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인터뷰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 - (주)세아에스에이 정봉기 대표

“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 귀를 열어 기술고객과 현장고객을 연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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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공동작성_ 정원일 교수(경북대학교), 김공숙 전문작가(프리랜서)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그리고 향후계획 등을 알아봅니다.


경기도 시흥시에 새로 조성된 MTV단지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중견기업 세아에스에이.

새로 뚫린 시원한 도로들로 사통발달 접근이 쉬운데다 공기도 맑고 사옥 앞에는 깨끗한 개울물이 흐른다. 건물 모서리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대표이사실에서 내려다본 새로운 공단지역은 전망이 아주 좋았다.

멀리 인천항의 크레인이 거인의 팔처럼 보였다.


68세의 청년 CEO

정봉기 대표는 매주 시립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리는 CEO이다.

그래서일까? 정 대표의 집무실로 통하는 방의 이름이 ‘독서실’이었다.

아무나 들어와서 책을 읽으라고 이름 붙여놓은 방인데 독서실이라기보다는 휴게실 느낌이었다.

직원들이 대표와 얼마나 친밀감을 느끼느냐에 따라 방의 활용도가 정해질 터이다.

“책에는 새로운 사업과 경영에 대한 정보가 무궁무진하게 들어 있습니다. 저만 그 정보를 알면 뭐하겠어요. 직원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제가 본 책들, 좋은 책들을 모아 놓고 이름을 ‘독서실’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씩 1시간씩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일찍 출근을 한다.
 
회사를 경기도 시흥으로 이전한 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출근길 서울 목동에서 이곳까지 교통이 좋아 상쾌한 새벽 운전에 재미가 쏠쏠하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노래했다.

지하철을 탈 때도 가급적 경로석은 멀리하고, 젊은이들과 만나 교류하고 에너지를 나누는 68세의 청년 CEO, 정봉기 대표를 만나보자.


필리핀 수비크만(灣)의 기적

세아에스에이는 IMF 직후에 설립된 물류운반 하역 관련 제어시스템 생산 기업으로 올해 7월에 5백만 달러 수출 실적을 달성한 작고 단단한 기업이다.

항만의 크레인, 제철소의 하역, 원자력발전소의 연료 이동 등에서 사물인터넷(IoT)을 이용한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여 무인화된 최적화 작업으로 제조기업들의 생산성 향상, 환경 보호, 안전 등에 기여하고 있다.

흔히 골리앗 크레인이라고 부르는 조선소 크레인과 같은 장비의 설치와 제어를 담당한다.

2009년 무렵 한진중공업이 필리핀 수비크만에 조선소를 건립했을 당시 세아에스에이는 그곳에 크레인 설치 작업을 맡았다.

“크레인을 처음 설치했는데 이것이 작동을 하지 않는 거예요. 기계가 전혀 안 돌아간다고 현지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도착한 날부터 현장에서 사흘 밤을 새우면서 모든 것을 원점에서 체크해 보았습니다. 실무자는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모두 점검을 해보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드디어 사흘째 밤을 새우고 있던 날 새벽,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하도급 받은 중국계 회사의 기술자들이 실수를 한 것입니다. 선을 엇갈리게 연결해 놓았던 것이지요.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어 다시 조립하고 나니 가동이 되었습니다. 멀리서 동이 트더군요. 그 거대한 크레인이 거인의 팔처럼 움직이기 시작할 때 느낀 감격과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제 손의 느낌이 이상하더라고요. 크레인 콘테이너에서 얼마나 집중해서 일을 했던지 두 손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방만 잡아 놓고 들어가지 못했던 호텔로 가서 손을 베개에 올려놓고 3시간 자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어디에서든 통하는 것. 그는 현장 실무자가 아니라도 절절함과 의지가 있고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는 경험을 다시 한 번 얻었다.


토치로 파이프 열처리에 성공, 대한민국 최고급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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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기 대표의 첫 직장은 100% 외자 반도체기업인 한국시네틱스였다.

1970년대 당시만 해도 국내는 반도체 기술 불모지였다. 그때 인력들은 나중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터를 닦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반도체 원천기술은 전혀 없고 단순 조립·가공만 하는 기업이었습니다. 저는 1년 정도 근무하다가 비전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 이직을 결심했습니다. 전기전자 공학도 출신인 저는 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경영대학원을 다니며 주경야독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새 직장으로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을 찾다가 영자신문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곳이 세아제강이었습니다. 경쟁률이 치열했는데 단 1명만을 뽑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까지 인연을 맺게 된 세아제강의 전신 부산파이프연구소였습니다.”

부산파이프연구소에서 당시 정봉기 신입사원은 남다른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세아제강이 수출 증대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맨땅에 헤딩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세아제강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 이었습니다. 가자마자 맡은 일이 20인치 파이프 연결 부분을 열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회사 무역부가 기술 쪽을 잘 모르고 용접 후 열처리가 간단히 되는 줄로 알고 3개월 이내 납품하는 조건으로 3천 만불 수출 계약을 덜컥 맺어버린 거예요.”

그러나 그때 당시 국내에는 어느 누구도 파이프를 열처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단지 책으로만 보고 이론을 접해서 이해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책을 보니 방법은 있는 것 같은데 국내에는 시설이 없더라고요. 열처리를 하려면 열처리 기계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에서 구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입하는 데만 8개월이 걸린다는 겁니다. 한달 이내에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열처리 기계가 오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요. 고육지책으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청계천에 가서 토치 24개를 구해서 LPG 가스를 사용해서 장비를 만든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완전히 신이 나서 토치로 열처리를 하는데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토치가 녹아내리고 말았어요. 고온의 열이 반사가 되니까 장비가 못 견딘 겁니다. 약 일주일 밤을 새우면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하더군요. 반사열 때문에 장비가 녹는다면 그 열을 식힐 방법은 없을까? 이를 고민하다가 생각한 것이 토치 부분에 배관을 연결해 물이 지나가도록 해서 열을 식혀 토치가 녹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열처리에 성공했고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최초의 고급관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기서 얻은 교훈이 몰두하다보니 답을 얻었는다는 것과 문제가 생기면 원점에서부터 기본을 챙기는 일이 중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포항제철 인근에 설립된 세아제강 공장에서 국내 최초로 용접부위(Seam)가 없는 강관을 개발했다.

10인치 파이프를 가열해서 마지막에 원하는 두께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정인데 1978년 Seam이 없는 강관 개발 체제를 구축하여 정상가동을 시킨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세아제강의 파이프 기술은 국내 넘버원이 되었고 1980년도에도 제강 라인 자동화와 제조설비 국산화로 제조 경쟁력을 크게 올릴 수 있었다. 그 원천에 바로 정봉기 과장이 있었다.

세아제강의 수출 증대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정봉기 과장의 현장에서 답을 찾는 해결 능력으로 미국의 API사에 유전용 파이프를 수출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지속적으로 파이프의 비파괴 검사, 초음파 검사 등 제어 쪽에서도 주축이 되어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창업자에게 건의해 전기 제어용 장치 개발 자회사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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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에 근무하던 시절 초기 기술 도입을 외국에서 하다 보니 외국인들을 많이 상대하게 되었다. 정봉기 과장은 외국인들과 교류하면서 앞으로의 제조기업은 무인화와 최적화가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기술을 제휴해 제어용 장치 개발 사업을 선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회사에 제안하게 되었다.

당시 세아제강 창업자는 학력은 낮았지만 기술적 경험이 매우 다양한 분이었다.

그러나 창업자는 회사의 핵심적인 분야였던 파이프 가공 기술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하여 신규 사업에 대해 반대했다고 한다.

“그 분은 저의 직급을 잘 몰라 그냥 정 씨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일하면 반나절이면 될 것을 다른 사람이 일하면 3일이 걸린다고 하면서 저를 칭찬해주셨지요. 실력은 인정해주면서도 새로운 분야를 하겠다고 하니 반대가 심했지만 당시 창업자의 아들인 회장님이 저를 믿고 자회사를 설립하도록 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텔레마카닉스사와 교류해 직류 모터 속도제어기 제조 기술 도입 계약과 판매를 맺고 창업자의 아호를 따서 해덕전기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정봉기 대표의 해덕전기는 당시 국내 최초로 모터 속도제어기용 전력변환장치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기술은 포스코 광양의 천정 크레인 제어 시스템으로 채택이 되었다. 예전에는 자동차의 수동변속기처럼 크레인이 덜컹했다면 설치 이후에는 자동차의 자동변속기처럼 부드럽게 시작하고 정지한 것이다.

이 제품의 국산화를 통해 정봉기 대표는 크레인 가동 조직까지 최적화할 수 있었다.

포스코에 크레인을 무인화하는 솔루션을 만들어서 100대를 납품하여 4교대 근무자로 약 400명의 인력에 해당되는 작업을 무인화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국 대기업의 제조 경쟁력 이면에는 이처럼 숨은 공로자인 중소기업들이 있었다.

정봉기 대표는 해덕전기의 후 신인 세아산전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가진 한계는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나는 기계를 만드는 사람인데, 기계를 만들어 납품할 때 마다 매번 가격이 내려가요. 세계 최초, 국내 최초라고 하지만 수익은 증가하지를 않는 거예요. 갑을 관계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지려면 독자적인 기술력을 인정받아 수의 계약을 하는 분야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려운 진입장벽이 있는 원자력발전소에 도전해 봐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정봉기 대표는 두산중공업과 함께 원자력발전소의 핵 연료봉 이송장치 무인화 작업 개발에 착수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 성공으로 특허도 많이 확보하게 되었고 함께 일한 두산중공업의 임직원들이 모두가 진급하는 보상을 받기도 했다.

정봉기 대표의 회사는 수고의 대가로 시장을 보장받게 되었다. 향후 2020년까지 200억 원의 물량을 확보했으며 원자력발전소를 국외에 수출할 경우 정봉기 대표회사의 기술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세아에스에이 설립 후 첫 수주에서 만난 또 다른 기적

정봉기 대표는 합작으로 산업분야 제어 시스템 선진기술을 구축하고 우리나라 고유 기술이 되도록 만들었다.

국내 최초, 세계 최초로 성공하게 된 다양한 기술 개발이 가능했던 원동력에 대해 그는 ‘열정과 직원을 살려야겠다는 간절함에서 오는 책임’이라고 말했다.

“1996년 세아그룹에서 분사된 세아산전의 대표이사가 되어 운영을 하다가 IMF를 맞았습니다. IMF 이후에 회사들마다 구조조정이 한창이었습니다. 세아산전도 80명에서 40명으로 줄이고 위에서 저 한 명만 남으라고 하기에 그러면 제가 모든 것을 책임을 지겠다고 하고 분사를 요청했습니다. 당시 세아산전은 매출은 150억 원이었지만 만년 적자였기에 몇 천억 원씩 매출을 올리는 모(母)기업 입장에서는 자회사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던 거지요. 저의 요청으로 우리는 2000년도에 분사가 되었고 독립을 결정했습니다.”

당시까지 협력 제휴해온 프랑스의 슈나이더사(社)와도 분리하고 자동제어 솔루션 기술만을 가지고 나와 설립한 회사가 지금의 세아에스에이이다. 그의 나이는 50대 초반, 뒤늦은 나이에 회사를 창업하게 된 것이다.

“회사가 분사되어 창업을 하는데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저의 집사람이 미국으로 여행을 가 있을 때였는데 제가 분사해서 창업을 한다고 알렸더니 아내 곁에 있던 처남과 처가 식구들이 무척 염려스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직원은 단 3명만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정봉기 대표는 자신이 있었다. 학부에서는 전기공학과 전자재료를 배워서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고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을 배웠다.

자신이 속한 회사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더라도 어디에든 팔 수 있는 코어 기술을 자신이 보유하고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회사는 기술이 재산이라고 말합니다. 기술은 곧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재산입니다. 만약 제가 1인 기업을 한다고 하면 제 안에 기술과 경영 능력이 융합되어 있는 것 아니겠어요?”

세아제강에서 해덕전기, 세아산전을 거쳐 드디어 완전히 분사하여 창업한 세아에스에이는 48%의 종업원 주주로 구성된 종업원 지주제 회사이다.

회사 설립 이야기는 지금은 담담히 말할 수 있지만 너무도 힘이 들었다. 큰 사무실 공간은 당연히 없어지고 10평 정도의 창고에서 시작했다.

지금의 대표이사 집무실보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매일 아침 5시에 출근해서 화장실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세아에서 일할 때 친분이 있던 기업으로부터 90억 원짜리 사업을 수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고객사는 당연한 절차를 요구했다.

이제 세아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정봉기를 믿고 수주를 줄 수 있겠냐면서 신용보증을 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 프로젝트는 세아산전에 있을 때부터 진행이 되던 과제였습니다. 분사가 되고 나니 어떻게 보증해 줄 것인가가 관건이었는데 저는 세아그룹 회장님이 밀어주는 것이라고만 대책 없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회사인데 실제로는 지원이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그때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그 일이 성사되기 전 신용보증기금에서 실사가 나왔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한심해 보이는 회사였지만 과거 세아산전 대표이사로 일할 때 흑자를 낸 3개년 계획을 살펴보더니 새로운 회사에서도 잘 할 것이라고 더 이상 조사 없이 18억 원을 보증해 준 것입니다. 저에게는 180억 원 이상의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태풍 매미로 무너진 크레인들, 45일 만에 모두 원상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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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작은 성공이 하나둘 이어지면서 떠났던 직원들이 돌아왔다.

30년 이상 제어 분야에 몸 담아온 정봉기 대표였지만 함께했던 직원들이 돌아오자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안정이 되어 갔다.

조직은 체계화되었고 적극적인 시장 확보에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은 그만큼 늘어나 주지 않았다.

“CEO에게 운(運)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직원들은 돌아오고 체계는 갖추었는데 정작 일이 없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태풍 매미를 기억하나요? 태풍이 온 것입니다. 태풍 매미가 와서 부산과 광양의 크레인이 다 무너졌습니다. 정상화하는 데에만 7~8개월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지요. 그 일에 저희가 참여해 45일 만에 모두 원래대로 복구를 시켰습니다. 태풍 매미라는 국가 재난에 대처하여 우리가 큰 역할을 했고 또한 성장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어려울 때 보이지 않는 손이 도움을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세아에스에이는 항만 크레인 자동화 선도기업이다. 부산항, 광양항, 인천선광부두, 경인아라뱃길 항만 크레인 제어시스템의 설치도 세아에스에이가 맡아서 수행을 했다.

올해 7월 30일에는 싱가포르 해외지사인 ‘싱가포르 세아’를 통해 500만 달러 수주에 성공한 공로로 ‘5백만 불 수출의 탑’ 상을 수상했다. 중소기업이 해외에서 직접 수주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정봉기 대표는 전술한 필리핀 수비크만에서의 3박 4일만의 기적같은 크레인 가동 성공을 겪으며 이러한 자세는 신입사원이든 최고 경영자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월 3회 CEO를 위한 조찬 경영자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열성적으로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역할에 대해 돌아보곤 한다.

“저는 창조경제라는 것도 대표이사들이 항상 열정과 절절함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성공 여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술고객–세아에스에이–현장고객’의 연결이 중요

중소기업이 인력난이라고 한다. 중소기업이 인력을 확보하고 고객과의 접점을 찾는 작업은 CEO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봉기 대표는 도전하는 새로운 사업마다 그 변곡점을 현장의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았다.

예를 들어 제철소의 물류 이송장비 및 차량 형상인식 시스템의 경우 콘테이너 차량이 주차를 할 때 자동으로 정확하게 물류를 하역할 수 있도록 개발한 시스템인데 이러한 개발은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구한 것이다.

“오랫동안 프랑스 기업에서 기술을 도입하면서부터 하이테크 기술자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많이 하다보면 이 기술을 어디에 도입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것을 우리 것으로 특허화해 나가면서 적용할 현장들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곳 현장의 고객들은 업무를 하면서 느끼는 개선점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느 것도 흘려듣지 않고 귀를 기울이다보면 접목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기술고객-세아에스에이–현장고객’을 연결하는 구조로 그 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제철소의 물류 이송장비 및 차량 형상인식 시스템은 실무자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어 타 제철소에까지 응용이 되었다고 한다.

외국기술을 들여다가 우리 것으로 만들어 특허를 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것은 중소기업이 살길이기에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 핵심적인 특허를 보유해야 했고 이 특허를 바탕으로 한 기술로 제어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사전에 실제로 사용자가 크레인으로 하역을 할 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파악했지요. 문제는 흔들림이었습니다. 많은 무게가 실린 하역물을 차량에 실어야 하는데 물건을 끌어올릴 때 흔들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운송자가 아주 예민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하역물이 파손되거나 정확하게 싣지 못하는 어려움이 생기는 거지요. 그래서 흔들림을 방지해 주는 기술을 적용해 시스템을 개발하고 결과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같은 인원으로 같은 시간에 훨씬 많은 양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현장의 고객들이 요구하는 더욱 정교한 퍼지 시스템에 대한 니즈에 적극 대응해 기술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면 업무는 더욱 체계화되고 정교해져서 타 경쟁사들은 아예 발을 들일 생각조차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아에스에이는 사원지주회사이기 때문에 기술을 보유한 정예인력이 20여 년 이상 근무하고 있다.

신규 기술 인력은 수급이 쉽지 않다. 아무래도 중소기업이라는 편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규 인력은 산기협의 R&D 인력 수급망을 통해서 공급받기도 한다.

해외의 싱가포르 지사의 경우 처음에는 8명이 일을 하다가 이제는 2명이 모든 업무를 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최적화되었다고 한다.

정봉기 대표는 젊은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기술자 스스로 더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마인드를 심어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직원들을 뽑을 때에 주변의 추천이나 제언을 듣기도 한다.

“회사를 신사옥으로 옮기고 나서 사옥 내에 외부인이 들어와 식당을 개설하게 되었는데 식당을 운영하는 분의 자녀가 공대 출신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마침 그 부모님이 세아에스에이에 자리가 있냐고 묻기에 당시 인력을 채용할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을 평소 잘 보았던 터라 아들의 면접을 보았습니다. 수줍음을 타지만 성실해 보여서 채용 조건을 내걸었지요. 회사 일을 열심히 하고 점심때는 부모님의 일을 부끄럼 없이 도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다른 직원들이 보더라도 꼭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엔지니어로서 일도 하고 효도도 하는 것이지요. 지금은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다보니 이제 작은 일부터 세상을 이롭게 하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기업이 오래 갈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아픔을 겪으며 청년들의 멘토 자처

정봉기 대표 방은 커다란 통유리 벽으로 시야가 환하다. 그 창문 한 쪽에는 어린이 사진이 놓여있다.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6세 소년은 정봉기 대표의 외손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곁에 없다.

싱가포르에 살다가 잠시 한국에 왔던 손자가 2년 전 의료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후로 정봉기 대표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저는 매일 손주와 대화합니다. 참 똑똑한 아이였는데 세상 떠나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창밖을 보며 한국은 싱가포르와 다르게 왜 교회가 그리 많나요? 라고 질문하면서 주고받았던 대화가 생생합니다. 정이 많이 들었는데 갑자기 떠났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큰 시련이 왔습니다. 부모인 딸아이 부부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지금 둘째가 생겨서 다소 위로가 됩니다만 그 고통은 말로 못하지요. 저도 그 아이가 간 후에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손자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이제는 내가 죽으면 손자를 볼 수 있겠다 싶으니까 오히려 죽음도 희망이 되더군요.”

아침마다 집무실에 앉으면 맞은편에 있는 손자의 사진과 대화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려고 아이 사진을 가져다 놓았고 빛이 들어와도 손자의 사진이 있는 부분의 커튼은 절대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손자는 보냈지만 대신 정봉기 대표는 젊은 사람들을 키워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는 젊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기업가 정신을 키워 주는 모임이나 강연에 꼭 참석한다고 한다.

언론을 통해 젊은이들의 좌절과 무력감, 불안 등에 대해 많이 접하지만 그럴수록 적극적이고 희망을 가지고 열정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봉기 대표는 이노디자인의 김영세 대표가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현역에서 일하면서 사람을 키우는 일이 이제 제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라고 여깁니다. CEO는 직원들에게 ‘청년 기업가 정신’을 키워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지요.”


CEO라면 외국어 두 개는 기본

정봉기 대표는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영어도 꽤 실력자이다. 그는 오늘날의 CEO는 모국어 외에 영어와 다른 현지어를 포함해 최소 2개 이상의 외국어를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처음 포항공장을 건설했을 때 모든 시운전은 슈나이더사 외국인들과 함께했습니다. 기계 하나 고장이 나면 모든 게 올 스톱이 되었고 바로 수리에 들어갑니다. 프랑스 기술자들은 열정적이었고 문제가 생기면 원점에서 새로 점검한다는 자세로 기본을 챙기더군요. 그런 프로세스를 보고 배우며 몸으로 익혔습니다. 새벽에 불러내어도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찾아내 고치는 훈련을 하면서 저도 조금씩 진짜 기술자가 되어 갔습니다. 제 자랑 같지만 돌아가신 세아제강의 창업자가 자주 해주신던 ‘정씨가 오면 다 고친다’ 는 말씀도 그래서 들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에 대한 감과 직관을 실무 엔지니어들과 부딪히면서 배웠습니다. 그 당시에 프랑스 친구들과 좋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언어를 통한 소통이 이해의 폭과 교감의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당시 기술을 전수 받으러 프랑스에 가서 8개월 간 머무르는 동안 처음에는 짧은 영어로 소통을 하다가 실무를 통해 언어를 체득해 나간 그는 몇 달 후에는 영어로 꿈을 꿀 정도가 언어가 늘었다.

그는 수주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힘이 들어도 기술 쪽 발표는 직접 현지어로 진행한다.

싱가포르 수주를 할 때에도 영어를 잘하지 못하지만 세 번 발표를 모두 영어로 했다.

“만약 영어로 하지 않고 한국말로 했다면 수주가 안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현지어로 해주는 것이 제일 낫겠지요. 네덜란드를 보십시오. 여러 나라 말을 다합니다. 우리가 국제화를 하는 방법은 CEO부터 외국어를 적어도 두 가지 이상씩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외국어를 몰라도 일이 되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국제화 시대에는 CEO가 더 외국어에 민감해야 합니다.”

정봉기 대표는 중소기업이 안정된 매출액을 유지하려면 방법은 한가지라고 말한다.

“국내 대기업의 수주만 받아서는 연매출액이 매년 들쭉날쭉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정된 매출을 위해서 최종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영업을 강화하고 특히 해외를 상대로 토털 패키지 솔루션을 제공해야 합니다. 해외의 크레인 장비는 항만 운영경비가 50%를 차지하지요. 이를 무인화해주는 시스템을 마련해주고 그것을 토털 패키지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싱가포르만 상대하지만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으로 영업을 확대·강화할 계획입니다. 일이 커지고 많아지면 현지에 엔지니어를 두고 운영할 계획입니다.”


실버들이 해외로 나가서 역량을 발휘해야 할 때

CEO가 해야 할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나이가 오십이든 육십이든 상관없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도 매주 빼놓지 않고 시립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보고 좋다고 판단되는 책은 직원들에게 추천해 준다.

출장을 다닐 때는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닌다. 직원들에게 독서를 권하다보니 사장실 옆방이 ‘독서실’이 된 것이다.

“저는 일하고 있는 현역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가치를 올려야 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가만히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절대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50대 이상의 한국인들은 해외로 나가서 더 넓은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만한 능력도 의지도 충분합니다. 기회가 없을 뿐이지요. 그 기회를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경제 영토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정봉기 대표는 대한민국의 50세가 넘은 사람 중 절반 이상은 외국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외로 나가서도 성공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현장을 통해 접한 경험, 우수한 자질과 끈기가 그것이다. 한국인이기에 저력을 가치고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저 또한 마찬가지이고, 제조기업의 해외 진출 시에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실력을 갖춘 실버 인력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만 해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실버들도 자신들이 가진 소중한 노하우를 해외에서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글로벌 시대에 맞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겠지요. 나이가 들수록 가치를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글로벌 진출을 꿈꾸는 정봉기 대표.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기술을 현장에 접목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언어로 소통했다.

세아에스에이는 앞으로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서비스를 하는 데 더 많은 지원을 하고 실버 파워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항만에서 제철소로, 제철소에서 발전소로, 발전소에서 전기자동차 제어 시스템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세아에스에이는 진화하고 진보하는 세상의 흐름을 관찰하고 언제든지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서해안의 갯벌이 간척지로 바뀌었다. 이 토대 위에 세아에스에이의 신사옥이 들어섰다.

그리고 해안을 바라보며 꿈을 현실로 바꿔 나가는 68세 청년 CEO정봉기 대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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