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2

특별기획 02 - 기업 R&D 활성화를 위한 공공 R&D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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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R&D의 효율성 극대화를 위한 첫걸음은 공공-기업의 역할 분담에 있다.

과거 기업 R&D가 기초·원천 분야에서도 빼어난 성과를 창출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20세기 후반 이후 확대되고 있는 공공-기업 R&D의 경합성은 자꾸 단기 사업화쪽으로 넘어오는 공공 R&D의 방향성 때문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한국의 공공 R&D가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업혁신의 플랫폼이 되는 기초·원천 기술개발에 충실해야 하며, 차제에 R&D 정책의 패러다임을 과제 중심에서 인력 지원 중심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들어가며

공공 R&D에 대한 설명논리(Rationale)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국가 안보, 환경, 인프라 등과 같은 공공의 미션을 위해 과학기술과의 접점이 필요한 고유한 분야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설명은, 기술 지식은 공공재(Public Goods)이기 때문에 결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최적 수준만큼 생산될 수 없다는 경제학자의 논리에 기인한다.

하지만,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도대체 공공 R&D가 왜 필요한가”라는 원론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분들을 꼭 만나게 된다. 이들의 생각과 경험에는, 위 두 가지 답변이 주는 (+) 효과를 충분히 압도할 만한 (-) 효과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공공 R&D에 의한 기업 R&D의 구축(Crowding-Out)으로 표현할 수 있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기술개발을 공공자금으로 한다’라는 공공-민간 R&D의 대체성에서 비롯된 약간은 도덕적인 문제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히나 저성장이나 성장정체가 장기화되고 있는 요즘 더욱 절박하게 들리는 것은, 어려운 살림을 쪼개서 기존제품을 혁신하고 새로운 사업 기회를 발굴하려는 기업들 입장에서 볼 때 소위 ‘눈먼 돈’으로 어중간하게 기술개발 시장을 왜곡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방향을 잃은 공공 R&D가 산업과 시장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중장기 시장지배력에 대한 잘못된 소비자의 선택(Selection)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글로벌 기초·원천기술개발 흐름의 변화 속에서 한국 공공 R&D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짚어보고, 이를 위한 바람직한 정책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공공 R&D와 기업 R&D의 역할 변화

(1) 기초·원천 기술개발의 주도권 이동

1900년대 초반 공공부문의 투자는 인프라 부문에 대한 기술개발을 포함한 활동이었고, 중장기 국가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테네시강 유역개발 사업은 댐 건설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는 토목사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미국 가전·IT 산업 경쟁력의 기반이 된 전력 인프라의 구축을 의미했다.
 
독일의 아우토반 역시 20세기 독일 자동차 산업01의 토대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편, 1900년대 초반은 기업의 기술경영이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유명한 개인발명가로서 GE 중앙연구소 소장이 되었던 에디슨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기업 R&D의 초기 형태는 당장 돈이 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개인의 상상력을 포함하여 중장기 혁신의 단초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대상이 되었다.

당시 기업 R&D는 안정적인 모기업의 독점이윤을 재원으로 하여 기초부터 사업화 분야까지 폭넓게 운영되었다.

1925년 설립되어 통신과 네트워크 시스템 분야의 최고 연구소로 자리매김한 벨랩이 대표적이다.

AT&T를 모기업으로 했던 벨랩02은 노벨상을 총 8회 수상하는 등 전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기술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는데, 정보산업의 기초가 된 이진법 구조, 최초의 솔라셀 등이 ’50년대의 대표성과였으며, 반도체산업의 기초가 된 MOSFET(’60s), C 프로그래밍 언어와 UNIX(’70s), TDMA/CDMA기술(’80s) 등이 모두 벨랩에서 개발된 원천기술이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독점기업에 의한 대규모 펀드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기초·원천분야에서 민간 R&D의 비중이 줄어든다(  그림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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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랩의 경우, 모기업이었던 AT&T가 분해되면서 2만명 수준의 연구인력이 천명 수준으로 급감했으며, 상용화가 용이한 응용기술개발을 확대하는 “목적지향적 기초연구(Directed Basic Research)”로 지향점을 수정한다.


(2) 공공 vs. 기업 R&D의 경합성 증가

 그림 2  는 IT 기술 중 대표적인 원천연구 분야와 공공(대학), 산업 R&D의 진입 시기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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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대표하는 원천분야 기술의 공통점은 본격적으로 기업 R&D가 시작하기 5~10년 전에 공공 R&D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인터넷이나 무선통신기술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기술이 이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데이터 베이스, 컴퓨터 아키텍처 기술 등에서는 공공과 민간 R&D의 시차가 없어지며 오히려 역전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이는 비단 시기가 중복되는 문제가 아니라, 공공-기업 R&D의 경합성이 증가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흐름에서 볼 때, 공공 R&D의 대상이 사업화·상용화 기술개발로 옮겨오게 된 것이 경합성 증가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공공 R&D에 대한 제언

2000년대 한국 R&D투자의 연평균 증가율(8.8%)은 미국(2.3%), 일본(1.5%)보다 4~6배 빠르게 나타났다.03

하지만, 한국의 공공 R&D 예산은 약 137억 달러(2013년 기준)로, 미국(1,335억 달러)의 10%, 일본(368억 달러)의 37% 수준에 불과하다.04

즉, 절대 규모의 격차 때문에, 우리나라 공공 R&D가 앞으로도 연평균 8.8%씩 증가하고 미국, 일본도 과거와 같은 1~2%대로 증가한다는 다소 무리한 가정을 해도 우리가 이들과 같은 수준이 되려면 각각 15년(일본), 37년(미국)이 걸린다.

또한, 글로벌 국가전체 R&D 지출액 중 공공자금 비중은 중장기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트렌드를 보이고 있으며,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는 2000년대 이후 약 30%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림 3  참조)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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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공 R&D가 양적으로 지금의 선진국들을 추월하기 어렵고, 또 단기적으로 획기적인 비중의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결국 공공 R&D의 경쟁력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효율화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기업 R&D의 역할 분담이 최우선으로 필요하다.

본질적으로 수익에 기여하지 못하는 R&D는 불필요하게 취급되는 기업과 달리 공공 기술개발에서는 사업화 前단계의 기초·원천 기술개발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특히, 공공 R&D는 민간의 또 다른 혁신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초·원천의 플랫폼 기술개발에 보다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리고 수행과제의 성과를 중심으로 공공 R&D를 민간에 이전하려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정부가 직접 R&D 인력을 기업에 공급하여 중장기적인 민간 R&D역량 확보를 지원하는 것도 전향적으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1) 민간 혁신의 플랫폼 기술개발을 지원하라

산업의 성숙도가 높아질수록 기업 R&D가 점차 안정 지향, 즉 저위험-저수익 기술의 사업화 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술혁신의 동태적 모형의 설명방식을 따르자면, 이미 지배적디자인(Dominant Design)이 형성된 시장에서는 불확실성이 대부분 해소된 상태이기 때문에 제조의 효율성이나 부분적인 기능의 개선이 기업 R&D의 목적이 되는 것이 당연시된다.

또한 기업 입장에서도 기초부터 응용, 사업화까지 전부 In-House에서 수행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체감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글로벌 기업의 중앙연구소의 위상이나 역할 변화에서 잘 나타난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공-기업 R&D의 경합성이 이슈가 된다는 것은, 공공 부문의 연구개발 노력이 기업과 같은 방향, 즉 단기 수익성 창출 중심으로 옮겨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단기적 사업화를 추구하는 R&D과제는 가시적인 성과도 보일 뿐만 아니라 지원하기도, 관리하기도 쉽기 때문에 공공 R&D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공공 R&D는 민간의 혁신을 유발할 수 있는 원천기술의 플랫폼 개발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얼마의 기술료 수입은 기업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며, 공공 R&D는 새로운 혁신 도메인을 개척하는 형태의 큰 담론을 중심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즉, 공공 R&D를 통해 발굴한 새로운 도메인 위에서 다양한 기업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R&D 분업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기초·원천 연구 분야에 대한 공공 R&D를 수행하는 경우, 기업 주도로 전략 연구 분야를 기획, 평가하고 대학과 정부연구소가 이를 수행하는 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공급자끼리 기획하고 평가하는 구조로는 공공 R&D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술개발성과의 수요자인 기업이 니즈 발굴(기획)과 만족도 조사(평가)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공공부문이 수행한 R&D 성과물을 민간에 자연스럽게 이전시키기 위한 제도 보완과 함께, 국가혁신체제 내에서 사업화를 담당하는 기업은 공공부문에서 개발된 기술을 사업으로 연결하는 글로벌 최고 수준의 실행 역량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2) 과제보다는 R&D 인력을 지원하라

지금과 같이 과제 중심의 R&D 지원 패러다임이 본격화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전후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 국방기술체계의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관리기법이 바람직한 모델로 인식되었으며, 자연히 고위험 분야에 대한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시도들이 줄어들고, 이른바 ‘관리’되기 쉬운 R&D 활동이 증가하게 되었다.

기획-수행-평가라는 일련의 과정이 체계화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R&D의 관리 단위로서 과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저성장기 또는 성장 정체기에 접어든 것으로 전망하는 2010년대 중반, 과제 중심의 R&D 지원 패러다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기술개발과 수익창출을 목표로 하는 R&D과제가 관리하기 쉽고 성과 측면에서 돋보일 수는 있어도, 공공 R&D가 지향하는 기초·원천 기술개발과 신산업 발굴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혁신적 발명’이라고 불릴만한 ‘큰 기술’에 대한 정책 지원이 어렵다면, 차라리 이 기회에 과제가 아닌 ‘사람’ 중심의 R&D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신규 채용하는 기업 R&D 인력에 대한 인건비를 한시적으로 지원06하여, 향후 그 인력을 통해 기업의 혁신과 기술경쟁력 선점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의 도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정책 방향의 변화는 고용 확대를 최우선으로 하는 작금의 정책 기조와도 직접 부합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공공 자금에 의한 민간 혁신성과 극대화를 이루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맺음말

국가경제의 성장과 혁신을 위해 마중물 역할을 수행했던 성공적인 공공 R&D의 경험은, 아마도 1900년대 초반 대공황기의 인프라 투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전력과 철도·도로로 대표되는 당시의 성과물은, 이후 100년 동안의 혁신과 경제성장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정부 정책의 핵심을 국가경제의 총공급 측면에서 보면, ① 공공 R&D를 통해 당시 첨단 기술 분야였던 철도, 도로, 전기(수력) 등 인프라를 건설하여 후속 혁신의 씨앗(Seed)을 심은 것과, 총수요 측면에서 보면 ② 정부가 직접 인력을 고용하여 국민의 소득을 늘려주면서 소비를 진작시킨 것이다.

여기서 교훈을 얻는다면, 지금 공공 R&D가 지향해야할 방향은 명확하다.

기업 R&D와의 경쟁을 지양하고 민간의 후속 혁신을 유발할 수 있는 기초·원천기술의 플랫폼 연구를 통해 큰 혁신을 선도해 나가는 것과, 차제에 차라리 정부가 직접 민간의 후속 혁신을 추진할 수 있는 인력 공급을 지원하는 것으로 R&D 지원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급변하는 시기에, 공공 R&D의 역할 재정립과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선제적 정책 대응을 통해 기업의 혁신이 활성화되고 나아가 국가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01 2차 세계대전 연합국 병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슈투카(Stuka) 폭격기나 티거 전차 등 국방 분야 원천기술이 민간 이전되어 전후 글로벌 고급 자동차 시장을 석권한 메르세데스 벤츠, BMW, AUDI 등 독일 자동차 회사들의 핵심기술이 되었는데, 이는 1900년대 초반 건설된 도로 인프라 위에서 파생된 혁신으로 볼 수 있다.

02 미국 뉴저지에 본사를 두고 있으나, 2006년 이후 프랑스 통신사 Alcatel-Lucent를 모기업으로 하고 있음

03 2000~2012년 실질 증가율.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2015.1). p.6

04 2015년판 산업기술주요통계요람.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05 “Federal R&D Budget Trends” (2015.1).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AAAS)

06 1960년대 후반 석탄, 철강 등 주력산업의 위기를 겪은 독일은, ’79~’87년 PKZ, ZF 등 연구개발 인력의 인건비 보조금 정책을 통해 총 32억 DM(약 4.5조 원)을 중소·중견기업에 집중 지원함으로써 “연구개발 인력 증가 → 민간 기술혁신 활성화 → 기업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창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