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IP-R&D전략 - 모바일 특허 세계대전과 그 배후
이두희 전문위원
한국지식재산전략원
aidmapat@kipsi.re.kr
성공하는 IP-R&D 전략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한국지식재산전략원간 협력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지식재산전략원에서 제공합니다.
라이트 형제가 제기한 특허소송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을 성공시킨 사람이 라이트 형제(Orville Wright, Wilbur Wright)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비행기 개발에 뛰어들기 전 오랜 시간을 자전거 개발에 투자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1906년 자신들이 개발한 무동력 비행기 ‘1902 글라이더’에 대한 비행 조종 기술과 동력 비행 기술에 대해 미국특허(US 821,393)를 등록했다는 사실과 1909년 미국 최초 비행사인 Glenn Curtiss를 상대로 동력 비행 기술 관련 특허소송을 제기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시 라이트 형제의 경쟁자였던 Glenn Curtiss를 포함한 초기 항공 개척자들은 보조 날개인 Aileron을 비행기 날개에 부가 설치함으로써 라이트 형제가 구현한 날개 비틀기를 이용한 롤 기동 제어 기술을 모방하게 된다.
1908년 7월 4일 Curtiss가 AEA June Bug에서 역사적인 1킬로미터 비행에 성공하자 라이트 형제는 Aileron 장치가 장착된 비행기를 비행하거나 판매하는 행위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나 Curtiss는 라이트 형제에게 특허료를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고 Aileron 장치가 장착된 비행기를 뉴욕에 있는 Aeronautic Society에 판매하였고, 이를 지켜보던 라이트 형제는 1909년 특허 소송으로 대응했다.
또한 라이트 형제는 프랑스 조종사 Louis Paulhan을 포함하여 미국 전시회에서 비행한 외국인들을 동시에 고소했다.
Curtiss 진영 사람들은 “누군가가 공기중에서 손을 흔들면 라이트 형제가 고소할 것이다.”라며 라이트 형제 측을 조롱하기도 했다.
1900년대 초 미국 사회만 하더라도 특허권자 본인이 애써 개발한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이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본인이 취득한 특허권을 정당하게 행사하는 것조차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많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탓에 라이트 형제 또한 일부 승소한 소송 결과와는 무관하게 대중적인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노키아와 애플로 시작된 모바일 특허전쟁
라이트 형제의 특허소송이 일어난 지 정확하게 100년이 흐른 지난 2009년.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세기의 특허전쟁이 세계 모바일 시장에서 또 한 번 일어난다.
매년 핀란드 GDP의 2~4%를 책임지며 오랫동안 전통 모바일 시장의 맹주로 군림해오던 노키아는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를 통해 부활을 꿈꿔 온 애플의 거센 도전을 마주하고 있었다.
1997년 PC 시장에서 적자에 허덕이던 애플은 임시 CEO로 스티브 잡스를 재영입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7년 6월 29일, 스티브 잡스는 iPhone을 세상에 내놓으며 오랫동안 고요히 흘러온 모바일 시장을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간다.
이후 애플은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iPhone을, 태블릿 PC 시장에서는 iPad를 선봉에 내세우며 전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충성 고객을 확보해 나갔고 결국 자신들이 모바일 시장의 새로운 강자임을 알리는 데 성공한다.
2006년까지만 하더라도 제품 및 시장 세분화 전략을 통해 세계 휴대폰 시장의 34% 가량을 점유하고 있던 노키아는 2007년 애플의 iPhone을 필두로 스마트폰 시장에 몰려온 커다란 쓰나미를 적기에 대비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2006년 이후 계속 하락한 영업이익은 불과 5년 사이에 8분의 1 수준까지 폭락했다.
그 누구도 노키아가 모바일 시장의 왕좌를 이렇게 빨리, 그것도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내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노키아는 결국 모바일 특허 세계대전의 그 서막을 알리며 애플을 향해 포문을 연다.
경영 관리 측면에서 바라볼 때 특허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낙엽 더미 속의 희미한 불씨와도 같다.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낙엽 더미 속에 묻혀 있던 불씨는 자연스레 꺼져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디선가 갑작스레 돌풍이라도 부는 날에는 순식간에 활화산처럼 타올라 순식간에 주변 낙엽을 삼켜 버린다.
평상시 조용하게 유지되던 시장 지배 구조도 누군가에 의해 그 질서가 깨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시장 균형이 깨지는 순간 감춰졌던 특허도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일반적으로 시장에는 그 시장을 주도하는 자, 그를 뒤쫓는 자, 잠재적 강자 등 힘의 질서를 이루는 다양한 주체들이 균형을 유지하며 존재한다.
주도하는 자와 잠재적 강자가 일치할 때 시장 질서는 안정적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주도하는 자와 잠재적 강자가 불일치하게 되면 시장의 불확실성은 커지게 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기존 시장을 주도하던 자는 잠재적 강자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무기고에 있는 특허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모바일 시장을 주도하던 노키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플을 향한 선전포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애플에 비해 두 배에 달하는 시장 점유율을 점하고 있던 노키아였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iPhone, 태블릿 PC 시장에서의 iPad로 중무장한 애플이 세계 각지에서 승승장구하며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자 다급해진 나머지 무선통신 관련 특허들을 무기로 반격을 꾀한다.
위기를 특허로 돌파 해보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노키아의 대응전략을 충분히 예측하고 철저히 준비해 온 애플에게 노키아와의 싸움은 가벼이 몸을 푸는 시간으로 그 의미가 충분했고, 2011년 협상을 통해 분쟁을 해결함으로써 기본 통신기술 특허로부터 초래되던 불확실성을 상당 부분 감소시키는 효과를 톡톡히 봤다.
영원할 것만 같던 노키아의 휴대폰 제국은 특허 소송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며 오래지 않아 결국 패망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앞서 살펴본 라이트 형제와 Curtiss의 사례와 같이 노키아와 애플 간의 소송도 전혀 다른 두 길을 가던 시장 주체들이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경쟁관계로 급변할 수 있음과 동시에 이로 인한 결과가 어느 한쪽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실 노키아가 애플에게 특허소송을 제기하던 2009년까지만 하더라도 지켜보던 많은 이들은 이번 전쟁을 피쳐폰 대표주자 대 스마트폰 대표주자 간의 싸움 그 이상으로 바라볼 근거는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2010년 봄, 애플이 이 전쟁의 당사자가 노키아 하나만이 아님을 지적하며 대만의 HTC를 호명하는 순간, 우리는 이 전쟁이 단순히 구시대 대표주자와 신시대 대표주자 간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고, 이 전쟁에 임하는 애플의 전략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렇듯 우리가 이 전쟁의 실질적 당사자가 노키아와 애플에 국한되지 않고 훨씬 더 많은 주체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HTC가 안드로이드 진영에서 차지하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2008년 10월 세계 최초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스마트폰 ‘G1’을 출시한 HTC는 안드로이드의 존재감을 처음으로 시장에 알린 최초의 제조업체였다.
다시 말해 애플이 iOS 기반의 iPhone을 판매하기 시작한지 21개월 만에 안드로이드 기반의 구글폰이 등장한 것이다.
훗날 구글폰, 특히 삼성전자의 갤럭시 시리즈가 iPhone과 경쟁 할 수 있었던 것도 구글이 글로벌 휴대폰 제조사들에게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것이 본격적인 모바일 특허 세계대전의 단초가 되었다.
HTC를 호명함과 동시에 애플의 안드로이드 진영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애플이 HTC를 호명한 이유가 휴대폰 후발제조업체로서 안고 있는 특허 분쟁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한 가지 목적만 있었던 건 아니다.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들에게 소송부담 및 판매금지의 압박을 가함으로써 안드로이드가 법적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던져 경쟁 우위의 운영체제를 확보하겠다는 또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었음을 간과해 서는 안 될 것이다.
HTC와의 1라운드가 한창이던 2010년 10월.
노키아의 쇠퇴를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휴대폰 강자 모토로라 모빌리티(이하 “모토로라”라 칭함)는 애플의 숨은 의도를 확인하자 애플을 향해 선공을 가한다.
모토로라는 2009년 9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두번째 구글폰 ‘DROID’를 출시하면서 구글폰이 판매량에서 iPhone을 능가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애플 입장에서는 HTC와의 교전을 시작한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모토로라와의 2라운드를 치러야 했다.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성공적으로 시장에 진입한 삼성전자는 조용히 자기 땅을 넓혀 가고 있었다.
앞선 2라운드에서 충분히 몸을 푼 애플은 삼성전자의 시장 점유율이 눈에 띄게 확대되자 2011년 4월 마침내 iPhone의 독창적 디자인을 무기화한 디자인특허와 Trade Dress를 앞세워 삼성전자와의 3라운드를 시작한다.
모바일 특허 세계대전의 배후
이렇게 수차례에 걸친 어마어마한 모바일 특허 세계대전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주체가 과연 표면에 드러난 애플을 포함한 몇몇 회사들뿐이었을까?
만약 누군가 승전하더라도 그 결과가 그들에게만 이로운 것이었을까?
우리는 이쯤에서 표면적으로 이들이 주도한 것처럼 보여지는 모바일 특허 세계대전의 배후에 과연 누가 있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스마트폰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시절로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때는 바야흐로 2005년, 한국을 세계 휴대폰 시장의 중심으로 안내했던 CDMA 기술이 점차 시장에서 빛을 잃어가고 GSM과 WCDMA 기술이 대체 기술로 각광받기 시작하던 시절.
세계 검색시장을 평정한 구글은 모바일 시장에서 꿈틀대던 작은 변화의 물줄기에 주목하고 조용히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2005년 7월, 마침내 구글은 그 유명한 스탠퍼드 대학이 자리하고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팔로알토에 소재한 작은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하나를 인수한다.
이 업체가 바로 애플 엔지니어 출신인 Andy Rubin이 공동 설립한 안드로이드사이다.
훗날 2010년 Andy Rubin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언론과 나눴던 인터뷰에 따르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개발을 완료하고 구글에 넘기기에 앞서 2005년 삼성전자를 먼저 방문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Andy Rubin은 삼성으로부터 안드로이드사 인수 제의를 거절당했고 결국 회사를 구글에 팔고 본인은 구글 모바일 부문 수석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애플 진영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구글 진영에 가담하게 된다.
만약 그 당시 구글이 아닌 삼성이 안드로이드를 인수했더라면 삼성의 시장 포지션은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지지 않을까?
Andy Rubin 또한 구글이 아닌 삼성을 위해 충성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드로이드 인수를 완료한 구글은 2007년 11월 전통적으로 취해오던 개방형 전략을 스마트폰 응용프로그램 장터 정책에서도 그대로 유지할 것임을 밝히며, 삼성전자, HTC, Motorola, LG전자, Intel, Qualcomm 등과 컨소시엄을 형성해 오픈 핸드셋 얼라이언스(Open Handset Alliance)라는 구글동맹을 결성한다.
승인을 얻은 제품만 거래를 허용하던 애플의 폐쇄적 플랫폼 정책과 달리, 구글은 누구나 자유롭게 응용프로그램을 만들어 팔 수 있도록 하는 개방적 정책을 펼치며 애플의 응용프로그램 장터 규모를 빠른 속도로 잠식해갔다.
구글의 철학은 기기 제조와 응용프로그램 거래 등 모든 분야에서 개방을 통해 소비자와 파트너들이 원하는 대로 소비자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글의 개방성 플랫폼 전략이 모바일 시장에서 힘을 얻는다면 이로 인해 가장 큰 위협을 느끼게 될 경쟁자는 애플이 아닌 마이크로소프트였다.
폐쇄성 플랫폼 전략을 취하고 있는 애플과 달리 구글과 동일한 개방성 플랫폼 전략을 펼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이번 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시장을 바라보는 이들의 지배적 견해였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본인들이 운영하는 운영체제에 대해 스마트폰 제조사들로부터 선택 받는 입장이었고, 이 점 때문에 안드로이드를 기반으로 한 구글폰의 시장 확대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폰의 시장 축소로 바로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 입장에서 시장 확대를 꾀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구글동맹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때마침 애플도 몇가지 이유로 인해 스마트폰 제조사들과의 전쟁이 불가피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구글동맹을 공동의 적으로 삼을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여기에 자바 특허를 보유하고 있던 오라클이 반구글진영에 추가로 가담하면서 구글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한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완성되기 시작한다.
이들 세 회사가 합심해서 일제히 구글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더라도 구글은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세 회사가 직접 얻을 수 있는 실익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글이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들을 상대로 개방성 플랫폼 전략을 펴려고 하는 직접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세상 어떠한 전략도 약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 구글과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들 간의 연결고리만 끊어낸다면 반구글진영에게는 더 없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므로 바로 이 부분이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및 오라클 세 회사가 집중적으로 공격해야 할 포인트이다. 시나리오는 대략 이렇다.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 회사 각자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전략으로 힘을 모았다.
첫째, 애플은 구글과 연결된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를 상대로 직접 특허전쟁을 벌여 그들에게 소송부담을 증가시키고 판매금지의 압박을 줌으로써 안드로이드 제품이 법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운영체제라는 메시지를 시장에 던지는 역할을 담당한다.
둘째, 마이크로소프트는 구글과 연결된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를 상대로 직접적으로 법정에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서 간접적인 라이선스 협상을 통해 이들을 압박함으로써 이들에게 퇴로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셋째, 오라클은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하면서 획득한 자바언어 관련 특허들을 무기로 구글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구글이 안전한 플랫폼 전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들 사이에 불안감을 조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실제로 이들 세 회사는 2009년 4월 이후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구글동맹과의 혈전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일지 모르지만 2015년 5월, 글로벌 브랜드 리서치 회사 Millward Brown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세계 1위 브랜드 가치 기업으로 약 2,470억 달러의 애플이 선정되었다.
2014년에 1위를 차지했던 구글은 1,588억 달러로 2위를 차지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모바일 특허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특허분쟁의 양태가 점점 더 진화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들도 진화하는 글로벌 특허분쟁의 추이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는다면 노키아가 겪었던 뼈아픈 고통을 똑같이 경험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세기의 모바일 특허 세계대전이 우리 기업들에게 어떤 결말과 교훈으로 다가올지 계속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