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Agenda - 휘고 늘어나는 스마트 기기, 배터리로 화룡점정
네모난 전자기기의 시대는 가라. 최근 전자기기 디자인에 파격이 예상되고 있다.
화면이 휘고 손목에 차거나 안경으로 끼는 스마트 기기 등이 하나둘 선보인 것이다. 이들은 전자소자를 유연하게 만드는 기술과 맥을 같이 한다.
다만 한 가지 장애물이 남았으니 바로 배터리다. 미래형 스마트 기기의 화룡점정을 찍을 유연한 배터리 기술, 과연 어디까지 왔을까.
최근 삼성과 애플 등은 휘어지는 스마트폰과 손목시계형 스마트 기기의 시제품을 공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스마트폰을 접거나 둘둘 마는 모습은 SF영화에서 보던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글도 이에 뒤질세라 안경형 모바일 기기인 ‘구글 안경’을 내놓으며 혁신의 경쟁을 예고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들의 아이디어가 성공하려면 배터리의 혁신이 동반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화면을 휘게 할 순 있지만 배터리까지 휘게 하려면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실제로 휘어지는 디스플레이는 한쪽에 딱딱한 배터리를 부착한 채 공개됐다.
손목시계형이나 안경형기기도 크기가 작은 만큼 배터리 용량이 부족하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유연한 배터리를 개발해 시곗줄이나 안경테 전체에 적용하는 방법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다행히 국내외 연구자들이 배터리에 유연성을 부여한 연구결과들을 속속 내놓고 있어 미래형 스마트 기기를 실생활에서 사용할 날이 멀지 않을 전망이다.
휘는 것은 기본, 이젠 늘어난다
한양대 백운규 에너지공학과 교수팀은 미국 일리노이대 존 로저스 교수팀과 공동으로 휘어지는 수준을 넘어 늘어나기까지 하는 배터리를 개발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2월 26일자에 발표했다.
이 배터리는 사방에서 잡아당기면 원래 크기의 최대 4배까지 늘어나고, 손을 놓으면 원 상태로 돌아간다.
전력과 전압이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와 비슷해 늘어난 상태에서 LED 전구를 9시간 가까이 밝힐 수 있었다.
연구자의 팔꿈치에 늘여 붙인 실험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해 굴곡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줬다.
네모난 모양에 말랑말랑한 이 배터리는 가로세로 약 4cm 크기의 주머니 안에, 지름 2mm짜리 전극 100개를 ‘스프링’으로 연결해 만들었다.
스프링은 커다란 S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그 안에는 더 작은 S자 모양의 스프링이 함께 들어있어서, 잡아당기면 커다란 S자가 먼저 펼쳐지고 다음으로 작은 S자 스프링이 펼쳐진다.
연구팀은 오래전부터 각종 전자소자에 유연성을 주는 기술을 개발해 왔다. 2009년에는 휘어지는 태양전지를 개발했고 2011년에는 휘어진 LED 전구에 불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팀은 각 소자를 커튼처럼 주름을 만들어 연결하거나 ‘Ω’ 모양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S자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크고 작은 S자 모양을 이중으로 넣는 방법을 채택했다.
이 배터리는 충전이 가능한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하고 무선으로 충전할 수 있는 기능도 갖춰 다양한 분야에서의 활용이 기대된다.
다만 현재 배터리는 충전과 방전을 20번 넘게 반복하면 기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어 추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백 교수는 “앞으로 LED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유연한 전자소자를 신축성 있는 배터리와 결합해 마음대로 휘고 접고 늘일 수 있는 전자기기를 한번에 만드는 기술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림 1> 가로세로 4cm인 배터리(왼쪽)를 사방에서 잡아당겨 최대 4배까지 늘였지만 전압은 일정했다(자료 :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그림 2> 이 배터리를 팔꿈치의 굴곡진 부위에 부착해도 안정적으로 작동했다(자료 :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그림 3> 이 배터리는 크고 작은 S자 모양의 ‘스프링’으로 각 전극을 연결했다(자료 :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몸에 넣어도 안전한 배터리, 프린트한다
배터리를 유연하게 만드는 기술은 스마트 기기뿐 아니라 의료 분야에도 활용 가치가 높다. 환자의 몸 안에 넣어서 뇌파나 심장 박동을 꾸준히 확인하는 장비에 전원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배터리에 들어가는 모든 물질이 사람에게 해롭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앞서 소개한 배터리에는 인체에 해로운 액체 물질이 들어간다.
양극과 음극 사이에 전류가 흐르게 만드는 전해질로 쓰이는 ‘카보네이트’ 물질이 문제가 된다. 양극과 음극을 분리하는 막도열에 약해 자칫 두 전극이 만난다면 폭발할 수 있어 의료용으로 쓰긴 힘들다.
울산과기대(UNIST) 이상영 친환경에너지공학부 교수와 공주대 조국영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고체 상태의 안정한 고분자 물질을 전해질로 활용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연구팀은 고분자 물질을 물엿처럼 흐르게 만든 뒤, 빵에 물엿을 바르듯이 전극 위에 인쇄하고 자외선을 30초 정도 쬐는 방식으로 휘는 배터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양극과 음극, 전해질 등 배터리의 모든 부품을 순서대로 인쇄하기만 하면 돼 연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지금까지 액체 전해질로 배터리를 만들려면 복잡한 단계를 거치며 12시간 넘게 걸려야 했다.
이 연구결과는 재료분야의 권위지 ‘어드밴스드 머티리얼스’ 3월 13일자 표지논문으로 실렸다.
(그림 4> 안정한 고분자 물질을 페인트칠하듯 인쇄하는 방식으로 유연한 배터리를 개발하는 기술이 개발됐다(자료 : 울산과기대 이상영 교수팀).)
휘는 배터리 1만 번 반복해서 쓴다
유연하고 안전할 뿐만 아니라 충 · 방전을 많이 할 수 있는 배터리도 개발됐다. 지난해 KAIST 이건재 신소재공학과 교수팀은 잘 휘면서도 충·방전을 1만 번 반복해도 안정적인 배터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능 좋은 배터리를 만들려면 양극재료를 고온에서 열처리 해야 하는데, 플라스틱 기판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연구팀은 딱딱한 광물인 운모로 만든 기판 위에 양극재료를 700도로 열처리 한 뒤 운모 기판을 떼어내는 방식을 고안했다.
남은 부분을 플라스틱으로 다시 감싸 머리카락 10분의 1 두께에 불과한 얇고도 유연한 배터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개발한 배터리는 휘기 전과 후의 전압이 변하지 않은 것은 물론 충전과 방전을 1만 번 반복해도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배터리 내부에는 열에 강한 고체 전해질을 써서 폭발할 위험도 없다.
연구팀은 이 배터리를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에 부착해 휴대가 가능한 유연한 전자장치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교수는 “이번 연구로 휘어지는 전자제품 개발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을 넘었다”며 “앞으로 배터리의 충전용량만 더 늘리면 상용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림 5> ①플렉시블 배터리는 휘어도 전압이 일정해 LED 전구의 밝기가 바뀌지 않는다. ②이 배터리를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와 결합한 결과, 글자가 나타난다(자료 : KAIST 이건재 교수팀).)
배터리 혁신이 전자기기 혁신 이끈다
현재 배터리는 스마트폰의 내부 구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배터리의 용량을 얼마로 하며, 일체형과 탈부착형 중 어떤 것으로 하느냐에 따라 크기나 두께 등이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터리의 모양만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성냥갑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두루마리 전자 종이, 휘는 디스플레이, 입는 컴퓨터 등 신 개념 전자기기가 오래 전부터 장밋빛 미래를 제시했지만 배터리 기술만은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는 ‘플렉시블’ 기술의 맹점을 잘 드러낸다. 당장 눈에 보이는 플렉시블 디스플레이에 집중한 탓에 이를 실질적으로 구동할 배터리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금 늦었지만 유연하고 신축성 있는 배터리 기술이 상용화되면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은 엄청날 것으로 기대된다.
배터리 크기나 구조의 한계가 사라지면서 기기 전체의 디자인을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원의 역할에 그쳤던 배터리가 일약 디자인의 혁신을 이끄는 선두주자가 되는 셈이다. 이는 손목시계나 안경형 기기를 넘어서, 입는 컴퓨터의 획기적인 디자인을 기대하게 만든다.
배터리를 둘둘 말아 소형화할 수 있으니 체내 삽입용 기기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일상 속에 자리 잡은 전자기기의 디자인에서 배터리가 당당한 주인공을 차지할 날이 결코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