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인터뷰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 -
반도체 신화를 넘어, 새로운 ICT산업의 창출을 꿈꾸다
- SK그룹 임형규 부회장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그리고 향후계획 등을 알아봅니다.

공동작성_ 강석철 교수(한국기술교육대), 이정선 전문작가(프리랜서), 이종민 과장(산기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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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형규 부회장이 미래 엔지니어 양성을 위해 공과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있다.


지난 1월 SK그룹은 ICT기술개발을 통한 그룹의 신성장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삼성그룹 CTO출신인 임형규 前사장을 그룹 부회장으로 영입한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 대기업간에 다른 그룹의 사장급 인사를 영입하는 전례가 흔치 않은 상황이었기에 그의 SK행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그는 삼성전자에서 메모리 개발본부장, 시스템 LSI사업부장, 기술총괄 사장, 삼성종합 기술원장, 신사업팀장을 역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술경영인으로 알려져 있기에 더욱 그 배경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였다.

그 동안 한국 반도체산업 발전의 역사와 함께 했고, 이제는 ICT산업에서 미래의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비전을 설계하고 있는 그를 직접 만나 기술경영인으로서 지금까지 걸어 온 길과 그의 경영철학,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과 비전에 대해 들어보았다.


서울대 전자공학도에서 삼성 ‘반도체신화’의 주역으로

“하는 공부마다 어려워서 처음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용어조차 생소한 것들이 많아 용어해설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 할 정도였죠. 명색이 전자공학과인데 서울공대 전체에 컴퓨터가 한대 뿐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부산의 명문 경남고를 졸업하고, 당시 서울대에서 최고학과로 꼽히던 전자공학과 재학시절이야기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원래는 화학을 좋아해서 약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당시 은사님의 조언으로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였다.

그가 학과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반도체관련 과목을 수강하면서부터였다.

평범한 전자공학도에서 반도체신화의 주역으로 거듭난 계기는 서울대 졸업즈음 한국반도체(현재 삼성전자 반도체의 전신)의 연구원으로 입사하면서부터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연구원 채용공고를 보게 됐는데 조건이 꽤 괜찮았어요.

산학제로 과학원에 보내주고 군면제 혜택까지 있다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그렇게 입사후 과학원 산학제에 응시했는데 경쟁률이 너무 세서 서울대에서도 10% 정도밖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과학원은 전자, 기계, 화공분야 등 모든 과를 통틀어 140명의 석사과정 신입생을 뽑았는데, 분야별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두 응시하다 보니 합격가능성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행운의 신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고 과학원에 당당히 입학한 그는 ‘한국 반도체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김충기 교수의 지도아래 반도체설계에 대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게 되었다.


삼성 ‘제1호 유학생’

과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그가 한국반도체에 복귀한 것은 1978년이었다.

한국반도체는 1974년 모토로라의 반도체연구원 출신인 강기동 박사가 설립한 국내최초의 반도체회사였다.

그러나, 1970년대 불어닥친 오일쇼크의 여파로 운영이 어려울 정도의 경영난에 빠진 한국반도체는 새로운 인수자를 물색 중이었는데, 이때 나선 기업이 삼성그룹이었다.

이러한 삼성그룹의 한국반도체 인수결정에는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건희 삼성 회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한국반도체는 삼성반도체로 거듭나는 대반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과학원 졸업후 회사에 복귀한 그는 3년여간 개발하는 제품마다 국내최초를 기록하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성과를 올렸다.

당시 국내 최초의 반도체공장인 한국반도체는 미국에서 도입한 시계구동칩을 복제하는 수준에 그쳤던 반면, 7.5um였던 칩의 최소선폭을 4um로 축소하는 데 성공하면서 획기적인 원가절감효과를 가져왔으니 경영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는 어느새 유능하면서도 특별한 인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함께 입사한 과학원 동기들이 미국으로의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유학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우수인재 유출방지를 위해 회사차원에서 해외 연수제도를 전격도입하면서 첫수혜자가 된 것이다.

“그 동안 미국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IBM, TI(Texas Instrument) 등 세계굴지의 반도체회사에 근무하는 재미 연구원들을 만나 동양인에 대한 차별대우 등 스트레스가 많다는 사실을 듣고 늘 결심한 바가 있었습니다.

미국회사보다는 제가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한국회사에서 성장하겠다고 말이죠. 그러다 때마침 회사에서 유학을 보내준다니 이거다 싶었죠. 학위를 따서 귀국한후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생각도 있었구요.”

1981년 그렇게 삼성의 ‘제1호 유학생’에 선발된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 반도체 신화의 주역이 되다

유학갈 학교를 선택할 때에도 단순히 학교의 브랜드보다는 전공희망 분야의 석학이 있는 플로리다대학을 선택한 그는 유학후 단기간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미 과학원에서 익힌 학문이 큰자산이 되어 유학길에 오른 지 불과 1년만에 논문을 쓰기 시작하여 불과 3년만에 IEEE(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에 무려 일곱 편의 논문을 게재한 것이 주효했다.

그가 당시 쓴 ‘Silicon on Insulator’ 관련논문은 그 분야 연구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유명한 논문 중 하나였다.

그렇게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을 앞둔 1984년 회사로부터 긴급 지시가 내려왔다. 바로 귀국하지 말고 삼성이 미국 현지에 설립한 반도체연구소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 시기 국내의 삼성에서는 본격적인 반도체사업 진출을 선언하는 등 한창 분주한 시기였고 일손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선진기업들을 추격하기 위해서는 핵심엔지니어의 양성과 선진기술확보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실리콘밸리 서니베일(Sunnyvale)에 반도체 연구소 건립을 결정하고 그를 그 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당시 연구소에는 미국인 기술자 50명, 오퍼레이터 150명 등 200명 정도가 근무했는데, 메모리분야의 우수인력 10여명을 연구소 핵심연구진으로 활용하고, 한국에 있던 1~2년차 연구원을 미국현지에 파견하여 기술을 습득하도록 했습니다.

그 당시 참여했던 1세대 반도체인력들이 모두 삼성에 돌아와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처럼 일찍이 인재육성에 힘써온 결과 삼성은 글로벌톱 반도체기업으로 도약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미국내 연구소 설립 당시의 인재들이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는 게 그의 평가다.

그 역시 미국연구소에 근무하면서 향후 Flash Memory의 기초가 되는 메모리반도체설계에 대해 많은 경험을 습득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연구원에서 ‘기술경영인’으로 거듭나다

미국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그에게 내려진 첫임무는 미국업체로부터 이전받은 16Kbit EEPROM(Electrically Erasable Programmable ROM.

불휘발성 메모리의 일종으로 전기적 신호로 정보를 지우거나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을 64Kbit로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배당된 연구인력은 단 세명뿐이라 결코 쉽지않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박사학위과정에서 습득한 Memory설계와 관련된 많은 지식이 유용하게 활용되어 개발착수 1년 6개월만인 1985년말 드디어 개발에 성공하고, 본격적인 생산준비를 위해 개발자 세명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그 무렵 삼성반도체는 DRAM팀(Dynamic Random Access Memory. 기억내용유지를 위해 주기적으로 데이터를 재기록해야 하며, 속도가 빨라 PC의 주메모리로 사용), SRAM팀(Static Random Access Memory.

휴대기기용 메인 메모리로 사용), NVM(Non-Volatile Memory, 불휘발성 메모리)팀 등 총 3개팀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그에게는 NVM팀 책임자의 임무가 주어졌다.

당연히 미국 근무 때보다 많은 인력을 통솔하게 된 그는 256Kbit, 1Mbit 등 EEPROM 개발에 연이어 성공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넘어야 할 큰 난관이 있었다.

“개발된 제품을 판매로 연결시켜야 하는데 그게 정말 힘들더라고요.

당시 EEPROM은 응용처는 많지만 한 시스템에 한두개씩만 사용하는 정도에다가 판매가격 역시 1~2달러에 불과하다보니 회사입장에서는 돈이 안되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매출을 내야만 하는 상황이라 세계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니며 판매에 열을 올렸죠.”

그야말로 고객이 부르면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간다는 생각으로 한겨울 맹추위를 뚫고 머나먼 캐나다 애드먼튼에 있는 작은 업체를 찾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니 그때의 절실함을 상상할 수 있을것 같다.

하지만 기대는 늘 실망으로 돌아왔고, 연간매출은 3천만 달러(약 300억원) 정도에 불과해 겨우 개발비 정도 버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정말 그때만큼 어려운 적이 없었어요. 회사에서 유학을 보내고 미국연구소에 큰 투자까지 해서 육성했는데 사업실적은 영 시원치 않으니 아주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우연히 Mask ROM(프로그램을 미리 ROM의 실리콘필름에 기록한 뒤 반도체형태로 대규모 찍어내는 ROM)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게임기시장을 주름잡고 있었던 닌텐도는 게임프로그램이 담겨있는 Mask ROM을 샤프로부터 전량공급 받고 있었는데, 대만 게임업체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고 싶어했으나 샤프로부터 Mask ROM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귀가 솔깃했다. Mask ROM은 한번 프로그램이 탑재되면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One Time ROM인데, 이미 관련된 모든 기술을 확보한 그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즉시 개발에 착수하여 대만에 공급을 시작한 것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연간매출이 10배로 늘어나면서 일약스타덤에 올랐다. 당장 그를 바라보는 최고경영층의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1991년 임원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기술경영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50명의 대규모 인력을 통솔하는 SRAM사업의 총괄책임자가 되었고, 임원승진 4년만인 1995년약 20억달러(약 2조 500억원) 규모의 큰 비즈니스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후 삼성전자는 그에게 DRAM을 포함한 메모리 반도체 전체의 개발을 책임지는 역할을 부여하게 된다.

그 1990년대 후반시기에 삼성전자는 메모리사업에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명실상부한 세계제일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다.

당시 이윤우 메모리 사업총괄 사장의 리더십이 돋보이던 시기였다( 그림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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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분야 글로벌 TOP으로 도약한 핵심성공 요인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지원으로 1990년대 급성장한 DRAM의 의존도가 커지면서 투 트랙(TwoTrack) 전략을 구사하기로 한다.

첫째는 DRAM에의 의존도를 줄이면서 NAND Flash를 집중육성해 균형을 맞추고, 둘째는 시스템 LSI를 집중 육성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삼성의 Flash Memory 개발역사는 1989년 도시바에서 발표한 NAND EEPROM에 관련한 논문에서 출발한다.

EEPROM개발로 이미 많은 기술력을 축적해 놓은 그의 팀은 어렵지 않게 NAND EEPROM의 기술을 터득하고 제품화와 사업형성을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 내부에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기술개발을 시도했었지만 사업화에 대한 성공여부에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어요.

일단 윗분들에게 그 사실을 말씀드린후에 도시바 최고위층과 만나 협력가능성을 타진해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김광호 반도체총괄 사장은 저를 동행한 채 도시바를 방문하였죠.

그리고는 공동협력을 제안했는데 NAND Flash의 제품화에 고민하고 있던 도시바 고위층이 삼성도 같이 하겠다고 하자 반가워했어요.”

당시 히다치 등 경쟁사들과 다른 방식의 EEPROM을 한창 개발 중이던 도시바는 삼성과의 협력이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아래 1992년말 16Mbit NAND EEPROM 공동개발에 합의했다.

이후 두기업은 함께 개발사양을 만들고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도시바는 Cell구조를 개선해 32Mbit를 개발하다보니 진척이 느렸던 반면, 삼성은 NAND Cell 자체보다 전체 Chip구조 설계 등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며 한단계 진화된 64Mbit의 개발에 성공했다.

원조격인 도시바는 삼성의 경이적인 능력을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후에는 오히려 도시바가 삼성에 와서 기술이전을 해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후 삼성은 1999년 256Mbit NAND Flash부터 매년 2배씩 집적도를 높여 2005년에는 16Gbit까지 고집적화에 성공해 소형 HDD나 노트북 HDD를 대체하는 수준까지 발전시켜나가며 IT업계의 흐름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위시한 휴대용기기가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거의 모든 분야에 Flash Memory가 사용되기 시작해 마치 19세기 미국의 골드러시에 버금가는 ‘Flash Rush’가 2000년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Flash Memory 시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2000년대 중반 150억달러에 이르는 큰시장으로 성장했는데, 당시 삼성은 Flash Memory분야에서 뛰어난 기술 선도력을 바탕으로 60% 정도의 경이적인 영업이익률을 시현하였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용량 제품을 앞세워 그 이후에도 모바일 및 디지털 전자제품시장에서 막강한 시장장악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

임 부회장은 이러한 Flash Memory관련 기술과 사업을 새롭게 개척하고 성장시킨 주역으로 한국반도체 산업계에서 기억되고 있다.

2000년초 임 부회장은 사장으로 승진하여 삼성의 SLSI사업을 책임지게 된다.

그의 재임시기에 삼성의 SLSI사업은 미래 성장성 중심으로 확실한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졌고, 당시에 선택된 10개의 사업들이 성장, 도태 과정을 거쳐 현재의 포트폴리오를 이루고 있다( 그림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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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철학과 기술경영인의 조건

“부존자원이 없는 한국은 기술기반사업에 사활을 걸고 글로벌 시장경쟁에서 필승하여 시장을 선점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입니다.”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그가 누차 강조한 것처럼 그의 신념은 매우 확고했다.

삼성의 반도체사업 성공사례를 예로 들면서 설명하는 기술경영의 성공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들이 두려워할 때 과감히 참여 하여 타사보다 ‘미리준비’ 하고, 둘째, 투자이전에 심층분석을 하되 일단 투자를 결심하면 ‘과감한투자’를 감행하며, 셋째, ‘세계 초일류 인재 확보’와 동시에 성공가능성이 있는 주력분야에 ‘인력을 집중투입’하고, 넷째, 그룹 최고경영층의 ‘강력한 리더십’이 잘 조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삼성반도체의 성공을 견인한 인력가운데 황창규 KT회장, 진대제전 정통부장관 등은 유학파로서 임원급으로 영입되어 성공한 케이스지만, 임 부회장은 삼성이 키운 ‘제1호유학생’이라는 점에서 그의 성공과 활약은 더욱 의미가 있다.

개발팀장의 직책을 맡아 EEPROM부터 개발을 시작으로 판매와 생산 등의 경험을 기초로 Flash Memory를 세계적 명품으로 만든 주인공인 그가 늘 강조하는 것은 ‘기술경영’이다.

“진정한 기술경영인은 차별적 기술력에 기반하여 반드시 수익이 나는 사업을 만들어내는 경영능력을 보유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해도 경영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기술경영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데, 그가 꼽는 ‘기술경영인’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술자로서 핵심능력이 뛰어나야 하며, 둘째, 야심과 긍정적 욕망 그리고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

즉, 동물적인 장사기질을 보유한 인재를 ‘기술경영인’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두가지 기질에 더해 조직차원의 마케팅, 생산기술, 경영지원이 적절히 조합되면 뛰어난 경영성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기업의 CEO와 CTO들에게

반도체사업의 황금기를 열었던 주역 중 한명에서, 이제는 SK그룹으로 자리를 옮긴지 1년.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며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특정분야가 아닌 ICT분야 융합을 위한 전반적인 청사진을 그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글로벌하게 나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업영역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2020년대 초반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며, 그 구체적인 모습이 요즘들어 명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반도체를 포함해 모든 IT의 흐름은 대략 15년 정도마다 바뀌어 왔더라고요.

수백만개의 트랜지스터로 시작된 아날로그 반도체시대가 반도체 집적기술발전을 계기로 1990년대 중반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었고, 다시 약15년 정도가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모바일 컴퓨팅시대를 열었는데, 이를 가능케한 것은 고성능 Mobile CPU였습니다.

아마 예측컨데, 스마트폰 이후의 2020년대 초반 포스트모바일 시대에는 소위 사물인터넷보다 진화된 IoT(Intelligence of Things)로 또한번의 대변혁이 예상되는데 그 근간에도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기술이 핵심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림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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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기술은 사람이 똑똑해지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는 집과 자동차와 같은 사물들이 똑똑해지는 세상이 열릴 것이며, 그 핵심 요소는 ‘컴퓨터의 혁신’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난 20년간 컴퓨터산업의 성장을 주도해온 미국과 궤적을 같이해온 한국의 기업들은 ‘우수한 기술’에 ‘비즈니스 감각’을 더해 보다 강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글로벌을 목표로 할 때만이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비약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경제는 세계경제의 2%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모든 사업과 제품은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목표로 해야합니다. 또한 핵심기술자로 양성되어 온 인력에게 제반 경영적 요소를 잘 접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이들을 키울 때 기업의 경쟁력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의 주역으로 한국경제발전에 일조한 임형규 부회장. 그가 반도체 1세대로 쌓아온 다양한 경험을 ICT산업에 잘 접목해 한국경제의 체질을 강화하는 또다른 신화창조의 주역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주요경력

2014~

SK SUPEX추구협의회 ICT기술ㆍ성장위원회 위원장

SK텔레콤 ICT기술ㆍ성장총괄 부회장

SK하이닉스 이사

2008~2009 삼성전자 신사업팀장 사장

2005~2008 삼성종합기술원장

2004~2005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전사 CTO)

2000~2003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 대표이사 부사장, 사장

1996~1999 삼성전자 메모리 개발총괄 전무, 부사장


 주요수상

2000 제37회 무역의 날 금탑산업훈장

1989 매일경제신문 ‘정진기 언론문화상’ 과학기술부문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