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다 - 앤디 워홀의 팝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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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박은몽 소설가
세계 팝 아트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앤디 워홀의 전시가 봄부터 계속되고 있다.
그는 깡통, 지폐, 유명 스타 등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소재를 그대로 예술의 소재로 삼고,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무한 복제하는 작업 방식을 통해 팝 아트를 분야를 활짝 열었다.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그의 팝 아트가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 주었던 것이다.
1962년 8월 4일 미국의 섹시 심벌 마를린 먼로가 죽었다. 사인은 약물과다복용이었다.
아름답던 그녀의 몸도 빛나던 미소도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는 죽음을 둘러싼 의혹도 없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하면서도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녀이지만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 미술가의 손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죽은 마를린 먼로의 모습을 수십 점의 초상작품으로 되살려낸 미술가가 바로 현대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다.
앤디 워홀은 마를린 먼로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녀를 소재로 50여점의 초상작품을 수개월에 걸쳐 만들어냈다.
그때 그려진 먼로의 초상 가운데 특히 < 금빛 마를린 먼로 >라는 작품에서는 황금빛 공간에 둘러싸인 먼로의 모습이 신비롭게 보인다.
먼로의 신화는 이렇게 앤디 워홀에 의해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아름다움과 젊음의 상징으로서 완성되었는데, 앤디 워홀은 여배우의 화려한 이면의 덧없음까지도 포착하고 있었다.
"나는 상업 미술가로 시작했고, 비즈니스 미술가로 마감하고 싶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 앤디 워홀
공장에서 찍어 내는 예술작품
누구나 한번쯤 수십 개의 마를린 먼로 초상이 합쳐서 하나의 화면을 이루거나 수십 개의 깡통이 합쳐져 하나의 스크린을 이루는 팝 아트 작품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를 떼어서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수십 개가 하나의 스크린을 이루는 작품은 색다른 감흥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앤디 워홀의 팝 아트(Pop Art, Popular Art, 대중예술)이다.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미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이민 2세로 태어났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광고 제작 등 상업미술가로 성공을 거둔 다음 순수미술로 전환하였으나 그의 작품은 처음엔 뉴욕에서 외면당했다.
고상한 화풍만을 중시하던 뉴욕 미술계에서 인정받기에는 앤디 워홀의 작품이 전혀 고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은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병, 달러 지폐, 할리우드 스타 등의 초상화 등을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제작하는 것을 즐겨 했다.
심오한 철학이나 쉽게 이해하기 힘든 화풍 같은 것은 그의 작품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계가 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마인드를 가진 아티스트였다.
초기에 주목받았던 < 캠벨 수프 통조림 >이란 작품에 그런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났다. 미국인이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식사 때마다 애용하던 캠벨 수프 통조림.
앤디 워홀은 “지난 수십 년간 캠벨 수프가 나의 점심 메뉴에서 빠진 적이 없다. 앞으로도 똑같은 일을 되풀이할 것이기 때문에 캠벨 수프를 다루었다.”고 했는데, 통조림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무한 복제해 낸 그의 작품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매료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인의 정체성이 사라진 현대사회와 산업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일반 대중의 생활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한 그의 작품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미술이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미술이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일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되었다.
현대 사회를 예리하게 포착한 예술
앤디 워홀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유명인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던 데에 있다.
초상화는 당시로서는 이미 사장된 장르였다.
추상화, 현대미술이 나온 이후 초상화는 그다지 각광받지 못했는데 앤디 워홀의 독특한 화풍에 매료된 사람들이 너도나도 앤디 워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게 된 것이다.
순수미술로 전환한 초창기부터 배트맨, 슈퍼맨 등 유명 만화의 인물 시리즈를 즐겨 그린 앤디 워홀은 마를린 먼로, 무하마드 알리, 공산주의자 마오쩌둥 등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럴수록 앤디 워홀의 명성은 높아졌다.
유명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모습을 앤디 워홀의 화풍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일상 속 소재를 예술의 세계에 접목시키고 유명인들의 모습을 통해 대중들에게 더욱 다가간 앤디 워홀.
그러나 그의 작품이 단순히 대중성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현대사회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 미술의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미래에는 누구든 15분간(즉 아주 짧은 동안)의 유명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앤디 워홀은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이 말은 이제 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감하는 말이 되었지만 수십 년 전에 한 미술가가 이러한 예지의 말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그만큼 그는 현대사회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사회의 속성을 예리하게 간파한 그의 팝 아트는 지금의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