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 - 효성기술원 우상선 원장
공동작성_ 강석철 교수(한국기술교육대), 이정선 전문작가(프리랜서), 이동기 선임과장(KOITA)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그리고 향후계획 등을 알아봅니다.
도전과 극복의 연구개발 40년
- 효성기술원 우상선 원장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그 기회를 발전과 성공의 찬스로 삼기란 결코 쉽지 않다.
기회라는 것이 처음부터 기회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위기나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기회가 찾아와도 그 기회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에 더욱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남들은 주저하거나 망설이고 뒤로 미루는 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때론 실패할지라도 기꺼이 도전한다.
여기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순간을 최고의 기회로 만들어 가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효성기술원 우상선 원장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37세 늦깎이 유학생이 되다
경기도 안양에 있는 효성기술원에서 만난 우상선 원장은 37세 늦은 나이에 떠난 유학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후 곧바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 지 딱 13년째 되는 해였다.
“그때가 1985년이었어요. 효성그룹 동양나일론 중앙기술연구소에 근무 중이었는데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 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됐죠.”
학위를 마치면 마흔이 넘은 나이로 다시 취직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퇴사 후 유학이라니, 대단히 무모한 도전이었다. 게다가 이른 결혼으로 큰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였기에 주위사람들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나이나 시기 같은 건 결코 중요하지 않다 여긴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 공항에 마중 나온 후배들도 하나같이 걱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제일 먼저 궁금한 것부터 물었죠. 학위취득에 얼마나 걸리나 했더니 보통 5년이라는 거예요. 사실 저는 속으로 3년 내에 석박사 통합코스를 모두 마친다는 계획이었거든요. 그런데 5년이라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목표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시작된 유학생활은 험난한 여정을 예고했다.
그만큼 하루를 한 달같이 한 달을 1년 같이 시간을 아끼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논문을 쓰기 전 3번의 자격시험(Qualification Test)에 통과해야 하는데 우선 자격시험의 유형을 자세히 알아본 후 바로 도전을 시작했죠. 다행히도 10년 동안 연구 활동을 하면서 쌓은 경험과 학습이 도움이 되어 도전 1년만에 자격시험에 모두 통과했습니다.”
이후 3년 만에 박사 학위를 거머쥔 그의 이야기는 한동안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꿈의 직장, 3M에서의 3년
비록 늦은 출발이었지만 40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당시 유학생들은 현지에서 직장을 잡는 게 일반적인 상황이었고 그도 잠시 귀국을 미루고 취업 준비를 했다.
“글로벌 기업 3M에 지원을 했습니다. 창의적인 기업이라 꼭 한번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다행히 한국에서 10년 넘게 연구원으로 일한 경력과 유학기간 동안의 성과 덕분에 바로 수석연구원으로 채용됐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3M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고취하고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연결하기 위한 제도가 경영시스템으로 잘 정착되어 있었다.
연구원들은 누구나 근무 시간의 15%를 자신이 원하는 일에 쓸 수 있는 3M에서의 근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그의 능력을 높이 산 3M은 그의 영주권 취득을 위해 회사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당시 제일모직 유현식 사장이 미국 출장길에 한번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어요. 그래서 약속을 잡고 공항 인근 식당에서 만났는데 제일모직 연구소장 자리를 제의하더군요.”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3M에서 안정적인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고 영주권 신청 단계에서는 1년 동안 귀국이 불가능한 규정 때문에 그는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날 결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생기면서 머지않아 제일모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된다.
“한국식당에서 유현식 사장을 만나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요. 잠시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운 분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한참 후 자리로 돌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화장실 가는 길에 불이 꺼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는데 그만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상선 원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을 찾아 왔다가 뜻밖의 사고를 겪게 되었으니 좌불안석 일수밖에 없었는데 당사자인 유현식 사장이 괜찮다고 하며 그날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참 후에 우연히 유현식 사장의 지인을 만났는데 그날 계단에서 넘어진 이후 후유증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거예요. 모두가 제 탓인 거 같아 무척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또다시 유 사장께서 제일모직 연구소장 자리를 제의하시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3년간의 3M 생활을 마무리 짓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것이 연구원 인생에 있어 두 번째 찾아온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1991년 제일모직 화성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한 우상선 원장이 추진한 첫 사업은 난연ABS 개발이었다.
“당시 제일모직은 EP(Engineering Plastic)분야의 후발주자로 듀폰, LG화학 등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일한 제품으로 승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ABS보다 우수한 난연ABS로 승부해보리라 결심했죠.”
ABS(Acrylonitrile Butadiene Styrene)수지는 약품·충격·열에 강한 내성을 보이고, 외관이 보기 좋아 자동차용 내외장재, 헬멧 등의 부품으로 사용되는 스타이렌수지다. 그러나 열팽창률이 금속에 비해 3~4배나 높아 일단 발화되면 계속해서 연소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안전성이 요구되는 전기·전자제품의 내외장재로는 사용하기 어렵다. 반면 난연ABS수지는 ABS수지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ABS수지에는 없는 자기 소화성을 부여해 전자제품에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모니터와 TV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우상선 원장은 연구원들을 격려하며 난연ABS 개발에 전력을 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화재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잇따른 규제조치를 내놓으면서 난연수지의 활용 분야가 갈수록 늘어났고 세계 유수의 컴퓨터 회사인 IBM과 HP도 시장의 소문을 듣고 제일모직의 난연ABS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일모직의 난연ABS가 월드베스트 제품이 되는데 날개를 달아주었다.
“난연ABS의 성공으로 우리 연구원들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죠. 물론 제일모직이 크게 도약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이후 우상선 원장은 연구 인생에 또다시 중요한 전환기를 맞는다.
1997년 삼성그룹이 소그룹 경영체제로 전환하면서 삼성종합 화학, 삼성정밀화학, 삼성석유화학 등을 묶어서 화학소그룹으로 편제했고, 연구부문은 삼성종합기술원의 화학 Sector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삼성종합화학 연구소장 겸 삼성화학소그룹 종합연구소장으로 발령받았다.
중책을 맡은 만큼 그룹의 화학부문에 대한 중장기 연구개발체계와 발전전략을 수립하여 본격적인 틀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IMF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어려운 시기인 만큼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세계적으로 히트할 수 있는 기술과 제품을 확보해야만 했어요. 해서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원’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연구활동에 매진하도록 했는데 고맙게도 연구원들이 잘 호응해 주었어요.”
이때 개발된 제품이 폴리에틸렌 파이프인데 이 제품은 국내 수도 파이프에 사용되면서 표준화에도 성공한다.
"당시 유럽은 수도관에 플라스틱 관을 사용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철파이프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철파이프는 오래 사용하면 녹이 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요. 마침 이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면서 철파이프를 플라스틱 관으로 대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착안해 제품개발에 성공했고 유럽인증기관으로부터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죠.”
하지만 표준화위원회가 자국 산업보호를 명분으로 세계 표준 인증신청을 거부하면서 인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국 산업표준(KS) 인증을 받아 국내시장을 공략하게 되었다.
다시 효성의 이름으로! 25년 만의 복귀 그리고 성공
제일모직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에도 한국화공학회 이사, 한국 유변학회장, 한국고분자학회장 등을 맡으며 소재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 권위자란 명성을 이어온 우상선 원장은 2011년 ‘친정’인 효성으로 복귀했다.
“지금 이 건물의 기둥을 올리는 걸 보고 유학을 갔어요. 당시 연구원에서는 1985~1990년까지 총 1,000명의 연구원 확충 등 5개년 중장기 발전계획을 세웠는데 다시 와보니 규모는 커졌을지 몰라도 미흡한 것이 많더군요.”
당장 미래 먹거리를 위한 준비도 부족한 점이 많았다.
“전직 제안을 받을 당시 그룹 회장님과 면담하는 자리였어요. 차세대 EP인 ‘폴리케톤’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큰 진전이 없다면서 계속 개발을 해야 할지 말지 제 의견을 물으시는 거예요.”
그에 대한 우상선 원장의 답변은 확고했다.
“틀림없이 된다. 그러니 꼭 해야겠다고 말씀드렸죠. 연구자로서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국가 차원에서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연구였기 때문이죠.”
효성이 폴리케톤 연구에 뛰어든 것은 2004년, 하지만 수년간 개발에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새로 부임한 우상선 원장은 곧바로 원인 분석에 돌입했다.
그 결과 촉매와 공정상에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삼성종합화학 시절 함께 근무한 이원 전무를 영입해 프로젝트 관리를 맡겼다.
그렇게 3년간을 노력한 끝에 2013년 세계 최초로 ‘폴리케톤’ 개발과 상용화에 성공하였다. 이후 미국, 독일 등 150여개 업체로부터 품질 인증을 받고 시제품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대기오염의 주범인 일산화탄소가 주원료인 폴리케톤은 기존 나일론 같은 소재보다 강도가 강해 차세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소재로 자동차와 전자부품 등 용도가 매우 다양해 꿈의 신소재로 불리고 있다.
미국, 일본 등이 1980년대 이후 상용화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는 점에서 효성의 성공은 더욱 큰 의미가 있다.
효성은 2012년부터 울산에 연산 1,000톤 규모의 폴리케톤 중합 생산설비를 구축한 뒤 양산 체제에 들어갔고 연산 5만톤 규모의 공장 건립 중이다.
2020년경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의 시장규모는 약 80조 원으로 예상되며 이 시장의 약 20~30%를 폴리케톤으로 대체될 전망이다.
“폴리케톤을 제조할 때 사용되는 촉매는 비싸지만 주 원료는 저가의 에틸렌, 일산화탄소 등을 사용해서 원가경쟁력에도 큰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소재산업들이 대부분 외국으로부터 라이센스를 받아 공장을 설립하여 생산판매하고 있으나 폴리케톤은 순수 독자기술로 성공하여 향후 한국의 소재산업 경쟁력에 크게 기여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미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 27건의 관련 특허 출원과 등록을 마친 상태로 우리만이 가진 핵심기술로 시장의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니 그 무한한 가능성이 기대된다.
폴리케톤과 함께 효성이 차세대 미래사업으로 육성중인 분야는 탄소섬유다.
이미 우주, 항공, 스포츠, 레저, 자동차, 풍력발전기 날개, 압력용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며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탄소섬유는 향후 ‘철(Iron)’을 대체할 것으로 기대되는 첨단 소재다.
2011년 국내 최초로 자체 기술로 탄소섬유를 개발해 상업화를 시작한 효성은 2020년까지 총 1조 2,000억원을 투자해 탄소섬유 생산 능력을 1만 7,000톤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세계 탄소섬유 시장은 도레이, 미쓰비시레이온 등의 일본 기업이 60%이상을 점유하고 있지만 효성이 자체 기술을 통한 상업화에 성공하면서 국산화 대체는 물론이고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과 경쟁을 나란히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경량화가 필수인 전기자동차 차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이 기대되고 있다.
우상선 원장 부임 4년째인 지난해 효성은 큰 경사를 맞았다.
기획재정부와 미래창조과학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8개 정부 부처와 전경련, 대한상의 등 8개 주요 경제단체장이 참여하는 ‘창조경제민관협의회’ 회의에서 ‘폴리케톤’과 ‘탄소섬유’가 미래성장동력분야 플래그쉽 프로젝트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효성은 수년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설구축 및 제품개발 등을 적극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부임 후 두 가지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시킨데 이어 국가적인 책무까지 수행해야 하는 우상선 원장의 포부는 각별하다.
“효성이 만든 기술이 창조경제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성과입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만큼 최선의 노력을 다 할 생각입니다.”
그동안 효성의 Cash Cow품목인 스판덱스에 이어서 차세대 먹거리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주역으로서 그는 ‘소재산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과거 우리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 TV를 포함한 조선, 자동차 산업에서 세계적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제품에 사용되는 소재산업은 일본과 독일 등 선진기업 의존도가 50%까지 이르는 실정이죠. 우리나라가 중장기적인 산업경쟁력을 확보하고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소재기술 확보가 매우 중요합니다.”
조선, 철강, 자동차 등 대부분 산업 분야에서 중국이 무섭게 추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재산업의 중요성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기에 효성기술원은 오늘도 매우 의미있는 연구들에 매진하고 있다.
미래 먹거리를 위한 준비
부임 직후 우상선 원장은 향후 10년간의 비전을 수립하기 위해 먼저 현황분석 작업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연구조직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음을 포착했다.
“이미 축적된 기술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기존 연구조직은 사업부에 연계된 연구실 개념으로 되어 있어 조직간 교류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구조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가장 먼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반기술들이 무엇인지를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 미래를 위한 10대 핵심기술(중합/합성, 방사/연신, 촉매/공정, 필름제막, 코팅가공, 복합재료, 컴파운딩, 유무기 나노, 바인더/배합, 균주/발효기술)을 도출하고 5개의 전략제품군(고기능성 섬유, 광학필름, 전자재료, EP/복합제품, 환경/에너지소재)을 선정했다.
그에 맞춰 연구실도 5개의 연구 Group(섬유연구Gr, 필름연구Gr, 기능성재료연구Gr, 중합연구Gr, 전자재료연구Gr)으로 재편했다.
인재양성과 확보를 위한 열정
효성기술원의 임원 및 팀장급 연구진은 요즘 바쁜 시간 틈틈이 대학에서 ‘화공리더십’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학생은 물론 교수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올해 6년째로 서울대, KAIST, 성균관대, 한양대, 연세대에 이어 올해는 고려대에서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수 인재는 산학장학생으로도 채용할 계획이다. 우상선 원장에게 그 추진배경을 물어보았다.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보니 논문중심으로 공부를 해서인지 기업 연구분야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기술트랜드와 기업연구 분야를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좋은 인력을 뽑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에 대한 기업의 연구활동을 적극 홍보할 필요도 있었고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산학협력에 관한 생각도 들어보았다. 선진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실질적인 산학협력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산학협력에 대한 시각 차이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기업은 실효성 있는 기술개발 결과물을 요구하는 반면, 대학은 기술사업화 단계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이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용역과제를 통해 우수한 인력을 채용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요.”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대학에 산학 과제를 줄 때 대충 연구 테마만 주고 알아서 개발하라는 식이어선 안돼요. 전체 과제목표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기업에서 할 것과 학교 측에 맡길 부분을 명확히 구분해 주어야 유용한 결과가 나오죠.”
또한 과거에는 주로 학교의 브랜드를 보고 연구과제 용역을 진행 한 반면 최근에는 지방대를 불문하고 자사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확보하고 과제수행 경험이 있는 교수진이 있는 곳을 찾아 공동연구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가장 좋은 산학협력은 WPM(World Premier Materials)과 같은 큰 국책과제에 기업과 다수의 대학, 국책연구소가 동참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기적을 만드는 신념의 마력
연구개발 인생 40년, 연구소는 미래의 성장 기반을 만들어주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 존재 이유가 크다고 말하는 우상선 원장은 오늘도 끊임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념을 가지고 집중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중학교 때 우연히 아주 낡은 책을 읽게 되었는데 ‘신념의 마력(The Magic of Believing, 클로드 브리스톨 저)’이라는 제목이었어요. 짧은 시간 몰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인간에게는 엄청난 잠재능력이 있는데 우리가 쓰는 것은 불과 10% 미만이라는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노력 여하에 따라 숨어있는 잠재력의 많은 부분을 끌어 낼 수 있으며, 아무리 어려운 장벽에 막혔다고 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부분에서 큰 감명을 받았죠.”
그날 이후 우상선 원장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강한 신념과 끊임없는 도전으로 꾸준히 성장했다.
37세의 나이에 회사를 그만두고 자녀를 데리고 유학길에 오른다는 것은 물론 석박사 통합과정을 3년만에 끝내고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것도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제일모직을 거쳐 효성기술원으로 복귀하면서 그룹회장에게 무려 6~7년 동안 성과를 내지 못한 ‘폴리케톤’ 개발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노라 각오를 밝힌 것 또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해내고 말았다.
그런 그가 연구원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있다. 기술원이 피나는 노력으로 회사의 미래성장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창조와 열정,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도록 격려한다. 더불어 항상 위기의 식과 도전정신을 갖고 미래의 꿈을 키워나갈 것을 강조한다.
그는 스킨십과 소통을 위해서도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삼성종합화학 공장장 시절에도 공장 인력들을 한사람도 빠지
지 않고 만났는데 꼬빡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도 하루에 한번은 연구원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소통하고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도전할 것을 주문합니다. 거기에 창조력과 열정이 더해지면 불가능이란 없죠. 무엇인가 하고자 한다면 미쳐야 합니다. 그렇게 열정과 도전으로 가득한 연구소, 그래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어느 미래학자는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미래를 만들면 미래는 나에게 행복과 부를 선물로 주지만, 미래가 나를 만들면 나에게 미래는 두려움과 고통을 준다.”
무모해 보이던 도전을 모두 성공으로 바꾸고, 소재산업의 부흥을 이끌며 국내 1위를 넘어 글로벌 초일류기업 효성을 만들어가는 우상선 원장. 그의 힘찬 도전을 기대해 본다.
주요경력
2011~현재 (주)효성기술원장(사장)
2003~2011 제일모직(주) 케미칼부문 부사장
2001~2003 삼성종합화학(주) 대산Complex 공장장(전무)
주요수상
1984 우수발명특허상
2000 기술경영인상
2002 산업포장 TPM대상(경영자상)
2014 기술경영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