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3

특별기획 - 1950년대 미국 과학기술정책과 AR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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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스푸트닉 호 발사성공 직후 미국 군사 및 과학기술력의 우위와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마련된 국방부산하 기구 ARPA는 고위험 고성과 연구를 독립적으로 주도하고 인터넷, 스텔스기, GPS 등 지속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면서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혁신모델로 주목받아 왔다.

ARPA가 출범하고 발전하는 데는 ARPA를 구상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한 당대의 리더십, 안정된 산학연 협력 연구개발시스템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토대로 유연성, 신속성, 자율성, 네트워크를 특징으로 하는 ARPA 모델이 꽃 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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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PA의 설립 배경

미국은 19세기 후반 급속한 산업화를 통해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1차 및 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명실상부한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2차 세계대전 후반 폴란드를 위시한 중부유럽의 전후처리에 관해, 연합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서로 다른 견해를 드러내면서 시작된 냉전은 이후 약 50년 동안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관심사가 되었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확산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보호한다는 것을 국가전략의 최우선순위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구사하였다.

이 시기동안 미국의 주요 관심은 일차적으로 군사적 안보에 있었고 과학기술정책도 이러한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20여 년의 시기가 미국 과학기술정책에서 가지는 큰 의미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과학기술정책이 독립적인 공공정책 분야로 자리 잡고 아울러 과학기술정책의 주요 내용과 틀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공공의 관심을 증대시킨 중요한 계기는 핵무기개발과 관련된 맨하탄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에는 대학, 연구소, 산업체, 군이 총동원되었으며 3년 동안 12만 5천명의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Leslie 1993).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대학의 연구자들과 기업체가 국방 및 무기기술과 직접 관련된 연구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국방 연구를 위해 동원되었고, 연구기관, 기업 및 대학이 긴밀하게 연계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1940년 국가방위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 NDRC)가 설립되었고 1941년 과학연구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으로 확대되었다.

OSRD 주도하에 레이더, 로켓, 원자폭탄 개발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가 추진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부의 과학기술연구 지원이 확대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대규모 과학연구를 지원하였으나 전후 지원을 즉각적으로 중단하였던 경험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연구에 대한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전개된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과 이를 십분 활용하였던 유능한 과학기술정책가 바네버 부시(Vannevar Bush)의 역할이 중요했다.

NDRC와 OSRD의 의장을 맡았던 부시는 당시 대통령이던 루즈벨트의 자문에 응답하여
“Science, the Endless Frontier”라는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Bush 1945).

이 보고서는 향후 미국이 과학기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초원칙들을 수립하였고, 1960년대까지 미국 과학기술정책을 위한 합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고서는 굳건한 개척정신이 미국이 계승해야할 중요한 정신적 자산임을 역설하면서 과학기술 분야가 미국인이 개척해 나가야 할 미지의 세계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과학의 발달은 국가안보, 보건, 직업창출, 삶의 질 향상 등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언급하면서 특히 기초과학과 대학연구의 중요성을 거듭 주장했다.

이 보고서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과학기술정책의 기조는 과학중심과 임무중심으로 요약된다.

보고서는 당시 미국 응용 과학기술 부문의 놀라운 성취가 유럽에서 이전되어 온 기초 원천기술에 상당부분 의존하였으나, 유럽의 지적자산이 전쟁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미래에는 기초 지식을 빌려오는 국가는 기술혁신 경쟁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면서 기초 지식과 원천기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임무중심의 원칙은 연방정부가 국가의 명확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로 하는 범위 내에서 과학기술을 적극 지원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전후 미국의 연구개발 활동이 뚜렷한 임무를 가진 각 부처나 기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분권적 구조를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후 가장 강조된 임무는 국방 및 질병 극복이었고 이에 따라 미국 연방정부 연구개발 예산에서 국방부(DOD), 에너지부(DOE) 및 국립보건원(NIH)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이 시기에 과학기술은 더 이상 부호나 세력가가 후견하거나 한 사람의 뛰어난 과학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구개발시스템 하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되고 이를 위해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체계 역시 함께 발전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군사적 관심이 과학기술정책 전반을 압도하면서 국방, 우주, 에너지 분야의 기술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국가전략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 인식,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 미국경제의 지속적인 성장 등에 토대하여 2차 세계대전 직후 1960년대 중반까지 매년 평균 15%씩 연구개발 예산이 확장되었다.


ARPA 설립과 발전

1957년 소련 인공위성 스푸트닉호 발사 성공은 자국 군사력과 과학기술력의 우위를 믿고 있던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미 군사부문 연구개발에 막대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 및 과학기술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군사기술문제에 대해 대통령을 독자적으로 보좌할 수 있는 자문기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대통령 과학자문 위원회(President’s Science Advisory Committee, PSAC)가 설립되었고 아울러 대통령 과학기술특별 보좌관직도 마련됐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어떻게 미국 첨단 무기부문에서 미국의 우위를 되찾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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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국방장관 맥엘로이(McElroy)는 스푸트닉 발사 직후 육해공군에 이어 미사일 부문을 다루는 제4군을 새로 설치하고, 탄도미사일, 로켓, 정찰위성, 우주개발 분야에 일종의 맨하탄 프로젝트와 같은 거대 연구개발사업 프로그램을 구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Watson 1997).

그러나 이러한 구상이 전쟁 중에나 가능할 만큼 지나치게 거대하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국방장관실 산하에 미사일을 포함한 새로운 첨단 무기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관리하는 기구(Agency)를 설립하는 것으로 논의가 모아졌다.

공군 등은 기존의 기구를 활용하여 신무기개발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새로운 기구 설립을 반대하였고, 또 다른 측에서는 새로운 기구의 임무와 개발할 무기를 미사일과 위성으로 제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 맥엘로이는 필요시 자유롭게 다양한 첨단무기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계약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조직이 요구된다고 주장하며 ‘Special Projects Agency’를 제안하였고 결국 이것이 ARPA(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설립으로 관철되었다.

1957년 10월 스푸트닉 발사 직후에서 1958년 2월 ARPA 정식출범까지 조직 구상에서 설립과정이 일사천리로 추진되었고 초대 책임자로 제네럴일렉트로닉사 출신의 Roy Johnson이 임명되었다.

출범시 ARPA의 임무는 스푸트닉과 같은 기술적 충격(Technological Surprise)을 방지하는 것으로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ARPA는 국방부 산하 다양한 연구개발조직을 활용할 수 있지만 이들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지 않는 독립적인 기구로 설립되었고, 자체 연구개발수행보다는 외부 대학, 기업, 연구소 등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내부 조직 역시 프로그램 매니저(PM) 중심으로 유연하고 신속한 수평적 의사결정체제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다.

여타 국방부산하 연구소나 실험실에서 진행하기 힘든 ‘고위험-고성과(High-Risk and High-Payoff)’ 연구개발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나라가 생각해 낼 수 없는 혁신적인 무기개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되, 이를 구체적인 성과물로 만들어내는 결과지향적 연구개발 활동을 주도하게 된다.

과학기술력의 우위와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모호한 아이디어들이 ARPA라는 구체적인 기구로 발전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ARPA가 인터넷, GPS, 스텔스기 등 뛰어난 혁신의 구심점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먼저 육해공군 내부 기존 국방연구개발 조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혁신에 적합한 기구를 고안하고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국방장관 멕엘로이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리더십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은 유사업무를 수행해 온 기존 조직의 반발과 저항에 부딪치며 이를 돌파하는 데 리더십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울러 스푸트닉에 의해 야기된 국가적 충격이 감정소모적 상호비판이나 단기적인 처방의 난무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미국의 과학기술 혁신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기구를 적절한 모양으로 만들어 내고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혜안과 비전이 중요하다.

맨하탄 프로젝트 방식이 아닌 유연성, 신속함, 자율성, 네트워크를 특징으로 하는 ARPA 모델은 성공적인 혁신 사례로 자리잡으면서 IARPA(Intelligenc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ctivity), HS-ARPA(Homeland Security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ARPA-E(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 Energy) 등으로 확대되어 왔다.
 
아울러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구축해온 연구소, 기업, 대학 간의 협력 체제가 ARPA의 안정적인 발전에 핵심적인 주춧돌이 되었음도 인식해야 한다.

자체 연구소를 가지지 않은 ARPA가 뛰어난 혁신 성과를 지속적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은 산관학 협력의 토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이고 이것이 없었다면 ARPA는 애초에 구상했던 대로 작동하거나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산관학 협력의 토대 위에서 뛰어난 인재들로 구성된 ARPA의 프로젝트 매니저들이 자율성과 추진력을 부여받아 구체적으로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혁신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고, ARPA의 발전과 함께 미국의 산관학 협력 문화가 더욱 공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맺음말

2차 세계대전 직후 20년의 시기는 미국패권의 절정기였다고 평가된다. 서유럽국가나 일본이 경제 부흥에 몰두하는 동안 미국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구가하면서 자유세계의 수호자로 세계 각 지역의 문제에 관여하게 된다.

당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의 승리는 미국이 가장 우선시 하는 목적이었으며 과학기술은 이를 위해 필요하고도 유용한 수단이었다.

이 시기 미국 패권의 중요한 기반은 곧 미국의 군사력이었으며 과학기술은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 시기 군사기술 중심 임무지향적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군사기술 혁신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막대한 투자나 지원이 패권국가로서 미국의 기초를 형성하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과학기술부문에 대한 투자, 대학 및 연구소의 혁신역량 강화, 산학연 협력 문화 등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미국 군사경제 패권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스푸트닉 호 발사성공 직후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미국 군사 및 과학기술력의 우위와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마련된 국방부산하 기구 ARPA는 고위험 고성과 연구를 독립적으로 주도하고 인터넷, 스텔스기, GPS 등 지속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면서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혁신모델로 주목받아 왔다.

ARPA가 출범하고 발전하는데는 ARPA를 구상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한 당대의 리더십, 안정된 산학연 협력 연구개발시스템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토대로 유연성, 신속성, 자율성, 네트워크를 특징으로 ARPA 모델이 꽃 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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