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2

02 - 병원의 인간 중심 경험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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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규 팀장
서울아산병원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
opdsk@amc.seoul.kr



의료인으로 환자를 보기에 앞서서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나에게 어떤 것을 바라고 있을지에 대한 직원 개개인의 공감(Empathy)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먼저이고 이것이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의 인간 중심의 고객경험 디자인의 핵심이다.

서울아산병원이 시작하는 인간 중심의 고객경험 디자인을 사례를 통해서 살펴본다



들어가며

우리가 말하는 ‘최고 병원’의 기준이 친절하고 최첨단 장비와 서비스 마인드로 무장된 최고 실력의 의료진, 진료에서 검사, 진단, 수술에 이르는 완벽한 치료 시스템이라고 할 때 고객이 되는 환자와 보호자가 바라고 인정하는 ‘최고 병원’의 가치가 다르다면 지금까지 우리의 노력들은 헛수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 의료 수준은 JCI 국제 기준의 세계 선진의료 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하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가? 아직까지 국내병원은 저수가 체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공급자 중심의 효율성이 우선되는 진료 프로세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환자는 약자가 된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자들로 진료 대기시간이 마냥 늘어나도 이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1시간의 기다림 뒤에 의사의 진료시간은 고작 3분을 넘기 어렵다.

의사와 눈을 마주치는 것은 큰 사치다. 3분 진료에 무엇을 찾아낼까 의구심이 들지만 말 한마디 쉽게 꺼내지 못한다. 막상 한마디라도 물어볼라치면 “간호사가 설명해줄 겁니다.”가 답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많은 병원은 ‘환자 중심의 병원을 만들겠습니다’, ‘환자를 내 가족같이’라는 슬로건을 병원 곳곳에 내걸고 있다. 무엇이 ‘환자 중심’인가?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것, 이노베이션의 시작입니다

환자들에게 ‘최고 병원’은 어떤 병원입니까? 이 단순한 물음에 우리는 선뜻 답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한번도 환자의 눈으로 바라본 적도 물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최고 병원은 어떤 병원일까요? ① 명의가 많은 병원 ② 최첨단 의료장비가 많은 병원 ③ 의료실적이 좋은 병원 ④ 친절하고 깨끗한 병원 ⑤ 연구실적이 좋은 병원 ⑥ 기타 중에 골라주세요.

우리는 항상 이렇게 물어봤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읽고 들여다보기 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최고 병원’에 대한 가치를 강요해왔는지도 모른다.

세계적 디자인 기업으로 ‘혁신’을 대표하는 IDEO는 ‘혁신은 보는것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고객은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고 정
확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기 때문에 IDEO는 전통적인 시장조사보다 직접 발로 뛰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 주의 깊게 관찰하는 시간을 통해서 인사이트를 얻는 것이 혁신의 출발점이라고 지적한다.

서울아산병원의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마음, 의료진의 눈이 아닌 환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숨겨진 니즈를 파악하는 인간 중심 사고(Empathy)를 통해 최고의 경험을 선물하는 것이 바로 ‘인간 중심의 고객경험 디자인’ 이다.


인간 중심의 고객경험 디자인 철학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의료기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에 관한 이야기와 ‘Patient First’로 상징되는 클리브랜드 클리닉의 혁신활동은 이제 국내 의료계에서도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2008년 설립된 메이요 클리닉의 혁신부서인 ‘Center For Innovation(이하 CFI)’은 ‘환자의 니즈가 최우선(The Needs of Patient Come First)’이라는 메이요 클리닉의 최우선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의료의 전달 과정과 경험을 바꾸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병원 혁신의 모델로 자리하고 있다.

2006년도에 만들어진 클리브랜드 클리닉의 ‘Office of Patient Experience(이하 OPE)’ 역시 ‘Patient First’를 최고의 지향 가치로 삼고 ‘환자는 이 병원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그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라는 핵심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병원 혁신을 선도하고 있는 메이요 클리닉과 클리브랜드 클리닉은 약간의 방법적인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두 병원 모두 자신의 병원을 찾은 환자에게 좋은 고객경험을 제공하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의 인간 중심의 고객경험 디자인은 메이요클리닉과 클리브랜드 클리닉이 환자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노력과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는 환자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고 환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방법적인 고민에 앞서 환자이기 전에 먼저 그들이 존중 받아야 하는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의 ‘인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병원에 들어선 순간 환자는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이기 보다 의료진에게 몸에 퍼진 병균을 제거해야 하는 치료의 대상 ‘일’ 업무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면 환자에게 만족할만한 고객경험을 제공하는 것 역시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IDC의 인간 중심 고객경험 디자인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환자의 숨겨진 니즈를 찾아내고 이에 대한 개선이 아니라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바라봄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문제해결 방안을 통찰력이 있게 디자인하는 것이다.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혁신의 시작이다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거창한 것을 시작하기보다는 빠르게 실행이 가능한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성공 경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지금부터는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에서 지난 2014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행한 크고 작은 프로젝트 가운데 의미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퇴원 후 문의 대응 프로젝트

‘퇴원 후 문의 대응’ 프로젝트는 병동 간호사에게는 큰 스트레스이자 업무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일 중의 하나인 퇴원환자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문의 전화를 해결하는 프로젝트다.

‘간호부 누구나 이구동성 한 목소리로 제발 해결해달라는 요청이었기에 짧은 시간 안에 쉽게 해결이 가능하리라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문의전화의 많은 부분은 퇴원 후 일어나는 여러 가지 증상과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의가 차지하고 있었고 기타 많은 부분이 굳이 병동 간호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예약이나 행정처리 등이었다.

전화문의의 원인은 환자가 알아야 할 정보가 부족하거나 정확하게 인지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환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복약안내문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그림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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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주로 문의하는 내용을 토대로 퇴원 후 자가관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는 ‘퇴원 후 생활안내문’을 시범제작하고 효과를 검증한 뒤 전사 적용키로 하였다.


(2) 복약 횟수 줄이기

‘복약 횟수 줄이기’ 프로젝트는 이 간단한 말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중증 환자가 많은 우리 병원은 수술을 하거나 치료를 마치고 퇴원할 때 정말 약을 한 보따리 싸가지 간다고 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장기 이식 환자는 하루에 12번까지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매 식전 식후를 떠나서 시간대별로 구분되어 있는 약 시간을 지켜 먹기란 젊은 사람한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중증 환자의 경우에는 약을 빼먹을 시 나쁜 상황이 발생 할 수 있기 때문에 병동으로 전화해서 의사를 찾는 경우가 많고, 외과의사의 경우 보통 수술실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연락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간호사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 진땀을 빼기 일쑤이며 욕을 먹는 경우도 태반이다.

말이 쉬워 ‘약 먹는 횟수를 줄이면 되지’라고 말하지, 처방권을 가지고 있는 의사한테 그것도 외과의사한테 누가 이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권한을 비전문가인 우리가 얘기한다면 먹힐 것인가? 누구도 선뜻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뻔한 결과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의사가 허락하지를 않을 것이고 과 내 전체 의료진의 동의를 얻기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며 여러 가지 유관부서들이 늘어나는 일로 반발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루 복용약이 가장 많은 장기이식 파트의 의사를 만났다.

현재환자들이 약 횟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고 약을 놓치는 경우가 발생하면 환자의 안전과 빠른 회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의사가 복약 횟수를 줄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예측은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너무도 흔쾌히, 아니 12번에서 반만 줄여도 성공이라는 우리의 제안에 앞서서 할 수만 있다면 4번 이하로 줄이자고 적극적인 도움을 약속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각 직종 간의 특성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서로를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과 부족한 신뢰 때문에 환자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것은 없는지 뒤돌아 볼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신장 이식 환자와 간 이식 환자를 시범 운영한 결과 약 먹는 횟수가 최대 12번, 6번으로 주는 경우도 있고, 평균 9번이 6번으로 줄어들었다. 이해 관계자인 의사와 환자와 간호사, 약사 모두 대만족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최대 수혜자는 환자와 환자를 챙겨야 하는 보호자이기도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약사는 약을 포장하는 업무가 줄었으며, 병동 간호사는 약 설명에 할애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또한 환자의 빠른 회복을 누구보다 보람으로 생각하는 의사는 환자가 약을 놓치지 않고 잘 복용함으로써 위험을 감소시켰다는 측면에서 누구에게나 만족스런 결과를 선물했다.


(3) 환자에게 엘리베이터를 돌려주자

대형병원의 경우 엘리베이터는 환자와 직원 내원객과 검사와 수술을 위해 이동하는 환자와 이송반 직원들로 지옥철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검사를 받기 위해 휠체어와 스트레처카로 이동하는 건수만 하루 4,000여 건, 환자들은 엘리베이터를 놓치기 일쑤다.

직원들이 계단을 이용한다면 이러한 적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Small 프로젝트로 시작한 것이 ‘환자에게 엘리베이터를 돌려주자’ 프로젝트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계단을 이용하는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요소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먼저 간단하게라도 재미있는 요소를 넣어 보기로 했다.

휑한 벽면에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글귀를 붙이고 입체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월을 만들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서로에게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메시지 월을 만들었다.

6개 계단을 꾸미는 데 든 비용은 10만 원선이었을 뿐인데 직원들의 반응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누가 이런 것을 병원에 만들었는지 신기해했다. 바쁜 일상에 갇혔던 직원들 사이에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이다. 이 작은 변화가 ‘소통’의 소재가 된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차지하고 있는 직원들이 스스로 계단으로 움직이게 하는 그것, 그것은 건강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자신이 걷는 행위를 기부로 연결시킨다면 어떨까? 부서 간에 서로 경쟁을 붙여서 게임을 하는 것도 이벤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림 2 서울아산병원 계단걷기앱 ‘계단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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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앱을 만들자. 서울아산병원 계단걷기 앱 ‘계단N’은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직원은 계단걷기를 통해서 건강과 기부 활동을 할 수 있고 환자는 직원이 계단을 이용함으로써 엘리베이터 적체로 검사시간을 놓치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병원은 엘리베이터 이용 인원이 줄은 만큼 전기를 절약할 수 있고 기부금을 지원하는 기업은 사회공헌에 참여하는 기업으로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

아직까지는 병원에서 이노베이션은 낯설고 두려운 것이 당연하지만 미래의 자연스런 흐름임을 인정해야 한다.

혁신은 어떤 한 조직을 만들고 그곳에 소속된 직원의 노력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 모두가 환자를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마음이 샘솟을 때 그 마음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병원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