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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아이콘 - 능력만 있다면 허물은 용서한다 - 1,800년 전 조조의 인사 혁신

혁신의 아이콘은 기술혁신과 기업경영에 성공한 글로벌한 인물들의 성공비하인드 스토리를 분석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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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박은몽 소설가


조조(曹操, 155~220)는 중국 한나라(후한)의 정치인으로서 중국 삼국시대를 주름잡으며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가 일찌감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혁신적인 인재 정책이 큰 몫을 했다.

남의 이목이나 명분 등에 구애되지 않고 오직 능력만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한 그의 인재관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차가운 카리스마 리더, 조조

조조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인물도 드물다.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또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지게 마련인데, 조조에 대한 평가 역시 그렇다.

난세의 영웅으로 추앙받다가도 간교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특히 나관중이 쓴 소설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에서는 조조가 상당히 간교한 인물로 그려져 있는데 그 영향으로 현대 사람들에게도 조조를 간교하게 여기는 시각이 많이 남아 있다.

이에 비해 유비(劉備)는 포용력이 있는 인의(仁義)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유비는 도원결의(桃園結義), 삼고초려(三顧草廬) 등의 고사성어를 만들어 냈을 정도로 사람을 귀히 여긴 인물이다.

관우, 장비와 복숭아꽃 만발한 동산에서 의형제를 맺고 “한 날 한 시에 죽자.”고 도원결의를 맺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제갈량이라는 천재적인 인재를 얻기 위해 그의 오두막을 세 번이나 찾아간 삼고초려의 행보는 현대인들에게도 잔잔한 감흥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유비는 측근의 인물들인 관우, 장비, 제갈량 등에게 지나치게 의존도가 커서 보다 광범위한 인재풀을 갖지 못했고, 그 핵심 인재들과의 지나친 친분이 오히려 리더로서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데 발목을 잡기도 하는 등의 한계가 있었다.

그에 비해서 조조의 인재 정책은 현대에 그대로 적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스마트하고 냉정하면서도 혁신적인 면모가 있었다.

특히 그는 유비와 달리 광범위한 인력풀을 가지고 있어서, 한두 명 인재의 운명에 따라 조조의 운명이 흔들리지 않았다.

조조가 광범위한 인력풀을 가지게 된 데에는 공개적인 인재 채용책을 펼친 영향이 크다.

210년 구현령(求賢令)을 공포하고 초야에 묻힌 인재를 발탁하였던 그는 ‘위공’의 지위에 오른 213년에 취사물폐편단령(取士勿廢偏短令)을 공포하고 사상 유래가 없는 대대적인 공개 인재 채용을 펼친 데 이어, 위왕이 된 217년에도 거현물구품행령(擧賢勿拘品行令)을 공포하여 또 한 번 공개적인 인재 채용을 추진했다.

“품행이 단정하다고 해서 반드시 진취적인 것은 아니다. 사소한 허물이 있다고 해도 능력만 있으면 천거하라. 청렴하고 결백해야만 인재인 것은 아니다!”

이것이 조조의 생각이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재관이 아닐 수 없었다.


"품행이 바른 인물이 반드시 진취적인 것은 아니다. 진취적인 인물이 반드시 품행이 바른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이 단점이 있다 하여 등용하지 않을 수 없다."

- 조조의 취사물폐편단령(取士勿廢偏短令) 중에서


학연 지연 초월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재주가 있다면 학연, 지연, 출신 성분 등을 가리지 않고 모두 예우하고 등용한 조조는 심지어 적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조가 한나라 헌제의 어가를 호위하고 허도로 향할 때 이각과 곽사 장수들의 침략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적장 중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그때 조조는 “저 자와 겨뤄 봐라. 무예 실력을 한번 봐야겠다.”면서 자신이 신뢰하는 장수 허저를 내보냈다.

적장의 실력을 테스트해보기 위해서였다. 적장의 실력을 확인한 조조는 자신의 허저 장수를 불러들여 싸움을 멈추게 한 후, 자신의 수하를 적의 진영으로 보내 은밀히 설득 작전을 벌임으로써 적장을 자신의 인재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해서 조조의 사람이 된 인물이 바로 서황이다. 그 후 서황은 조조와 생사를 같이 하는 핵심 인재가 되었다.

또한 서황의 무예를 겨뤄보기 위해 내보낸 조조의 장수였던 허저는 처음엔 장수가 아니라 황건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고자 무장한 백성 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조의 눈에 띄어 장수로 발탁되었다.

조조는 자신의 장수들이 허저를 포승줄에 묶어서 끌고 오는 것을 보고는 “모셔오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화를 낼 정도로 허저를 환대했다.

이름 없는 민초에서 조조의 장수로 발탁된 허저는 평생 조조를 은인으로 섬기며 충성했다.

조조는 사람의 능력을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명분 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자유로운 인재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생활 같은 것은 관여하지 않고 오직 능력 있는 인재를 중시하는 식이다.

그 한 예가 곽가라는 인물이다.

이 나이 어린 인재는 미래까지 내다보는 혜안으로 조조의 브레인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으로 < 삼국지연의 >에서 그려지는데, 아쉽게도 품행이 그리 단정하지 못했다.

조조에게도 막말을 하고 누구를 막론하고 제 뜻과 맞지 않으면 삿대질과 욕설을 해댈 정도였다는 설이 있다.

심지어는 조조의 수하가 곽가의 품행을 문제 삼아 탄핵을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개의치 않았다.

조조는 “능력은 능력대로 중하고 원칙은 원칙대로 중하다.”면서 곽가를 중용했을 뿐만 아니라 곽가를 탄핵한 인물의 원칙주의 또한 칭찬했다.

또한 조조는 불필요한 문책으로 인재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조조는 초기에 별로 승산이 없던 관도대전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함으로써 세력을 크게 넓힌 적이 있다.

그때 적의 진영에서 비밀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비밀문서에는 적과 내통한 조조의 사람들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을 들춰내어 모두 처벌해야 한다는 원성이 자자했지만 조조는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나조차도 이 전쟁에 이기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내가 그랬으니 부하들은 오죽했겠는가. 내가 패할 경우에 대비해 살 궁리를 했을 뿐이다. 모두 불태워 없애라. 내가 더 강해지면 될 일이다.”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친 조조의 용단으로 적과 내통하고도 들키지 않고 목숨을 건진 부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차마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조용히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조조 진영의 결속이 더욱 공고해졌음은 물론이다.

조조의 혁신적인 인재 정책은 당대 또 한 명의 영웅이던 원소나 잠룡이던 유비보다 먼저 중국 대륙의 패권을 향해 앞서 나가는데 큰 동력이 되어 주었고, 치열한 경쟁사회인 오늘날에도 던져주는 메시지가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