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 ‘사도’는 어떤 아버지를 바랐을까? - 조선 군주 영조의 자식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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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사도 >가 화제다. 역사가 가진 드라마적 요소도 흥미롭거니와 입시 교육 경쟁 속에서 각 가정마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에 홍역을 치르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담고 있는 듯하여 더욱 흥미롭다.
조선의 왕 중에서도 강한 군주였던 영조는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을까? 영조의 자식 교육에는 성공과 실패가 공존한다.
비정상적인 행동을 일삼다가 죽임을 당한 아들 사도세자와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로 성장한 손자 정조가 그 경우이다.
글_ 박은몽 소설가
아들을 뒤주에 가둔 날
동서고금의 역사를 다 뒤져 본다 해도, 아니 역사까지 들추지 않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 그러한 희대의 사건이 조선시대 1762년 영조 때에 있었다. < 조선왕조실록 >의 기록을 통해 그날을 들여다보자.
< 조선왕조실록 >은 “임금이 창덕궁에 나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는 휘령전 앞으로 나온 세자를 보자 예고라도 하듯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경들도 들었는가? 정성왕후의 신령이 정녕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바로 코앞에 닥쳤다고 하신다!”
곧이어 임금은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고 세자에게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는 자결을 명하였다.
진언하는 몇 명 신하들을 파직하고 세손이 들어와 제 아버지 뒤에 앉고 애원하였으나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수위를 보는 사람을 세워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임금이 칼을 들고 수차례 자결을 재촉하였고 아들 사도가 애원해도 명을 거두지 않다가, 결국 뒤주 안에 가두도록 하였다.
세손이 급히 들어왔으나 임금은 세손과 더불어 빈궁 등 여러 왕손들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고 사도는 그렇게 뒤주 안에 갇혀 마지막 9일의 생을 살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된 것이었다.
사도세자는 처음에는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40이 넘어 애타게 후사를 기다리다가 얻은 아들이었다.
영조는 사도의 탄생을 뛸 듯이 기뻐하였고 이듬해에 바로 세자로 책봉하였다. 상당히 빠른 조치였다.
그만큼 영조의 기쁨과 기대가 컸던 것이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 총명하고 영특했다. 그러나 점점 변해갔다.
< 조선왕조실록 >에도 “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고 나온다.
아버지 영조는 이를 염려하여 형조판서 이종성에게 세자의 교육을 맡기면서 조화로운 성품으로 잘 훈련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하고, 청소년기에 들어선 아들에게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고 간곡히 당부도 해보았다.
하지만 아들은 점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학문을 더 멀리하였고 그럴수록 아버지의 질책은 커졌고, 급기야 사도세자는 정신병 증세까지 보이게 되었다.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할 정도로 병이 심각해졌다.
아버지 몰래 유람을 다녀오는 일까지 생겼다. 또 당쟁이 치열하던 때 아들은 아버지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고 반대파와 어울렸다.
심지어 역모의 뜻이 있다는 말까지 돌았다. 점점 상황은 단순히 부자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장래가 달린 문제로 번져갔다.
사도세자의 천품과 자질이 탁월해 임금이 매우 사랑했는데,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天性)을 잃었다.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 < 조선왕조실록 > 영조 38년 윤5월 13일
아들이 아닌 왕을 길러야 하는 아버지
영조에게는 사도세자 외에 왕위를 물려줄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니 영조의 손자였으며 훗날 ‘정조’가 된다.
정조는 제왕으로 길러진 인물이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뿐만 아니라 손자인 정조의 교육에도 열을 올렸다.
1757년 6세의 어린 정조를 불러 < 동몽선습 >을 외우게 하였고, 이듬해 경연 자리에는 < 소학 >을 외우게 하면서 학문의 진도를 점검하였다.
영조 앞에만 서면 실수를 연발하던 사도세자와 달리 정조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영조와 신하들 앞에서 조그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공부한 것을 우렁차게 읊었고 영조가 묻는 말에도 막힘없이 대답해서 보는 이를 놀라게 하고 영조를 흡족하게 하였다.
어린 정조에게서 영조는 제왕적 기질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잘만 갈고 닦으면 할아비인 자신을 능가하는 제왕으로 자라 조선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소양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사도세자는 이미 대리청정 기간 동안 정무능력이나 몸가짐, 행실 등에서 많은 문제를 노출하여 영조의 눈 밖에 난 상태였는데 반해 어린 정조는 날로 총명을 더해갔다.
영조의 눈에는 사도세자가 이끌어갈 조선보다 손자인 정조가 이끌어갈 조선의 미래가 더욱 믿음이 갔을 것이다.
어린 손자 정조가 없었다면 영조는 그렇게 쉽게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영조는 아들을 죽이고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정조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조선의 개혁 군주로서 역사에 기록된다.
역사에는 ‘if’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만약 영조가 정조를 대할 때처럼 사도세자를 인자하게 대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가정해 본다.
아버지의 엄격함 때문에 아들이 삐뚤어진 것인지 아니면 아들의 행실 때문에 아버지가 차가워진 것인지 어느 한쪽으로 단정할 수 없지만, 만약 그랬더라면 결과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는 무시무시한 순간에 신하들은 두려워 떨고 있는데 어린 정조는 달려 나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읍소한다.
그만큼 간절한 마음이 크기도 했겠지만 또 그만큼 할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듯도 하다. 사랑받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조부모가 자손을 가르치는 것을 ‘격대교육’이라 한다.
말하자면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격대교육을 받은 셈이다.
격대교육의 사례는 현대에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세계적인 재벌 빌 게이츠 등 성공적인 사례가 많다.
경륜과 지혜를 물려줄 수 있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격대교육의 가장 큰 핵심은 인자함이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과 자식에게 엄격한 사람도 손자손녀에게는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사도는 어떤 아버지(영조)를 바랐을까?
영조의 마음보다 사도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보아야 우리 시대의 정조를 많이 길러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