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3

특별기획 - 탈 추격형 혁신시스템 구축을 위한 가치와 방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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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형 혁신시스템은 그동안 우리나라의 주요한 성장전략으로서 이를 통해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경쟁환경 때문에 그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에 따라 탈 추격형 혁신시스템으로의 전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추격형 혁신시스템의 한계에 이르게 된 요인과 탈 추격형 혁신시스템의 대두, 탈 추격형 혁신체제의 가치와 방향성, 탈 추격형 혁신체제 설계를 위한 원칙을 살펴보고자 한다.


* 탈 추격형 혁신이란 지난 30여 년간의 한국 사회 · 경제의 발전이 선진국(일본, 미국)의 발전경로를 따라가는 것을 지양하고, 우리나라만의 새로운 혁신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편집자 주)


문제의 제기

우리나라 과학기술 부문의 투자와 성과의 양적 성장은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이루어져 왔다.

2011년 현재 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4.03%로 세계 2위권을 기록할 만큼 연구개발자원 투입에 있어 공격적인 투자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개발투자 증가 추세에 비해 그에 상응하는 사회 · 경제적 효과가 뒤따르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직접적으로는 기술무역적자의 증가 추세와 특허의 질적 수준 저위 현상의 지속등이 나타나고 있다.

간접적으로는 거시적 차원에서의 경제성장률 둔화, 사회적 양극화 확대 등의 현상이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2000년대 초반 유럽 주요국 들이 보여주었던 연구개발투자 대비 경제성과의 하락이라는 유럽 패러독스가 한국에서도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기존의 추격형 혁신을 벗어나는 전환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스템 지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 한다.

추격형 혁신시스템은 그간 한국경제의 성장체제에 조응하여 빠른 학습과 기술습득, 생산성 향상, 산업고도화 등에 기여해 왔으나, 최근 2군 후발국의 추격과 프론티어 제품군으로의 진입에 따른 기술원천과 기술창출 방식상의 변화 등 새로운 경쟁환경에 노출되면서 조직 및 제도의 변화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시스템지체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추격기를 벗어나면서 기초원천 지식생산 및 수요지향적 연구개발기획 필요성이 증대하고, 기술 및 산업혁신의 다양성 확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혁신환경의 변화가 요청되고 있다.

또한 경제주체의 다원화를 통해 다양한 기술적 지식생산 및 확산의 통로 확대와 융 · 복합 환경에의 대응, 사회경제적 성장 잠재성 확대 등 혁신의 사회경제적 확산과 관련된 요청도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혁신정책은 추격기로부터 탈 추격기로의 전환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전환을 촉진함으로써 이러한 시스템 지체 현상을 극복한다는 동태적 관점에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시스템 안정기에는 자원 배분에 따른 효율성이나 제도간 정합성 등이 혁신 정책의 주요 이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스템 전환기에는 새로운 시스템이 담지하는 가치와 원리의 재정립, 새로운 시스템이 요청하는 제도적 배열의 내용, 혁신주체간 관계를 규정하는 원칙, 전환의 방식 등이 혁신 정책의 주요 내용으로 부각된다.

이 글은 창조경제의 달성이 국정 어젠더로 부상하는 시점에서 탈 추격형 혁신시스템 구축을 위한 정책 방향성 및 과제를 도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추격형 시스템의 한계와
탈추격형 시스템의 부상


추격형 혁신체제는 우리나라의 지난 경제성장 과정에서 순기능을 담당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혁신성과가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배분되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추격형 혁신체제는 발전국가가 추동하는 선별적지원 정책에 의해 기업과 산업에 대한 선택과 집중지원이 이루어졌다.

잠재성이 있는 기존 기술의 추격을 목표로 학습기간을 단축하고, 정책금융지원에 의해 단기간에 대량생산체제와 규모경제를 달성함으로써 몇몇 제조분야에서 급속한 성장을 경험하였다.

초기 성장기에는 주로 기술 성숙기에 진입하여 제조능력을 축적하는 형태의 기술변화에 집중하였으나, 기술능력의 축적에 따라 제품수명주기에서 지배적 설계(dominant design)가 설정된 직후 진입하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지위까지 성장하였다.

이러한 추격형 기술-경제체제는 이에 부응하는 사회-제도적 틀과 공진화해왔다.

발전국가, 중앙집권적 의사결정, 기업의 수직적 위계구조와 가족지배 중심의 기업 거버넌스 등은 특정 제품 및 산업에의 집중투자 및 빠른 의사결정과 이에 따른 높은 리스크를 부담할 수 있는 구조로 기능해 왔다.

여기에 보편교육을 통한 양질의 노동력 공급 등 전반적인 사회-제도적 틀이 추격형 기술-경제체제에 조응하면서 한편으로는 글로벌 대기업 및 주력산업의 성장과 혁신 역량 증진 등의 경제성장을 가져오고 이를 통한 중산층의 성장으로 사회적 통합의 기반이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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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추격형 시스템의 성과와 한계)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추격형 혁신체제가 환경의 변화와 내부 동학의 변화에 의해 한계에 봉착했다고 볼 수 있다.

대외 환경 측면에서는 5차 정보통신 패러다임의 쇠퇴기에 기존 기술간 결합에 의한 활용융합 현상이 두드러지고, 성숙기 이후 진입장벽이 낮아짐에 따라 많은 후후발국의 등장으로 추격을 둘러싼 경쟁압박이 심화되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세계화로 인해 후발국의 입장에서는 산업지원이 제한되는 시장주의적 게임의 룰하에서 운신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대내적으로는 국내 재벌 대기업의 글로벌 기업으로의 성장에 따라 추격전략에 근거한 성장 잠재력이 급속히 고갈되고, 프론티어 제품개발능력과 와해적 혁신이나 급진적 혁신의 필요성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또한 선택과 집중 원칙에 입각한 선택 메카니즘의 루틴이 혁신활동의 다양성 진화를 옭아매는 제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즉 중소, 중견기업 육성을 통한 다양한 경제주체의 형성, 균형 있는 기술적 지식생산의 풀 확보, 장기 사회경제적 효과창출을 위한 기초연구의 성장, 다양성 원천으로서의 지역기술혁신 등 혁신환경 전반의 다양성 확보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더욱이 사회-경제적 차원에서는 소수 경제주체에의 집중화에 따라 부문별 양극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추격형 기술-경제체제의 동력이 고갈됨에 사회-제도적 틀의 동력도 상실되어가면서 새로운 추격을 넘어선 탈 추격형 기술-경제체제의 도래에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다.


탈 추격형 혁신체제의 가치와 방향성

탈추격 국면으로의 진입에 따라 새로운 환경적 조건이 등장한다.

기초 · 원천 연구역량의 중요성이 증대하고,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기술 및 지식의 사업화에 따른 높은 기술과 시장의 위험도가 증가한다.

또한 기존 기술이나 기존 지식의 결합을 통한 융복합 경향이 증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의 결과로 글로벌 수준에서 다양한 기술적 대안이 출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회-제도적 차원에서는 먼저 탈추격형 혁신활동의 증가에 따라 새로운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적 틀이나 규율원리에 대한 요구가 증가할 것이다.

또한 5차 기술-경제패러다임이나 추격시스템의 성장동력 고갈에 의해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압력도 증가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조건들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가치를 요청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기초 · 원천 연구활동을 추동하는 호기심이나 창의성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이에 따라 높아지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에 대한 요청이 증가할 수 있다.

기존의 기술을 추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개척해야 하기때문에 원천 지식과 이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강화될 필요성이 증가한다.

다양한 지식의 원천이 발생하고 이것이 지식창출의 생태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새로움과 이질성을 인내할 수 있는 다원주의와 개방성이 혁신체제가 포괄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등장할 것이다.

다원주의와 개방성은 추격형 혁신체제에서 기능했던 위계형, 폐쇄적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또한 공급위주의 기술개발방식으로부터 사용자, 공급자, 기타 사회경제적 이해집단 등 혁신활동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간의 서로 다른 입장을 조정하는 합의과정을 포괄할 수 있는 연구개발 기획 및 실행 시스템과 주체 간 관계를 정의하는 상호작용 원리에 대한 제도적 전환도 요구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시스템 전환에 따라 부상하는 새로운 혁신주체와 기존 주체간의 갈등관리를 전제로 한 거버넌스의 구축이 요청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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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추격형과 탈 추격형 혁신시스템 : 한국의 경우)


탈 추격형 혁신시스템은 기초 · 원천 기술의 생산과 새로운 사용가치의 창출, 상대적으로 급진적 혁신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경제주체의 다양화, 전문기업간 수평적 연계, 공공부문의 기초원천 지식생산과 기술집약형 중소기업 중심의 기술사업화 지원 활동 강화 등을 혁신주체 간 관계의 내용으로 담게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국가의 역할은 통제적 발전국가를 벗어나 네트워크 국가로서 다양한 혁신주체간의 조정자(co-ordinator), 혁신주체의 학습과 역량 강화를 지원하는 촉진자(facilitator)로서의 역할에 주안점이 두어질 것이다.

외부환경과의 상호작용 측면에서는 추격기에 축적된 내부 역량을 바탕으로 외부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개방성을 견지하면서, 글로벌 지식생산자로서의 역량축적과 활동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탈 추격형 혁신시스템을 추격형 시스템과 대비하면 <표 1>과 같다.


탈 추격형 혁신체제 설계를 위한 원칙

탈 추격형 네트워크 기반 산업정책은 강력한 국가개입과 특정주체 및 산업의 선택과 자원배분의 집중, 채찍과 당근을 수반하는 성과기준의 도입과 경쟁, 이러한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 · 제도적 강제조건을 전제로 하는(Aoki,et al, 1996; Khan &
Blankenberg, 2009; 정준호, 2012) 추격형 시스템과는 다른 역할과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

최근 네트워크 기반 혁신정책(Block, 2008; Rodrik, 2007; Schrank & Whitford, 2011) 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이 과거 추격기에서와 같은 ‘통제적 발전국가’ 모델로는 다원화되고 불확실성이 높아진 기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다.

새로운 탈 추격형 혁신체제 설계를 위해 다음과 같은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선, 탈추격형 혁신정책은 다양한 혁신주체간 정책학습을 통한 자기발견적 과정(Hausmann & Rodrik, 2003)의 관점에 기반해야 한다.

즉 기술이나 정책을 선반위에서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것(offthe-shelf)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채워나가는 것(fill-theshelf)
으로 인식하는 정책접근의 전환을 요청한다.
 
또한 불확실성을 성장의 추동요인으로 인식하고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 정비가 필요하다.

정책 목표와 성과평가에 있어서는 투자대비 산출의 관점에 의해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성과를 평가하기 보다는 역량과 네트워크 자산의 축적과 행동부가성(behavioral additionality)02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실제로 혁신과정에서 이러한 원칙을 구현하기 위한 메카니즘의 설계는 향후 연구의 과제이나,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자기발견적 과정으로서의 정책학습을 독려하기 위한 탐색과 공동학습 중심의 기획체제 구성이다.

둘째, 상호연계와 학습 중심의 공공-민간을 연계한 제도의 배열, 셋째, 역량과 네트워크 자산(신뢰)을 중심으로 한 정책목표와 평가체계의 개발,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정을 지원할 수 있는 개방화되고 분권화된 의사결정체제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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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탈 추격형 혁신활동 촉진을 위한 기획과 평가체계의 예시)


구체적인 탈 추격형 혁신체제의 메커니즘 설계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기획과 평가 활동을 중심으로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기술 기획체계는 <그림 2>에 예시된 바와 같이 미래형 기술에서는 임무지향형 기술기획을, 수요연계형 기술개발은 조정기능을 강화하는 양면 기획체제를 구조화한다.

과학기술기획에 있어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참여시키는 참여형 기획과 과학기술과 인문사회를 결합한 집단지성형 기술기획의 경험을 누적하고 확산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한편 평가 체계는 추격기의 사전선택과 자원의 집중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나 다양한 기술적 대안들의 사후 지속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혁신주체들의 행동 및 역량의 변화와 신뢰자산의 누적을 반영할 수 있는 평가지표 개발 등도 새로운 혁신 지원 경로 설계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탈 추격형 혁신체제 설계를 위한 철학의 정립, 시스템 운영을 위한 구체적인 메커니즘 설계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어야 할 시점이다.
 


01 이 글은 Hwang,H.-R. & J.-Y.Choung (2013), “Towards an Innovation Policy in the Post Catch-Up Era”, Asian Journal of Innovation and Policy(2013) 2.1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혀 둔다.

02 행동부가성에 기반한 평가지표 개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손수정(2008)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