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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 혁신은 ‘크리에이티브’다
- 20세기 브랜드 광고 시대를 연 데이비드 오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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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_ 다산북스


글_ 박은몽 소설가

혁신의 아이콘은 기술혁신과 기업경영에 성공한 글로벌한 인물들의 성공비하인드 스토리를 분석하는 칼럼입니다.


무조건 바꾸기만 한다고 혁신이 될까? 변화 자체보다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바꾸느냐가 중요하다.

이제까지 해왔던 것에서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부분을 찾아내고 과거의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기발한 광고처럼 창의적인 사고에서 나온다.

바로 크리에이티브가 살아 있는 신의 한수를 찾아내어야 새로운 방향을 이끌 수 있는 의미 있는 혁신이 될 수 있다.

데이비드 오길비가 현대 광고의 새 지평을 연 것처럼 말이다.



해서웨이 셔츠를 입은 남자

21세기는 광고 시대다. 무명의 작품 혹은 상품이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살아 있는 광고 하나로 명성을 얻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현대의 광고는 브랜드 이미지(Brand Image)를 중시한다.

제품이 가진 장점에 대한 논리적인 증거를 제시하기보다는 감성적인 접근으로 그 제품만의 이미지를 소비자의 감성과 심리에 호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멋진 유명 연예인을 자주 활용하는 것도 그 연예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제품의 이미지에 투사시키기 위한 브랜드 이미지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광고 흐름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1950년대 초 해서웨이(Hathaway)는 셔츠를 만드는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경쟁사 애로우사 가 연간 광고 투자액이 200만 달러 정도인 데 반해 해서웨이는 고작 3만 달러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해서웨이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한 광고회사를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약속과 함께 광고를 의뢰했다.

“비록 지금은 작은 회사이지만 앞으로 큰 기업으로 성장한다고 해도 광고 대행사를 절대로 바꾸지 않겠다. 또한 광고 카피에 손대거나 간섭하지 않겠다.”

궁지에 몰린 해서웨이사의 광고를 맡은 광고대행사가 바로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의 광고기획사였다.

오길 비는 해서웨이 셔츠를 경쟁사와 어떻게 차별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셔츠 제조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에게는 어필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묘안을 찾으려 애썼다.

기발한 아이디어, 신의 한수를 찾던 오길비의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해서웨이 사진 촬영실에 가는 길에 지나쳤던 잡화점에 있는 물건이었다.

바로 잡화점 창에 진열되어 있던 1달러 50센트짜리 눈가리개였다. 오길비는 그 눈가리개 하나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해서웨이 광고 사진을 찍는 남자 모델에게 그 눈가리개를 착용시켰다. 애꾸눈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광고역사를 새롭게 쓴 ‘해서웨이 셔츠를 입은 남자(The man in the Hathaway)’ 광고였다.

품격이 넘치고 귀족처럼 생긴 신사가 광고에 등장한다. 그는 해서웨이 셔츠를 입고 있다.

그의 옆에서는 한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공손한 태도로 신사의 치수를 재고 있다.

치수를 잴 수 있도록 한쪽 팔을 맡긴 채 정면을 바라보는 신사에게서는 누가 봐도 VIP 고객의 포스가 풍긴다. 그런데 그 신사는 한쪽 눈을 가리고 있다.

이 신사는 왜 눈을 잃게 되었을까? 광고를 본 소비자들은 한 귀족 남자가 눈을 잃게 된 사연을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그 궁금증은 그 남자가 입고 있는 해서웨이 셔츠로 옮겨갔다.

첫 광고가 1951년 < 뉴요커(The New Yorker) >에 나오자마자 해서웨이 셔츠가 완판되기 시작하면서 해서웨이사는 오랜 세월 동안의 침체를 깨고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오길비의 광고기획사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어느 광고이든 그것은 어떤 제품의 전반적인 브랜드 메이크업을 위해서 장기간 투자를 해야 한다.

-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의 < 어느 광고인의 고백 > 중에서



크리에이티브, 어디서 나오나

데이비드 오길비(1911~1999)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증 등을 겪다가 성적 부진으로 퇴학을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농부, 요리사, 외판원 등 여러 직업을 거쳤고, 미국으로 이민한 후에는 조지 갤럽의 리서치 직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미국의 광고계는 영국에서 이민 온 그에게 냉담했고 광고회사에 입사하는 데 실패한 그는 프린스턴에 있는 조사회사 갤럽에 입사했다.

그러다가 그가 광고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살려 광고회사를 차린 것은 마흔이 다 된 나이였다.

광고인으로서는 늦은 나이의 시작이었고 더군다나 미국의 광고계는 크고 작은 광고회사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단 2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그가 미국 광고계의 거물로 성장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서웨이 광고가 그의 성공가도에 첫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세계 광고 역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기발한 광고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감성적인 브랜드 전략, 소비자의 심리에 호소하는 기법 등을 구사한 오길비이지만, 정작 그는 자료와 사실(Fact)을 가장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갤럽에서 자료 조사 업무를 담당했던 경험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갤럽 박사는 광고에서 성공한 것과 실패한 것에 대한 소중한 경험들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실제로 오길비는 갤럽 회사에서 여러 프로젝트에 리서치 요원으로 참여하면서 소비자들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배워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오길비의 크리에이티브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분석이 토대가 된 것이다. ‘해서웨이 셔츠를 입은 남자’ 광고를 만들 때도 우연한 아이디어 덕분인 듯하지만 실은 18번에 걸친 반복적인 시안 마련과 소비자 반응 점검이 선행되었다.

롤스로이스 자동차 광고로 히트를 쳤을 때도 그는 3주에 걸쳐 고급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연구·분석한 다음 자동차의 특성을 콕 짚어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동안 신형 롤스로이스가 내는 소리는 전자시계가 내는 소리 정도뿐이다.”라는 한 줄의 카피를 만들어 냈다.

이 한 문장은 신형 롤스로이스의 고급스러움에 대해 소비자들에게 잘 전달해 주었고 롤스로이스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급속도로 팔려 나갔다.

오길비의 크리에이티브가 어느 날 신 내림을 받는 것 같은 우연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오랜 고민과 자료 분석을 토대로 나온 영감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영감 같은 것은 없다.

치밀한 자료 분석을 토대로 오랜 고민과 연구를 거쳐서 나오는 것만이 세상을 유익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진정한 혁신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