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전력 전송의 와해성 혁신, DC GRID
한국의 전력산업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선도자 전략을 채택하고 정부와 기업이 기존의 전통적인 ‘존속성 혁신’ 마인드에서 벗어나 새로운 고객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와해성 혁신자’로서 성공한다면 내수가 막대한 중국이 세계 시장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기회는 충분하다.
박승용 연구소장 (주)효성 중공업연구소 syngpark@hyosung.co.kr
AC 전송방식의 세계 표준화
1895년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와 에디슨(Thomas Edison)의 송전기술 표준을 둘러싼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당시 에디슨의 DC(Direct Current) 방식은 전력 전송 시 발생하는 손실을 저감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여 나이아가라 수력발전소에서 버펄로시까지의 전력 전송에 실패했다.
반면, 웨스팅하우스에 소속되어 있던 과학자인 테슬라(Nichola Tesla)는 변압기를 사용하여 전압을 쉽게 높여서 전송하는 AC(Alternating Current) 방식을 제안하여 전력 전송에 성공하였다.
이 AC 방식의 도입은 전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문명의 젖줄 역할을 하는 전기의 공급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후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변함 없이 전력 전송의 표준으로 견고한 아성을 구축해 왔다.
그러나 고압 교류 송전(이하 HVAC)의 경우, 그 특성상 송전탑을 이용한 원거리 송전 시에는 무효전력 손실이 크다. 또한, 지중 및 해저 송전케이블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무효전력이 증가하여 50km 정도의 단거리 전송만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AC를 이용한 장거리 송전 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DC가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되었다.
에디슨 당시에 DC의 기술적인 한계로 여겨졌던 직류 전압의 승압 문제는 전력용 반도체 소자의 기술발전에 힘입어 해결되었고, 1954년 스웨덴 본토와 고틀랜드(Gotland) 섬을 연계하는 최초의 상용화 HVDC 시스템을 시작으로 고압 직류 송전(이하 HVDC) 시대는 그 서막을 열게 되었다.
HVDC의 발전
이후 HVDC 기술은 전력 반도체 기술발달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초기 ‘수은-아크 밸브’로부터 ‘사이리스터 밸브’를 사용하는 전류형 HVDC로 발전하였고, 최대 800kV, 7.2GW까지 상용운전 중에 있다.
전류형 HVDC는 장거리 대용량 송전분야에서 기존의 HVAC 송전의 단점을 보완하는 솔루션으로 자리잡았다.
최근에는 ‘IGBT(Insulated Gate Bipolar Transistor) 밸브’를 사용하는 전압형 HVDC의 개발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있다.
전압형 HVDC는 전류형 HVDC에 비하여 제어의 폭이 넓고, 양방향 제어가 용이하고, 무효 전력의 제어 등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여 최근 각광을 받고 있다.
아직은 전류형 HVDC에 비하여 손실과 용량의 단점은 있으나 향후 전력 반도체와 DC 케이블의 발전 추세를 볼 때 시장의 주역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유럽에서는 북해의 증가하는 풍력발전 에너지를 육지와 연결하는데 전압형 HVDC가 채택되면서 급속히 시장이 커지고 있다.
전압형 HVDC는 송전효율뿐만이 아니라 풍력과 같은 신재생 발전전력의 전송 및 기존 계통과의 연계, 주파수가 다른 이종 계통의 연계, 국가간 전력거래를 포함하는 초장거리 전력 전송 등 전력 분야의 미래 모습을 현실화할 수 있는 중요한 대안으로서도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원자력 발전의 위험에 대한 대책들을 고민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2022년까지 독일 내의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로 인한 부족 전력은 북해에 건설 중인 풍력발전으로 대체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의 일환으로 북해의 풍력으로 생산된 전력 1000MW를 660km 떨어진 슈투트가르트 지역까지 송전하기 위하여, 기존 AC 가공선로를 이용한 HVDC 시스템을 건설하는 Corridor라는 전송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기존 AC 전력망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하여 HVDC 전력망을 구축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이는 신규 전송선로를 건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선진국의 전송 용량 확대에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DC Grid
더 나아가 전력을 사용하는 기기가 대부분 DC인 점에서 배전 분야에서도 저압 직류망(Low Voltage DC Grid)을 구축함으로써 AC와 DC의 변환을 반복하는 현재의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미래에 발전이 신재생 에너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상정할 때 여기서 생산된 전기를 마이크로 그리드를 통해 인근의 전력 수용가와 연결하는 중압 직류송전(Medium Voltage DC)도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은 결국 End to End DC Grid라는 비전을 향해 기술혁신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DC Grid를 실현하기 위해서 몇 가지 핵심 기술들이 개발되어야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DC 차단기이다.
최근 ABB, Alstom, Siemens 등 유럽의 대표적인 전력설비 제조회사들이 앞다투어 DC 차단기 기술개발의 결과와 상용화 모델을 발표하고 있으며, 중국을 포함한 일본의 주요 회사들도 개발에 착수하고 있다.
실용화가 가능한 DC 차단기가 개발된다면 향후의 전력망은 AC Grid보다는 DC Grid를 기본으로 설계될 날이 멀지 않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DC Grid의 핵심 부품인 전력반도체가 현재의 소재인 Si보다 내전압과 용량 면에서 월등히 성능이 좋은 SiC와 GaN의 실용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서 향후 5~10년 후에는 저압부터 AC Grid보다 월등히 싼 값에 훨씬 작고 고신뢰성의 전송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경쟁 현황
AC Grid에서 글로벌 톱 회사는 ABB, Siemens, Alstom 등 유럽회사들이며 일찍이 DC Grid에서도 기술혁신의 노력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0년경부터 전압형 HVDC의 새로운 방식인 MMC(Modular Multilevel Converter) 방식이 Siemens에 의해 발명되고 미국 캘리포니아의 Trans Bay 프로젝트에 적용되면서부터 새로운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또한, ABB가 기계식 차단기와 전력반도체를 하이브리드로 구성한 DC 차단기를 2013년에 발표하면서 DC Grid의 실현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이후 3사 간에 컨버터와 DC 차단기를 더욱 발전 시키는 기술개발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 3강 구도에 도전하는 곳이 중국이다.
중국은 낙후되었던 국가 전력망을 현대화하면서 HVAC뿐만 아니라 중국 서부의 대규모 수력발전으로 생산된 전기를 전류형 HVDC로 동부의 도시로 끌어오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이미 글로벌 3강 회사로부터 기술도입 및 소화를 통해 기술의 자립을 이루었다.
최근에는 전압형 기술도 자체 개발하여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자국 내 여러 실증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톱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1GW, 320kV의 전압형 MMC HVDC 시스템의 준공, 세계 최초로 5-터미널의 MMC 전압형 HVDC의 커미셔닝을 완료했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우리의 현황과 대응방안
세계적으로 치열한 기술 개발과 경쟁이 첨예하게 행해지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의 기술 기반은 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수년전 한전이 국내 기업과 60MW, ±80kVdc 전류형 HVDC 시스템(Pilot) 개발 및 실증한 경험이 있으며, 이후에 Alstom과 Joint Venture 설립을 하여 지난해에는 해저 케이블을 통한 대규모 전류형 시스템의 구축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기술이전을 꺼리는 Alstom의 입장으로 인해 핵심기술의 내재화는 더디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DC Grid의 총아가 될 전압형 HVDC의 경우 국내기업이 국가과제로 풍력 발전 연계를 위한 20MW급 ±10kVdc 시스템(Pilot)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연구개발의 전부이다.
정부에서도 이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금번 정부에서 신성장동력으로 지정하고 실용화가 가능한 대형 프로젝트로 기획 중이나 DC Grid의 전망이 결여된 채로 계획을 수립하다 보니 국가 연구개발투자의 회수율이 기대에 못 미쳐 과제가 착수조차 되고 있지 못한 상태에 있다.
결론
AC 시대에 세계를 주도해 온 유럽의 빅3는 AC 망의 핵심기기 세계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반면 한국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불과 1~2% 정도이다.
AC라는 표준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 구도는 깨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약 DC Grid라는 와해성 기술이 도래할 경우 이 구도는 큰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기존 패러다임의 강자는 와해성 기술이 산업을 변화시키더라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수많은 사례가 입증하고 있다.
지금 같아서는 DC Grid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패자는 중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국의 전력산업은 아직도 판을 뒤집어 세계를 리드하겠다고 도전하기보다는 선진국, 선진기업들이 검증을 거친 것을 채택하여 실수 없는 2인자의 전략을 취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태도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하더라도 국내 기업들은 세계에서 무명의 서러움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의 선도자 전략을 채택하고 정부와 기업이 기존의 전통적인 ‘존속성 혁신’ 마인드에서 벗어나 새로운 고객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와해성 혁신자’로서 성공한다면 내수가 막대한 중국이 세계 시장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기회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전력회사의 인식 전환과 산학연이 하나된 모습으로 핵심기술의 독자개발 및 인재 양성을 한다면, 전력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DC Grid의 리딩 국가, 리딩 기업으로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