정도전에게 유교 국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을 것이다.

1392년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자 정도전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갔다.

한양 천도를 기획할 때 경복궁 및 도성의 위치를 정하였고,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여러 기관의 이름도 기획했다.

또한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 조선경국전 >을 지어 태조 이성계에게 바쳐 법치국가로서의 틀을 잡았다.

공이 큰 만큼 서서히 조선 왕조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갔던 것일까? 아니면 정도전이 도를 넘는 권력을 꿈꾸게 된 것일까?
 
정도전은 이성계의 아들들 중에서 적자들을 두고 다루기 쉬운 어린 서자 아들을 세자로 세우게 했고, 다른 아들들을 견제했다.
 
이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자 야심만만하던 이방원과 갈등이 깊어지고, 이성계조차 이방원에게 정도전을 경계할 것을 타일렀다.

점치는 사람인 ‘안식’이라는 자가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천명을 받을 사람이 하나뿐이 아니다.”라고 하자 정도전이 이렇게 말했다고 < 조선왕조실록 >은 기록하고 있다.

“어차피 곧 제거할 것인데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도전의 야심은 이방원 앞에서 패하고 말았다.

역사의 흐름이 정도전을 떠나 이방원에게로 흐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을 제거하려 할 때 정도전이 “살려 달라!”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변고가 난 것을 안 아들이 이방원 편에 사정할 것을 권하자 정도전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갈 길을 분명히 했다.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는데 지금 또 이편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정도전은 강력한 왕권보다는 신권이 조화를 이룬 왕도정치를 꿈꾼 사상가였다.

그러나 이방원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를 원했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행동으로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아버지의 역성혁명에 화룡점정을 찍었던 인물이다.

혈기왕성하고 지략이 뛰어났던 이방원과 정도전은 서로 닮은꼴이면서도 이상이 달랐던 셈이다.

비록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으나 조선이라는 나라는 점차적으로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왕도정치로 흘러갔으니 그가 꿈꾼 혁신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