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플러스 엣세이 - 교통 문화에 대한 몇 가지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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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석 고문
현대모비스(주)



플러스 엣세이는 사회 원로와 저명인사, 각계 전문가가 기고한 글입니다.


에피소드 1. 일방통행로에서 만난 고마운 경찰관

영국에 유학하던 1980년대 초의 일이다.

영국은 9월에 개강하기 때문에 부리나케 준비하여 1년 코스의 석사 과정에 등록하고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 몇 개월은 영어 때문에 많은 애를 먹었다. 수업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예를 들면 슈퍼에 가서 물건을 고른 다음 그동안 배운 영어를 써서 한참 얘기하면 점원은 짧은 몇 마디로 끝내 버리는 일이 허다했고,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은 숙소에 돌아와서 한참 복습을 해야 하곤 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겨울방학이 됐다.

그 당시는 해외에 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때였고, 해외 유학은 더 그러해서 가족 없이 혼자 나와 있던 터라 방학 동안 할 일을 궁리하다가 같이 갔던 동료와 중고차로 영국 남부 여행을 가기로 했다.

며칠 동안 지도를 펴놓고 일정 및 루트를 정한 다음 출발을 했다. 서로 교대로 운전을 하며 새로운 영국 문물을 열심히, 재미있게 보면서 남부로 가는 길에 ‘바스’라는 도시에 들렀다.

옛날 로마 시절 로마군이 점령하여 지었다는 도시 ‘바스’에는, 도시 한가운데에 로마인들이 즐기기 위해 지은 노천탕이 있었다.

구경을 끝내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기 위해 지도를 보고,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8차선의 대로로 진입하여 약간 경사진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5시경. 당연히 내비게이션이 없던 때라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큰 지도책을 보고 안내를 하던 상황.

큰 대로에 차가 하나도 없길래 여유 만만하게 경사로를 올라가던 중, 위에서 8차선을 가득 메운 차들이 서부 영화의 버팔로떼처럼 밀고 내려오는 게 아닌가.

놀라서 어쩔줄 몰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 한 명이 뛰어나와 우리 차를 정지시킨 다음, 8차선을 가득 메운 차들을 전부 세우더니 우리 차에 다가와서 이 길은 일방통행로라고 설명해 주고, 다음 행선지를 물어본 다음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계면쩍음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고마운 마음이 한꺼번에 뒤엉켰다.

‘아 친절한 경찰관, 이래서 선진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경찰이 무서운 존재였다.


에피소드 2. 운전자의 상태까지 체크하는 세심함

이렇게 ‘바스’를 지나 계속 여행하면서 남부 해안지역의 중간쯤을 지날때였다.

남부지역은 낮은 구릉만이 띄엄띄엄 있는 목가적인 풍경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며 낮은 언덕이 나와서 속도를 올리며 가고 있었는데 거의 꼭대기에 다다라서야 맨 위에 경찰차가서 있는 걸 발견했다.

지레 겁을 먹고 한껏 속도를 늦추고 경찰차를 지나쳐 천천히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경찰차가 따라오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1㎞ 남짓 내리막길을 제한 속도를 철저히 지키며 내려가면서 계속 뒤따라 오는 경찰차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데 거의 같은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서 지도를 보고 있었는데, 친구에게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자고 했다.

우리의 목적지에 가려면 직진해야 했지만 우리가 교통 법규를 위반했는지, 경찰차가 계속 따라 오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신호를 넣고 좌회전하자 경찰차도 따라서 좌회전하면서 차 지붕의 경광등을 켜고 정지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속도위반으로 걸렸구나 생각하고 체념하면서 차를 길가에 세웠다. 경찰이 다가와서 창문을 내리라고 했고, 첫 번째 질문이 ‘운전자가 괜찮으냐’는 것이었다.

의아해하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자 경찰 왈(曰), 언덕 위에서 보니까 잘 오던 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면서 내리막길에서도 계속 천천히 가길래 운전자가 이상이 있는 것 같아 따라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일단 안도를 하며 운전자는 아무 이상이 없고 둘이서 방학을 맞아 여행 중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지금까지와 앞으로의 여정을 묻길래 계획했던 루트를 설명했더니, 알겠다고 하며 좌회전이 아니라 계속 직진해서 가야 한다고 안내하면서 앞으로 남은 여정을 즐기라면서 가는 게 아닌가. 경찰은 이런 건가?


에피소드 3. 독일 아우토반의 효율성

그로부터 20년쯤 후의 독일 주재시 이야기이다.

말로만 듣던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고 싶어 400㎞ 이내의 출장지는 차로 다니던 시절, 고속도로에 오르니 말로만 듣던 벤츠, BMW 등 유명한 차들이 아주 흔하게 보였다.

객기에 국산차를 몰고 지기 싫어 최대한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가며 다니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벤츠나 BMW 차들이 2차선으로 피하면서 추월을 허용해주고 추월이 끝나면 다시 1차선으로 들어 오곤 했다.

차 성능으로 보면 충분히 더 빨리 갈 수 있지만 본인이 급히 갈 일이 없으면 뒤차가 작은 차라도 거리낌 없이 2차선으로 비켜주곤 했다.

이러한 것들이 아우토반의 효율성을 높이고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것 같았다.

또한 아무리 길이 막혀 교통체증이 심한 경우에도, 길이 익숙지 않아서 갑자기 차선 변경을 할 때에도 아무 방해 없이 양보해 주곤 했다.

대학 졸업 후 십수 년을 지방에 있다가 처음 서울 시내에서 운전할 때가 기억난다.

길을 잘 몰라 헤매는 것은 기본이고, 자동차 전용도로인 올림픽대로를 다닐 때 차선 변경에 많이 애를 먹곤 했다.

나중에 친구들이 알려준 요령은, 깜박이를 켜기 전에 먼저 머리를 들이밀 것.


에피소드 4. 선진국에는 선진 교통 문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 사람이나 독일 사람들은 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와 마찬가지로 주 도로가 지선도로에 우선권이 있다.

처음 독일에서 운전할 때 주 도로를 달리면서도 항상 오른쪽의 지선도로를 살피며 운전하곤 했다.

지선에서 차가 나올 듯 싶으면 속도를 줄여가면서.

여러 번 지선도로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차를 보면서 속도를 늦추어 정지할 준비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독일 운전자들은 빠르게 내려오다가 정확하게 정지선에 차를 세우곤 했다.

너무 빠르게 내려와서 충돌할까 봐 여러 번 놀라기도 했었다.

거꾸로 한국 운전자들은 국내처럼 지선도로에서 슬금슬금 나오다가 충돌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법을 믿고 철저히 법대로 움직이는 독일 사람들과 법을 지키면서도 융통성을 발휘하는 한국 사람들이 묘하게 대비되었다.

독일은 속도위반에 대한 벌칙이 엄청나다. 국내처럼 규정 속도 초과 10㎞마다 범칙금이 부과되는 게 아니라 규정 속도의 몇 %를 초과하느냐에 따라 범칙금이 부과된다.

즉 고속도로에서는 제한 속도가 높기 때문에 조금 여유가 있지만 주거 지역에서는 다르다.

독일 사람들은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은 8시에 취침하고 성인들도 조용히 지내는 편이다.

그래서 마을 입구나 마을 내에서는 제한 속도가 30㎞인 경우가 많다.

즉 40㎞만 돼도 30%를 초과하기 때문에 범칙금이 상당해서 제한 속도를 지킬 수 밖에 없다.

속도위반일 경우 잠시 시야가 안 보일 정도로 강한 플래시가 터지면서 촬영되기 때문에 발뺌할 도리가 없다.

위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무원의 서비스 정신, 법규를 엄격히 지켜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행동들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많은 요건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예전에 비해 등록 차량 수도 많아지고 운전 습관도 많이 좋아지면서 좋은 운전 문화가 정착돼 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