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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 에세이 - 인문학으로 세상 보는 눈을 넓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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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칠림 STL 회원 / 前 대우건설 부사장(기술연구원장) clpark2003@naver.com


오랜 직장생활을 마치고 대학원 강단에 섰을 때, 많은 공대 학생들이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것에 크게 놀랐다. 심지어 전공 분야 외에 다른 서적은 거의 한 권도 읽지 못했다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졸업 후에는 직장과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뛰느라 인문학 관련 책을 읽을 겨를이 없다고 하니 인문학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는 셈이다.

비단 공대생만의 일은 아니다. 사회로 진출하는 모든 전문분야 졸업생이 모두 비슷한 상태이다.

다음 세대를 짊어진 젊은 청년들이 졸업 후 사회에 나와 전공지식 밖에 모르는 답답한 世稱 공돌이(공대생을 일컫는 애칭(?), One Eyed Jack - 공학만 공부하여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동전의 한 면 밖에 못 보는 외눈박이라는 뜻)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공대생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서 1년간 주로 여름과 겨울방학 기간을 이용해 북캉스(바캉스 가는 대신 책 읽는 휴가 - 自作 합성어)를 가졌다.

이렇게 인문학 관련 도서 100여 권을 읽으며 나 자신의 인문학 소양을 재충전, 보완한 후 인문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물론 북캉스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첫 학기에는 생소한 강의 내용 탓인지 학생들이 의아해 하더니, 한 학기가 지난 후에는 타 학과는 물론 타 대학 학생들까지 수강신청을 해 수강생이 매번 50명을 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대학원에 단 하나밖에 없는 대형 강의실을 특별히 배정받아야 했고, 인터넷 수강신청이 개시 되자마자 등록이 마감되어 수강신청을 포기해야 했다는 수강생들의 원성도 들었다.

보통 석박사과정은 과목당 수강생이 5 ~ 10명 정도가 보통인데, 50명에게 강의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마치 고등학교나 학부 강의실 같았다.

하지만 학생들이 생소한 인문학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질문 공세에 피곤한줄 모르고 자연스럽게 열강(?)을 하게 되었다.

강의가 끝난 후에는 학생 5 ~ 7명과 커피숍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강의에 대한 토론과 학교생활, 진로 등에 대하여 대화 하는 날이 많았다.

수강생들로부터 “세상을 보는 눈(眼目)이 넓어졌다” 라는 강의평가를 받는, 참으로 보람되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당시 커피숍 토론팀은 이제 졸업하여 30 ~ 40대가 되었지만, 지금도 바쁜 시간을 틈내어 정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모임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그들의 사회생활에 자연스럽게 Mentor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사회와 직장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꼭 필요한 주요 인물로 활동하고 있다.

“인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묻는 사람이 많다. 인문학을 요약하면 文, 史, 哲이다.

즉 문학, 역사, 철학인데 그외 종교, 과학, 물리학, 천문학, 예술, 환경 등 여러 분야가 이 범주에 속한다. 다양한 분야의 폭넓은 독서로 균형 있는 감각과 사고를 키우면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통합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융합과 소통이다. 요약하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철학, 즉 삶의 가치관을 말한다. 세상사는 법(요령이나 잔머리 굴리기와는 다름)을 모르면 돈도 명예도 간판도 권력도 다 소용없다.

요즘 명문대를 나온 소위 전문가라는 바보들이 얼마나 많은가?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여러 분야에서 새롭게 각광받고 있지만 일부 지식인들은 인문학의 가치가 표류하는 현실을 우려 한다.

그 이유는 인문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와 교수들 중에 인문학을 주체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정치적, 사회적 명성과 경제적 이득에만 관심을 갖고 기존 질서에의 안주와 출세를 위해 권력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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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인문학 교수, 전문가들은 인문학을 모든 인류의 삶의 철학이나 가치관, 즉 인류의 공유물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만의 직업적 전유물로 생각해왔던 결과 근래의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참된 지식인은 시대의 양심을 짊어지고 불의에 분노하고 온갖 부조리를 척결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고민한다.

사르트르의 비판처럼 전문가는 자신의 분야에는 최고일지 몰라도 사회전반의 불의와 부정, 부패에 대해서는 대부분 외면한다.

만약 대학이 지식인 양성을 포기하고 전문가 양성만을 목표로 한다면 대학과 학원이 무엇이 다를까? 인문학은 시장이 요구하는 생산성을 외면하지 않으며 보다 폭 넓은 상상력을 제공하여 창의적 인재양성에 기여한다.

인문학은 인류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 요즘 넘치는 전문가들만의 회의에서는 각자의 주장이 너무 강하여 결론도출이 어렵다.

그래서 최근의 넘치는 화두와 캠페인 주제는 융합이다. 융합이란 한 마디로 부분보다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식구 한 사람보다 가족 전체를, 마을에서는 한 가족보다 마을 전체를, 한 도시보다 국가 전체를, 한 국가보다 세계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의료분야에서도 지금까지는 몸의 특정부위 치료를 위해 특정분야의 전문의가 혼자 약을 처방해 왔으나 앞으로는 특정부위 치료를 위한 약이 다른 부위에 부작용이 없는지 여러 분야의 전문의가 모여 확인하고 몸 전체를 생각하는 처방을 하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융합은 한 때의 캠페인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모두의 마음에 항상 녹아 있어 언제나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에도 현란한 말솜씨로 군중을 휘어잡는 달변가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어물쩍 모면하는 재주꾼보다 수많은 전문가 집단을 통솔과 융합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중요한 정책을 결정해야 할 때 추호도 사심 없이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지도자를 국민은 원하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인문학적 소양과 올바른 판단력이 아닐까? 바로 이런 이유로 엔지니어를 위한 인문학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공대출신 필자의 일천한 인문학 소견으로 ‘인문학이란 이런 것이요’라 운운하는 것 자체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지만, 엔지니어, 경영자, 교수로서 쌓은 오랜 경험이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앞으로 지면이 허락한다면 그동안 학생들과 나누어 온 인문학 산책을 계속하고자 한다.