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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s Essay - 과학기술의 꽃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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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찍이 과학을 사랑하고 기술을 펼쳤더라면 백성들이 헐벗은 채 일본에 쫓겨 만주벌 눈보라 속에 엉엉 울며 죽지 않았을 거다 위안부로 끌려가 강요된 치욕에 몸서리치지 않았을 거다 명성황후가 죽임당하고 불태워지지 않았을 거다 분단의 골병으로 뒤척이고 있지 않을 거다

팔백 미터 벌인 다리 사이 오가는 왕화물선 이백삼십 미터 주탑에 매달은 상판에 서니 산들 바람 가을 햇살에 꿈을 꾸듯 아름다움 가슴에 채워지고 웅장함에 솟아오른 기분에 어깨 펴고 우쭐한 맛이라니.

아득히 먼 옛날부터 우아한 걸음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금수강산 노래했지만 뛰어나고 영민한 백성을 과학기술과 접목한 시책 늦었고

시방도 겨레 위상 드높이며 선진국으로 견인하는 과학기술인들의 열정과 눈부신 성과를 망각하며 살고 있지 않은 지 옷깃 여미고 돌아봐야 한다.

- 송봉현 < 인천대교에서 >


문화탐방 동호인들과 경기도 수원시에 위치한 화성에 갔다.

여러가지 관광 안내 자료를 보고 해설사의 화성에 얽힌 얘기를 들으며 조상들이 남긴 빛나는 자취를 음미할 수 있었다.

화성은 높이 4~6m, 둘레 길이 5.7㎞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재다.

1801년 발간된 < 화성성역의궤 >에는 축성계획제도 법식 동원된 인력의 직능별 인적사항, 역할에 따라 차등 지급한 노임, 축성과 행궁에 소요된 자재의 출처, 사용된 기계 시공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 의궤에 근거하여 전란과 일본 강점 시 훼손된 부분들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성 안에 임금이 정무를 수행할 수 있는 행궁을 갖춘 화성의 축조는 조선조 22대 정조의 발원으로 착공하였다.

이 대역사(大役事)를 2년 9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완성한 토목기술은 그 당시엔 파격이요 눈부신 성과물이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평야에서 산으로 이어진 ‘평 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포함한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성곽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조는 어렸을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 당한 충격으로 크나큰 슬픔의 못이 가슴에 박혔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뒤 그 슬픔을 효성과 백성들에 대한 선정으로 풀어낸 훌륭한 임금이다.

정조는 왕위를 승계할 세손 때엔 조정의 엄격한 법도에 따라 스무 살이 넘도록 한 번도 아버지 묘소를 가볼 수 없었다.

왕이 된 뒤에야 아버지의 묘를 찾도록 했다. 하명 받은 신하가 돌아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봉산(전농동 소재) 계곡에 가묘처럼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명당을 잡아 아버지 묘를 옮긴 것이 현재의 사도세자 묘소다.

효도의 리더십으로 상찬되는 정조는 아버지 묘 가까운 곳에 화성을 축조하고 행궁을 지어 일곱 번 머물렀다 한다.

정조가 등극한 해는 1776년이며 화성은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성했다.

이때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의 굴뚝 연기와 수증기가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그 매연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냄새가 스며들었다고 봐야 한다.
 
내연기관으로까지 나아가진 못하고 인력으로 움직인 기기들이지만, 화성 축성 시에 개발된 거중기(기중기), 녹로(크레인), 동차(네 바퀴 운반 기구) 등이 그 예이다.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 등이 이러한 기계개발의 핵심 인물들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창의적인 과학기술인들이었다.

실학파 과학기술인들은 중국을 통해 입수한 과학기술도서를 읽고 연구하여 화성축조에 필요한 여러 기계들을 개발했다.

그 기계와 기구들을 이용하여 노동력을 줄이고 짧은 기간에 축성을 완성한 것이다.
 
따라서 화성은 조선조에 우리 과학기술인들의 역량이 발휘된 “과학기술의 꽃”인 것이다.

조선시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사농공상(士農工商)사상이 찌들고 철벽처럼 두터웠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뚫고 과학기술을 탐구한 실학파들을 생각하면 그 용기와 신념이 기립박수 치고 싶도록 감명 깊다.

벌써 몇 해가 지났다. 인천대교 개통 전 가을날 대교를 건너고 잠시 주탑(柱塔) 아래 서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개발도상국들이 부러워하고 선진국들도 예찬하는 우리의 번영을 일으켜 세운 과학기술.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기술 없인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에 이를 수 없는 자원 빈국이다.
 
우리 과학기술인들의 노력으로 이만큼 살고 있는데 왜 사회적 분위기는 우수 인력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상황이 되었을까.

우려의 짐을 진 채 장대하고 웅장한 다리에 서서 바다와 화물선을 바라보며 상상의 날개를 펴 한 편의 과학기술 시를 얻었다.

화성을 답사하면서 뜬금없이 인천대교에 섰던 때가 떠올랐다. 교각 사이를 800m나 벌이고 서 있는 인천대교.

230m의 주탑에 매달은 거대한 구조물 사장교를 우리 기술로 건설한 과학기술인들처럼 실학파들은 조선 사회에서 우리 기술을 견인한 거룩한 삶을 살았다.

특히 정약용은 목화 솜 타는 기계를 개발하여 청계천 변에 시설을 갖추고 집일을 도와준 천만호에게 주었다.

천만호는 주인에게서 선물 받은 첨단장비를 이용해 떼돈을 벌어 일약 대 부호가 되었다고 한다.

6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행궁을 둘러본 뒤 땀을 뻘뻘 흘리며 성곽을 끼고 팔달산에 오르기는 힘들어도 일행과 어우러져 즐거웠다.

잘 자란 숲과 조화를 이룬 문루, 장대, 노대, 포루, 각루 등 아름다운 성곽을 보며 실학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꼭대기 서장대 부근 느티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곰곰 생각해 봤다.

조선조 27명의 왕 중에서 정조는 세종과 함께 ‘대왕’으로 호칭되는 임금이다.

따져보니 세종, 정조 두 분 모두 과학기술을 챙긴 공통점이 있다.

성리학자들이 숲을 이루고 권력의 주변에서 정권을 휘두르는 속에서도 세종은 장영실, 이천 등 과학기술인들을 등용하여 여러 기기들을 개발했다.

천문 기상 관서를 왕 집무실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 농업 등에 적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정조는 홍대용, 유형원, 정약용, 박제가 등 실학파 과학기술인들로 하여금 연구개발의 황금기를 이루게 했다.

역사학자들을 따라 백성들로부터 ‘대왕’으로 호칭되는 세종과 정조의 과학기술 중시 통치 철학은 현대의 대통령들을 평가하는데도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국가의 자존을 더 끌어올리고 복지국가 및 행복한 나라 세움도 앞선 기술을 개발하여 경쟁력을 높인 과학기술인들의 뜨거운 열정과 노력이 없다면 허허로운 꿈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